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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엡4:13-16)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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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3-04-17 22:30 조회 21,706 댓글 0
 
우리나라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는 어디 있을까. 경기도 양평군에 있는 용문산의 은행나무로 알려져 있다. 나이는 1,100년 정도 되었고 키는 42미터이다. 뿌리에 닿은 나무 아래 부분의 둘레는 15. 2미터에 이른다.

지구상에 살아있는 나무 중에서 가장 크게 자라나고 있는 나무는 어떤 나무이며 나무의 키가 얼마나 높을까. 그런 궁금증을 가지고 세계를 누비는 사람들이 있다. 유서 깊은 연구기관인 네셔녈 지오그래픽 소속의 전문가들이 세계를 누비고 발로 답사하여 찾아낸 바로는 미국 캘리포니아 레드우드 국립공원(California's Prairie Creek Fedwoods State Park)에 있는 래드우드라고 불리는 아메리카삼나무로 그 높이가 112m에 달한다. 일명 자이언트 세콰이어라고도 부른다. 이 나무들은 적게는 2,500년에서 오래되기는 3,500년 된 나무들도 아직 살아 있다.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에 이민자들이 19세기에 마구 베어 내어 자신들의 주거 공간을 건축하는 데 사용하는 무절제한 벌목으로 90% 이상의 레드우드 나무가 베어져 나갔다. 그러나 이제는 1968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고 1980년에는 레드우드 국립공원 전 지역을 유네스코 자연유산보존지역으로 지정해서 보존하고 있다. 대개의 나무들이 100여 미터씩 자라나고 400-800년 된 나무들이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다. 10년마다 열매를 맺는데 그 씨앗이 수백만개가 바람에 흩뿌려 져서 계속하여 새 묘목이 자라나고 있다. 묘목은 한 해 동안에 1. 8미터씩 자라날 정도로 빠르게 자라난다. 한 여름에도 공원 안에 들어가면 숲 속의 기온이 15도 정도여서 하이킹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공원 중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는 일본 가고시마현 오스미쇼토섬의 삼나무로서 조몬스기(繩文杉)라 불리는 이 삼나무는 "원령공주"의 섬 야쿠시마의 산에 있는데 그 수령은 무려 7,200여년이라고 알려져 있다. 나무가 오래 살기로는 아프리카의 바오밥 나무인 병나무(bottle tree)인데 그 수령이 평균 6,000년에 이른다. 병처럼 생겼다고 해서 병나무라고 하는데 나무의 체적으로는 세계 최고로 키가 평균 18미터에 나무 둘레가 9미터에 이른다.

이처럼 나무는 반만년도 더 살고 100미터도 더 크는데 사람은 아주 오래 살아야 100년을 살고 커봐야 2미터이다. 물론 사람을 말할 때에 큰 사람이란 키가 큰 사람이나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을 큰 사람이라고 하지 않지 않는가. 포용력이 있고 대범하고 결단력과 추진력이 있고 위기 극복 능력이 남 다르고 이타적이며 희생적이어서 자신의 삶을 불살라서 나라와 민족과 공동체와 인류의 문명과 역사 발전에 공헌하는 사람들을 평가할 때에 큰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가. 성경적으로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서 시작한 언약 가문의 4대 손인 요셉이 나무로 하면 큰 나무이다. 이처럼 나무 중에도 큰 나무가 있듯이 사람 중에도 큰 사람이 있다. 모세가 큰 사람이요, 여호수아나 갈렙이 큰 사람이다. 기드온도 사사 중에는 큰 사람이었다. 사사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였던 사무엘은 말할 것 없이 큰 사람이었다. 다윗이 큰 사람이요 솔로몬도 나중에 잘 못되어서 그렇지 역시 큰 사람이었다. 이사야나 예레미야나 엘리야나 엘리사나 모두 다 큰 사람이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도 큰 인물이었다. 학개도 스바냐도 모두 큰 사람이었다. 오래 살지 못하고 목이 잘려 순교 당했지만 세례 요한도 큰 사람이었다.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비롯한 열 한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 만나서 큰 인물들의 삶을 살았다. 사도 바울도 큰 사람이요, 성 어거스틴이나 토마스 아켐피스나 프란체스코 같은 인물들은 기독교 역사에 큰 인물들이었다.

