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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을 넘은 가지(창49:22-26)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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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3-05-05 06:50 조회 21,240 댓글 0
 
요셉은 그의 아버지 야곱이 91살에 낳은 11번째 아들이다. 야곱은 첫 아내인 레아를 통하여 여섯 아들과 ‘디나’라는 외동딸을 낳았다. 그러는 중에도 두 여종들을 통해서 네 명의 아들들을 더 얻었다. 요셉은 야곱이 끔찍이 사랑하고 위하던 아내 라헬을 통하여 뒤 늦게 태어났다. 야곱은 그 아들 요셉을 엄청나게 총애하였다. 다른 아들들에 비하여 편애할 정도로 사랑했고 언제나 채색 옷만 입혔다. 오늘 날로 하면 다른 아들들은 아무 시장 옷이나 사 입혔고 요셉은 어려서부터 특별히 최고의 메이커 옷들만 입혀 키웠다. 그러든 어느 날 요셉이 17살 때에 꿈을 꾸었다. 그 꿈을 형제들에게 말한 것이 화근이 되어서  열 명의 형들로부터 더욱 더 미움을 받고 시기를 받게 되었다. 꿈의 내용은 이렇다. ‘어느 날 밭에서 곡식 단을 묶는데 자기 단은 일어서고 형들의 단은 자기 단에 절하더라’는 꿈이었다. 또 꿈을 꾸었다.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기에게 절하더라’고 말했다. 이 후로 요셉은 항상 형들의 미움의 대상이었다. 그런 어느 날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먼 들판에 심부름 보냈다. 집을 떠나 들판에서 늘 양과 짐승을 돌보는 형들에게 면회하고 오라고 별미를 싸서 들려 보낸 것이다. 당시에 아버지 야곱이 머물던 곳은 헤브론이었고 열 명의 아들들이 양떼와 소떼를 목축하던 곳은 세겜의 들판이었다.

그러나 형들은 들판에서 만나게 된 요셉을 애굽으로 내려가는 장사꾼들에게 은 이십 량을 받고 빨가벗겨서 팔아 버렸다. 그리고 요셉의 옷을 찢어서 짐승을 잡은 피를 발라가지고 아버지 야곱에게 건네었다. 들짐승들에게 잡아 뜯겨 죽었노라고 거짓말을 했다. 아버지 야곱은 충격과 슬픔에 빠졌고 22년 세월이 지났다. 요셉은 17살에 애굽에 팔리어 갔고 바로 왕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 들어갔다. 이때에 아버지 야곱의 나이는 108살이었다. 그 때까지 요셉의 할아버지인 이삭이 살아 있었다. 성경은 요셉이 짐승에 뜯겨 죽었다는 거짓 비보를 전할 때에 그 소식을 야곱이 전해 듣고 충격과 슬픔에 빠진 것을 소개하지만 요셉을 잃은 슬픔은 온 집안을 슬프고 침통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 때 할아버지 이삭도 168세로 살아 있었고 그 후로도 12년을 더 살면서 집안이 돌아가는 복잡한 일들을 일일이 다 겪으며 살아야 했다. 이삭은 그 후 180년을 살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으니 말이다.

요셉의 열 명의 형들은 꿈이 많던 동생 요셉을 노예로 팔아 버렸으나 하나님은 요셉의 곁을 떠나신 적이 없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요셉과 함께 하셨다. 애굽의 노예시장에도, 바로 임금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의 집안에서 살림살이를 도울 때에도, 심지어는 주인 보디발의 아내가 성적으로 청년 요셉을 유혹할 때에도 하나님은 요셉의 마음과 생각과 믿음의 중심을 꼭 붙들어 주셨고 매 순간 함께 해 주셨다. 그러나 요셉은 결국은 여주인의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 생활까지 해야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이 갇혀 있는 감옥 안에서도 요셉과 함께 해 주셨다. 그런 이년 후에 하나님은 바로 임금의 꿈을 해석하는 해석자로 요셉을 사용하셨다. 감옥에서 만났던 술 맡은 관원이 요셉을 기억하고 임금 바로 앞에 소개하고 불러 낸 것이다. 요셉은 하루아침에 바로 임금의 총애를 받는 애굽의 제 2 인자가 되었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은 애굽의 칠년 풍년 뒤에 이어진 칠년 흉년을 총괄하는 거국적인 총리가 되었다. 당시에는 가나안에도 기근은 극심하였다. 결국 야곱의 아들들은 애굽을 드나들며 양식을 구하고 있었다.