한국의 기독교 역사로 하면 주기철, 손양원, 월남 이상재, 도산 안창호, 백범 김구, 이준 열사 같은 인물들이 구한말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를 만나고 따르던 시대적인 큰 인물들이었다. 우린 공부 많이 했거나 돈 많이 벌었거나 재산가였거나 뭐 그런 것을 가지고 큰 사람 혹은 큰 인물이라고 하지 않는다. 누가 큰 인물이며 장성한 인물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충만하게 성숙해 져 간 사명의 사람들이어야 큰 사람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업적보다 그 인물됨이 중요한 것이다.

세계의 일반 종교나 인류학에서는 석가나 공자나 맹자나 마호멧이나 인도의 간디와 같은 인물들에 대하여 사실보다 그들의 삶을 더 미화하고 신화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따라 다닌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후에 제자 도마를 통해서 고백된 대로 “우리의 주님이시고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부활하신 사실을 부인하던 제자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하신 실체를 만난 후에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하고 고백한 것은 매우 적합하고 옳은 신앙의 고백이 아닐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그를 믿는 우리 모두의 주님이시고 곧 하나님이시다. 그가 누구인지 잘 몰라서 비방하고 박해하고 폭행하며 지내던 사울이 다메섹의 체험을 한 이후로는 평생을 순교하기까지 이방 땅을 찾아다니며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에 매진한 것을 보면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믿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요 마땅한 일이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우리의 신앙 성장 목표와 푯대를 어느 주변 사람에게 비교하여 정하지 않고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하고 성숙해져 가야 할 것을 권면하였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다는 말씀이 무엇일까.

하나 되어 가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다 하나가 되어 가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믿는 것과 아는 일’이란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상적인 상식으로는 아는 일이 먼저다. 깨달아 알아야 믿게 되는 것이 세상적인 상식이다. 그러나 신앙은 그 반대다. 믿는 것이 먼저이고 알아가는 일과 깨달아 가는 일은 그 나중이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체험을 갖기 이전에는 믿어지지 않아서 반대하고 박해하고 비방하고 폭행하고 예수 믿는 이들을 잡아 죽이려 한 것이다. 그러나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이 강한 빛을 비추어 그는 눈을 삼일 간 비늘 같은 것으로 가리고 삼일 후에 선지자 아나니아를 통해서 안수 받은 후에 눈이 떠져서 세상을 보게 하는 신비 체험을 한 이후로 완전히 새사람으로 변화되었다. 다메섹 성으로 가던 길 위에서 “사울아 사울에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9:4)하고 예수님이 그를 부르시는 음성을 직접 들었다. 그 후로 사울은 비방자나 박해자나 폭행자가 더 이상 아니었다. 변화된 것이다. 아니 그 날 이후로 변화되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같은 자기 체험을 사도 바울은 디모데 전서 1장 13절에서 간증한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이 말씀 가운데 보면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는 고백을 했다. 잘 보라. 믿지 아니할 때란 언제이고 알지 못하고 행할 때란 언제를 언급하는 것인가를 살펴보아라. 믿지 못하고, 믿지 않을 때의 상태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할 때의 상태란 동시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믿지 못하는 것이 먼저다. 사도 바울은 구약의 말씀에 능통했던 율법학자였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즉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시리라는 구약의 예언의 말씀을 몰랐을 리가 없다. 지식적으로는 알았다. 오늘 날로 하면 신학적으로는 알았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믿어지는 것이 먼저다. 믿어지고 알게 되는 것이다. 이 믿음의 세계라는 것은 우리가 부르는 544장 찬송의 가사처럼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하고, 참아도 못한다.” 그 4절 찬송의 가사는 이렇다.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 당했네 나를 구원 하실 이 예수 밖에 없네.”

그렇다. 이것이 신앙이다. 믿으면 알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도 그런 말씀을 여러 차례 해 주신 바 있다. 마태복음 9장 27절 이하에 보면 앞을 보지 못하는 두 사람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 오며 소리를 질렀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이 어느 집에 들어가시자 또 가까이 찾아 갔다. 그 때에 예수께서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고 물으시자 “주여 그러 하오이다.”하고 대답하였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그 두 사람의 눈을 만지며 말씀하셨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그 순간에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셨으나 그들은 다니는 곳마다 예수님의 소문을 온 땅에 퍼트리며 다니기 시작하였다.

또한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고 말씀하셨다. 이는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이 산 아래서 아홉 명의 제자가 쩔쩔 매기만 하고 어찌하지 못하던 한 아버지의 귀신 들린 아들을 고쳐 주신 후에 하신 교훈의 말씀이시다. 귀신에 들려서 입에 거품을 물고 아무데서나 이를 갈며 파리하게 넘어지고 물과 불에 함부로 뛰어 들던 불쌍한 아들을 귀신을 내어 쫓아 내시므로 깨끗하게 치료해 주셨다.

안다는 것은 단순히 교리적으로 알거나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넘치도록 풍성하게 알고 깊은 교제를 통해서 인격적으로 아는 것을 말한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표현할 때에 예수 혹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고는 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특이하게 ‘하나님의 아들’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 내용 자체가 대단히 사려 깊고 의도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하여 이것도 알고 저것도 알아야 하지만 특별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리라는 점에 대하여 분명히 알고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아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점을 믿고 알아야 한다. 이것이 신앙의 기초다. 이와 같이 믿는 것과 아는 일에 있어서 하나가 될 뿐만 아니라 성도들 간에도 서로가 이러한 신앙과 지식 위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강조이다.

우리 내외가 사는 아파트에 연신내 성당에 다니는 할머니가 계시다. 몇 차례 주일 아침에 교회 오는 길에 추운 한 겨울에 엘리베이터에서 만나서 성당 앞에까지 내려 드린 적이 있다. 딸네 집에서 외손주들을 보아 주시며 생활하는데 고등학교 교사인 젊은 사위가 간이 나빠서 얼굴이 새카맣게 타 들어 가고 병색이 짙은 모습을 오며 가며 만날 때마다 안타까운 생각이 들고는 했다. 그런데 최근에 소식을 듣기로는 아우가 형에게 간을 이식해 주는 데 성공해서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지난 번 전주에서 목회하는 나의 친구 목사가 간에 이상이 생겨 고생하다가 20대 초반의 아들이 아버지에게 간을 이식해 주어서 성공적으로 부자간에 건강을 회복한 간증을 전한 적이 있다. 하나라는 말이 무엇인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요, 어머니와 딸이 하나요, 형과 동생이 하나요, 언니와 동생이 하나요, 남편과 아내가 하나요 부모와 자녀가 하나요 성도들 간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아는 지식 안에서 하나다. 이처럼 믿음과 지식의 하나 됨이란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3-14)고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안에서 하나 되어 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가기.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몸무게가 아주 작게는 1 킬로그램이 좀 넘는 정도에서 크게는 3킬로그램이 넘는 경우도 있다. 어머니의 태 안에서 그렇게까지 자라나는 것이다. 그 후로 이 세상에 탄생되고 나면 하루가 멀다 하고 무럭무럭 자라난다. 그러나 소나 말이나 돼지와 같은 동물에 비하며 사람의 성장은 참으로 더디다. 키나 몸무게의 성장이 더딜 뿐만 아니라 생각과 지능의 발전에 시간과 세월이 걸린다. 신앙생활이란 것도 그렇다. 그러므로 신앙의 상태에 있어서 온전한 사람을 이룬다는 것은 어느 한 순간에 완성되는 문제가 아니다.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면 다 빠져 내려가지만 하루하루 콩이 콩나물로 자라나듯이 날마다 순간마다 조금 씩 조금 씩 계속하여 자라나고 성장하고 성숙해져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정한 반복이 중요한 것이다. “한 술에 배가 부르랴”하는 속담처럼 성경 한 두 구절 읽었다고 다 깨달아 지는가. 기도 한 두 차례 했다고 하나님의 세계를 다 깨달아 알 수 있는가. 봉사와 헌신 한 두 번 하였다고 그게 뭐 그리 대단한가. 사도 바울은 아주 평범한 원리를 통해서 교훈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라고 하였다. 어린아이의 상태를 벗어나는 것을 말씀한다.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언급한 ‘온전한 사람’이란 일정한 목표에 도달한 성숙하고 완전한 사람을 말씀한다. 감으로 하면 덜 익어서 떫은 감이 아니라 잘 익은 홍시의 상태이다. 밤으로 하면 잘 익어서 아람이 떡 벌어진 밤송이의 그런 밤톨을 말한다. 콩도 설익은 풋 콩의 상태와 잘 익어서 콩 깍지가 딱 벌어진 상태의 콩이 서로 다른 것처럼 말이다. 신앙이란 것도 그렇다. 밤낮 어린아이 같은 젖이나 겨우 먹는 어린 아이 신앙이 있고 견고하고 딱딱한 음식도 소화하는 장성한 어른의 신앙이 있다.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이란 교회 생활을 얼마나 오래도록 했느냐 혹은 무슨 직분을 받았느냐. 