흉년 이년 째 되던 해에 요셉은 아버지 야곱과 가족들 70명이 고센 땅에 모시고 살아가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 때에 애굽에 내려간 야곱은 바로 임금을 만날 기회도 있었다. 그 때 야곱이 밝힌 자신의 나이가 130살이었다. 그 당시에 아들 요셉의 나이가 39살이었으니까 역으로 계산하면 요셉을 낳을 때의 아버지 야곱의 나이가 계산된다. 야곱은 그 후에 고센 땅에서 17년을 더 살고 147살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창세기 49장의 말씀은 야곱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전에 12아들들과 요셉의 두 아들들인 손자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하는 내용들이다. 그 중에 오늘 본문은 아들 요셉을 축복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아버지 야곱이 아들들을 골고루 축복하는 유언적인 예언의 말씀의 절정은 요셉에게서 돋보이게 드러났다. 물론 아버지 야곱은 레아를 통한 넷째 아들인 유다에 대하여도 대단한 축복의 선언을 하였다. 그러나 본문의 요셉을 향한 아버지 야곱의 축복과 예언의 말씀은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예언이요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었다.

가정의 달 오월이 다가 오고 있다. 아들딸 사위 며느리 친손과 외손을 막론하고 자녀와 후손들을 향한 부모와 어른들의 소망은 한결 같다. 이 세상에서 자손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또한 예수님을 잘 믿는 명문가의 신앙 유업을 잇는 후손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간절하다. 본문의 야곱이 아들 요셉을 축복한 내용을 묵상하다가 보면 그런 마음이 더욱 불 일 듯이 일어나게 된다. 차근차근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어 보자.


담을 넘는 샘 곁의 무성한 가지.
척박한 땅에서 포도 농사가 잘되려면 물의 공급이 충분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포도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나고 담을 넘을 정도로 풍성하게 자라나서 많은 열매를 맺으려면 샘 곁에 심겨진 포도나무가 되어야 한다. 우리 성경에서는 그냥 ‘무성한 가지’, 혹은 ‘담을 넘은 가지’라고 번역하고 말았지만 원어와 영어 성경에 보면, “열매가 풍성한 포도나무, 샘 곁에 심겨진 풍성한 포도 열매를 맺은 포도나무, 포도나무의 줄기가 담을 넘은 포도나무”라는 뜻이다. (Joseph is a fruitful vine, a fruitful vine near a spring, whose branches climb over a wall.)

우리교회는 성찬 시간에 성찬용으로 잘 구별하여 판매하는 성찬용 포도주를 구입하여 사용한다. 우리가 직접 포도나무 농사를 하고 직접 포도 열매를 수확하여 포도주를 담근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 농사와 생산과 제조 과정이 성찬용으로 구별되었으리라는 신뢰를 갖고 마련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올 해 들어서 고난 주간의 성 금요일 이후로 사용하는 성찬 떡인 무교병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성경적인 근거에 의해서 정성스럽게 만든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그야말로 무교병이다. 그 성별된 포도주와 무교병이 우리의 손길에 까지 닿고 우리의 예배에 사용되는 것처럼 하나님은 아버지 야곱을 통하서 아들 요셉을 축복하기를 “요셉아 너는 무성한 가지요 담은 넘는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고 축복하였다. 이 때 이미 하나님은 요셉을 그렇게 성별되고 존귀한 하나님의 아들로 애굽과 그 근동 지역에 탁월하게 소문난 명총리로 들어 쓰고 계셨다. 이미 요셉은 담을 넘은 가지 인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기를 80년 동안 한 결 같이 하나님이 그와 동행하시는 축복과 은총의 주인공으로 살아갔다.

여기서 중요한 축복의 표현은 담을 넘었기 때문이 아니라 ‘샘 곁에 심겨졌다’는 점이다. 이것은 축복의 원리요 원칙이요 공식과 같은 것이다. 아무리 극상품 포도나무라도 척박한 땅에 심어 놓으면 메말라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좋은 포도나무 즉 극상품 포도나무를 샘 곁에 심어 놓을 때에 그 샘의 물을 충분히 공급 받고 풍성하게 자라나서 때가 되면 담을 넘는 포도나무로 무성하게 자라나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샘 곁에 심겨진 인생으로 키워 내야 한다. 나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가족과 특히 자녀들을 샘 곁에 심겨진 포도나무 인생으로 키워나가야만 한다.

시편 1편의 교훈이 바로 그러하지 않나.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1:3)라고 하였다. 악인의 나중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인생이 되고 말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의 샘 곁에 심겨지고, 시냇가에 심겨진 포도나무는 시절을 따라 풍성한 과실을 맺게 되어 있는 법이다. 이것은 자연의 원리일 뿐만 아니라 성경의 원리이고 하나님의 원리이다.

대개의 부모들은 아들딸들이 담을 넘는 가지 인생이 되는 데는 관심이 많고 그런 기대 가운데서 자녀들에게 온갖 정성을 쏟고 투자하고 하는데 정작 중요한 한 가지 성경적인 진리를 잃어 버릴 때가 많다. 샘 곁에 심겨진 포도나무 인생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면 여기서 말씀하는 샘이란 무엇일까.

하나님이 샘이시고, 예수님이 샘이시다. 성령님이 샘이시고, 성경 말씀이 샘이다. 예배가 샘이고, 교회가 샘이고, 가정의 가족 예배가 샘이다. 그 샘의 물줄기가 마르지 않도록 하여야만 한다. 샘이란 용어 자체가 샘은 마르지 않는 우물을 말하지 않는가. 비 가 오지 않고 아무리 극심한 가뭄이 온다고 해도 마르지 않는 우물이여야만 샘인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은 마르지 않는 샘이다. 건전하고 건강한 복음이 있는 교회는 마르지 않는 샘이다. 예배와 기도와 말씀이 살아 있는 가정은 마르지 않는 샘이다. 그러므로 샘 곁의 무성한 가지 인생으로 살아가는 자는 잘 못 되지 않는다. 죄 짓지 않는다. 오히려 죄와 악을 멀리하게 되고 하나님을 친근히 하게 되니 하나님의 복이 넘쳐흐르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대개가 성공한 사람이나 출세한 사람이나 잘 된 사람을 부러워할 줄은 알면서 정작 신앙적인 자기 관리에는 게을리 하는 이들을 볼 때가 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최근의 사건을 보라.

만삭의 아내를 목 졸라 죽인 의사가 20년 형을 받았다. 2011년 1월에 마포의 자기 집에서 임신 9개월인 아내와 다투던 의사 남편이 아내를 목 졸라 죽였다. 그 사건은 상고심으로 대법원에까지 가져갔고 모든 범행 일체가 확정되어 결국 20년 감옥형을 받게 된 것이다. 순간적이고 우발적이더라도 아내를 살해한 범행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의사의 자격증이 그를 지키나. 공부 많이 한 것이 그를 지키나. 매 순간 나를 지키는 힘과 능력과 지혜는 어디서 공급되는 것인가.

사건 피의자 여성과 불의한 관계를 가진 31살의 젊은 검사가 2년 형을 받고 법정 구속되었다. 회사 돈을 공금으로 대하지 못하던 대 기업의 총수가 3년 실형을 받고 감옥에 들어갔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이사, 검사, 기업의 총수를 아무나 할 수 있나. 거기까지 가도록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열심히 살았겠나. 그러나 일순간의 자기 관리에 실패하고 나면 십년 아니 평생의 공든 탑이 일순간에 무너지고 마는 것 아닌가.

성경에도 그런 사건들은 넘쳐 난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샘 곁에서 무성해지는 인생으로 자신을 관리하지 못하면 그 나중이 불행하게 되는 경우는 너무나도 많았다.

가령 아브라함을 따라 갔던 조카 롯을 보라. 그에게는 삼촌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을 통해서 보아 알고, 들어 알고, 깨달아 알고, 신앙으로 하나님께 진실한 응답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조차 롯은 아브라함과 같은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을 만한 그 좋은 기회들을 다 놓쳐 버리고 말았다. 스스로 샘 곁에 심겨져서 무성해져 갈수 있는 축복 인생의 기회가 그렇게 많았음에도 롯은 그렇지를 못했다. 결국은 눈에 화려해 보이는 소알 땅의 소돔과 고모라를 택했고 롯의 나중은 점점 꼬여가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모습은 형제인 야곱과 에서에게서도 절절히 관찰할 수 있지 않나. 저들은 아브라함의 쌍둥이 손자들로 태어났다. 아브라함이 160살 되던 때의 일이다. 아브라함은 쌍둥이 손자 에서와 야곱이 15살 되던 해 까지 저들의 성장을 지켜보았다. 아브라함이 저들 손자들에게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이 자신에게 언약하신 말씀들을 한두 번 말해 주었겠는가. 그와 같은 신앙 교육은 아버지 이삭도 어머니 리브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에서와 야곱의 나중은 너무나도 달랐다.

이것은 무엇을 교훈하는가. 지리적인 샘, 환경적인 샘도 중요하지만 그 샘의 물을 마시는 것이 중요하다. 즉, 각 사람이 개인적으로 은혜를 받아야만 하고 회개와 결단과 변화의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서양에 “말을 물가에 끌고 갈 수는 있지만 그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는 속담이 있다. 가정의 환경, 교회의 환경...이와 같은 샘물의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소중하지만 그 샘에 깊게 뿌리를 내리는 인생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물을 빨아 드리는 포도나무로 살아가야만 무성한 가지요 담을 넘는 가지 인생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가나안 정복시대의 아이 성 전투 때의 아간은 그렇지를 못했다. 사사 삼손도 그렇지를 못했다. 임금 사울 왕도 그렇지를 못했다. 임금 솔로몬도 그 나중은 그렇지를 못했다. 그러므로 어려서 예수님을 잘 믿는 것도 중요하고, 젊어서도 물론 중요하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중요하도 연세가 많이 들어서도 여전히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신앙의 태도이다. 샘 곁을 떠나면 그 가지는 마르고 죽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진리다. 이 원리를 벗어나면 누구라고 잘못되고 누구라고 망하고 만다. 감옥(監獄)이 무서운 심판의 공간이지만 지옥(地獄)은 감옥보다 억만 배 더욱 더 무서운 심판의 처소요 영원한 심판의 처소가 아닌가.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초청이 물론 먼저이지만 날마다 매 순간마다 하나님을 향한 나의 응답과 반응 또한 반드시 중요한 것이다. 

룻기의 주인공인 룻을 보라. 시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남편도 죽고, 시동생도 죽었다. 집 안의 남자란 남자는 다 죽었다. 그러나 며느리 룻은 참담한 슬픔을 겪으며 이방 땅인 모압 땅에서 불쌍한 나날을 살아가던 시어머니 나오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동서 오르바는 동족에게로 쉽게 가 버렸다. 시어머니 나오미도 슬프고 며느리 룻도 슬픈 나날을 지내야 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남편도 잃고 두 아들도 죽음으로 앞서 보내야 했다. 젊은 며느리 룻도 아들딸 하나 없이 아주 젊은 날 남편을 잃고 홀로 된 슬픔에 빠져 있었다. 그런 슬픔을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하기로 결심하였다. 룻은 동서 오르바와는 달랐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고....어머니의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는 고백을 하며 시댁 나라의 시댁 마을인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으로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서 이주하였다. 그리고 룻은 이삭을 줍던 여인에서 베들레헴의 대 지주인 보아스의 아내가 되고, 다윗왕의 증조할머니가 되는 축복의 여인이 되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샘 곁에 심겨진 무성한 가지요 담을 넘는 가지의 인생길을 살아간 것이다. 성경은 동족인 모압의 친정으로 돌아간 오르바의 운명에 대하여는 더 이상 한 마디도 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만으로 인생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멀리 내다 볼 줄 알아야 한다. 당장 어렵고 힘들고 지치고 감당하기 복잡해도 하나님의 뜻을 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샘 곁에 뿌리를 깊게 내리게 되는 것이다.

“너는 담장 너머로 뻗은 나무”- ‘야곱의 축복’ 찬송을 다 같이 부르자.
 

전능자의 손길을 힘 입는 인생.
요셉이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친 것이 없이 애굽에 노예로 팔리어 갔던 소년이었는데 어떻게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고 80년간이나 뛰어난 총리의 역할을 감당 할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이 무엇일까. 아버지 야곱의 축복의 말씀 가운데 그 비밀이 담겨 있다. 출세하고 성공한 요셉이라고 해서 어찌 반대자가 없었으랴. 여전히 그도 그를 학대하려는 세력이나 적개심을 가진 세력들의 정치적인 반대에 부딪히는 때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마다 하나님은 요셉을 도우셨다. 어려움을 겪으면 겪을수록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고 요셉의 팔은 오히려 힘이 넘쳐 났다. 그 승리의 요인이 무엇이었을까. 야곱의 전능자이시고 이스라엘의 반석이시며 목자이신 하나님의 손길이 언제나 요셉을 붙들어 주시고 도와주신 것이다.

인생이 세상을 살면서 각 분야에서 줄 서기를 잘하고 나보다 더 역량 있고 능력 있는 그 누군가의 손을 잡는 것도 때로는 필요한 일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손을 잡을 줄 알아야 한다. 아니 하나님의 손길에 붙잡혀서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안전하고 그래야 복되고 그래야 오래도록, 평생토록,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까지 영원히 복된 인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당장 잘되고, 지금 당장 형통하고, 지금 당장 번성하는 것도 좋지만 나중에 더 중요하다. 오늘보다는 내일, 올해 보다는 내년, 현재보다는 장래에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이 나를 놓지 않으시고 붙잡아 주시는 그 은혜가 있어야만 복된 인생이요 담을 넘는 가지 인생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사사기 6장에 보면 사시 시대에 이스라엘은 이웃 나라인 미디안 세력의 침략으로 인해서 나라가 피폐해 있었다. 그런 일이 칠년 째 계속되었다. 물론 성경은 그 같은 고난의 원인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찾아내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가정주부 출신의 여 사사 드브로와 바락의 시대에 계속되던 40년간의 평화가 다시 깨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평화롭던 시대에 다시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은 미디안 세력을 통해서 채찍질을 시작하셨다. 칠 년 동안 미디안 세력이 이스라엘에 쳐들어가서 온갖 농사한 곡식들을 다 빼앗아가고 양과 소와 나귀를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다 빼앗아가려고 달려들고는 했다. 이와 같은 불안이 계속되던 때에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의 소유인 오브라의 상수리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마침 그 때에 요아스의 아들인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포도주 틀에 숨어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다. 그 때에 천사가 나타나서 기드온에게 말하였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삿6:12) 기드온은 못마땅한 감정을 천사에게 말하였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들 가운데 일어난단 말입니까. 애굽에서 조상들을 이끌어 내신 기적의 하나님이 왜 오늘 날에는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주어서 이 고생을 하게 하십니까.”하고 불만을 쏟아 놓았다. 그러자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내가 너를 보냈으니 너는 가서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에 기드온이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하나님은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삿6:16)고 격려해 주셨다. 그렇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전능자의 손이 함께 하시면 능치 못할 일이란 없다.

그 때에 기드온은 하나님께 함께 하신다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시험하지 않는가. 그리고는 염소 새끼 한 마리를 준비하고 가루로 무교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 가지고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기다리시는 하나님께로 갔다. 그 때에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가 ‘고기와 무교병을 가져다가 바위 위에 놓고 국을 부으라’고 명령하였다. 기드온은 천사가 시키는 대로 순종하였다. 그 때에 천사가 손이 지팡이를 잡고 그 끝을 내어 밀어 고기와 무교병에 대는 순간에 바위 속에서 불이 나와서  고기와 무교병을 다 불태웠다. 그 후에 천사는 떠나갔고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 후로 하나님은 기드온을 이스라엘의 강력한 사사로 사용하기 시작하셨다. 하나님은 그 날 밤에 다시 기드온에게 나타나서 명령하셨다. 아버지 소유의 칠년 된 둘째 수소를 끌고 오고 아버지 소유의 바알 제단을 헐고 아세라 제단을 찍어 부수라고 하였다.  그리고 산성 꼭대기에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제단을 마련하고 그 둘째 수소를 잡아서 아세라 목상을 찍은 나무를 태워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라고 하였다. 기드온은 순종하기는 하는데 낮에 자신이 없자 밤중에 열 명의 종을 데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번제를 드렸다. 그 때에 기드온의 마음에는 가문과 그 성읍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 그 다음 날 이 같은 사실이 온 성읍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누가 바알 제단을 파괴하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 수소를 제물로 삼고 불살랐는지 추궁하게 되었다. 그 날 이후로는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도 담대해 졌다. 그 날 이후로 기드온은 이름도 ‘여룹바알’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그 뜻은 ‘바알과 더불어 다툰다’는 의미이다. 드디어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의 연합군이 쳐들어오려고 진을 치고 있었다. 우리는 기드온의 300명 용사를 선발하여 싸운 유명한 전쟁의 일화를 잘 알고 있다. 처음에 나선 삼만 이천명으로 하지 않으시고 구별된 용사 300명으로 전쟁을 이기게 하셨다. 연전연승하는 기드온의 전쟁 승리는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드온의 이스라엘 통치를 간절하게 원하였다. 그러나 기드온의 신앙은 분명하였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삿8:23) 기드온이 통치하는 40년 동안 온 이스라엘이 다시 평안이 찾아 왔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하여야만 한다. 야곱은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전에 아들 요셉에게 분명히 예언하고 축복하였다. “이스라엘의 전능자요 반석이요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손을 힘 입으라” 이 24절을 표준새번역 성경으로 보면 그 내용이 더욱 명확하다.

“요셉의 활은 그보다 튼튼하고, 그의 팔에는 힘이 넘친다. 야곱이 섬기는 '전능하신 분'의 능력이 그와 함께 하시고, 목자이신 이스라엘의 반석께서 그와 함께 계시고”

이런 믿음의 승리자들이 모두 다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는 축복.
본문은 자세하게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축복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요셉의 하나님이시오 오늘 날 나의 하나님이시다. 야곱이 여기서 말하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란 무슨 뜻인가. 야곱은 147년을 하나님 안에서 살아 왔다. 우여곡절 많은 험악한 세월을 살아왔다. 그러나 그 모든 날들을 뒤 돌아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은혜요, 모든 것이 감사요, 모든 것이 간증이요, 모든 것이 축복이었다. 그래서 지금 야곱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요셉은 실로 아버지 야곱의 유언과 축복과 예언처럼 그런 믿음의 창대한 삶을 살아갔다. 그는 애굽의 총리요 가나안에까지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선한 하나님의 일꾼이요 가족과 애굽을 구원하는 시대적인 인물로 담을 넘은 가지 인생으로 평생을 살아갔다. 

-하나님이 너를 도우실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다.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을 주실 것이다.
-젖 먹이는 복과 태의 복을 주실 것이다.

26절, 야곱은 고백한다. 내가 받은 복은 아버지 이삭이나 할아버지 아브라함보다 더 많은 축복이었노라고 말이다. 그리고 선언한다. “영원한 산이 한없음같이 이 축복이 형제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너, 요셉의 머리로 돌아 올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 안에서 주의 말씀이 온 천하에 전파 되는 일에 존귀하게 쓰임 받는 담을 넘는 가지 인생이 우리 모두 다 되어야만 할 것이다.
 
죄를 멀리해야 한다.
하나님과 동행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의식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나중이 복되고 잘되고 좋아지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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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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