교회 안에서 무슨 직임을 맡아 일하고 섬기느냐의 차원이 아니다. 그 사람의 신앙의 면모와 됨됨이가 성숙하고 얼마나 온전하냐의 차원인 것이다. 이는 에베소서 2장 15절에서 언급한 ‘한 새 사람’을 말한다. 여기서 말씀하는 ‘한 새 사람’이란 어느 일정한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깨달아 알고 믿으며 복음과 은혜로 하나 된 성도들의 거룩한 연합’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 ‘한 새 사람’안에서는 인종이나 성별이나 신분의 차이가 전혀 있을 수 없다. 또한 있어서도 안 된다. 이는 유대인이냐 헬라인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남자냐 여자냐의 문제도 아니다. 자유자냐 종이냐의 차원도 아니다. 모든 인류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은 한 형제요 한 자매일 뿐이다. 이는 건강하냐 약하냐의 문제도 아니다. 빈부귀천지위고하남녀노유를 막론하고 그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사람이 되어 성숙한 신앙으로 살아가기를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일 뿐이다. 이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의 성숙이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나야 한다. 여기서 말씀하는 ‘장성하다’는 것은 신체적으로 키가 크고 인격적으로 사람이 성숙한 모습을 말하듯이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성숙한 모습을 일컫는 말이다. 이는 다분히 현세적이지 않고 내세적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완전한 분량에 까지 이를 위인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요한 웨슬리 목사의 표현대로 하면 ‘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이며 평생 성화(聖化)의 단계를 거친 ‘영화’(榮化, glorification)의 차원이니 말이다. 요한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A plain Account of Christian Perfection)이란 책은 그런 면에서 기독교 고전 중의 명저이다. 요한 웨슬리 목사는 그의 책에서 강조하기를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사랑의 실천과 선행을 통해서 완성되어 간다고 했다. 그는 오히려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강조하는 이들의 신앙의 위험을 경고하고 지적하기 까지 하였다. 그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완전하고 순결하고 거룩한 사랑’의 실천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와 같은 성숙하고 완전한 신앙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신앙생활을 병들게 하는  속임수나 간사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경계하여야만 한다. 본문에서 말하는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은 주사위 놀이나 도박꾼들의 교활한 간계와 같은 것을 신앙생활에서도 주위 하라는 강조이다. 뿐만 아니라 온갖 잘못된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교회로 하면 그래서 속회가 중요하고 속장이 중요하다. 교회학교로 하면 교사가 중요하고 앞장서서 섬기는 이들의 올바르고 건전하고 건강한 신앙 모범이 중요하다.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까지 자라나기.
하나님의 아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자라나려면 어느 한 가지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범사에 골고루 예수 그리스도께 까지 자라나야 한다. 15절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라고 했는데 그 원 뜻은 “우리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면서”(Instead, speaking the truth in love)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언급한 사랑과 진리는 하나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인 것처럼 하나다. 성도가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여야 하듯이 사랑과 진리도 하나다. 아니 사랑과 진리가 하나여야만 한다. 사랑이 없는 진리란 공허한 것이며 진리가 수반 되지 않는 사랑은 있을 수 없다. 사랑은 진리 안에서 돋보이는 사랑이 된다. 진리는 사랑 안에서 빛을 발한다. 우리가 공부한 신학교의 교훈은 ‘사랑, 진리, 봉사’였다. 지금도 그렇다. ‘사랑과 진리와 봉사’ 이 세 가지가 하나로 어우러져야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가정도 마찬가지요 교회도 나라도 민족도 인류도 다 마찬가지다. 사랑과 진리의 관계는 상식적인 것이다. 사랑과 진리는 동반자적인 것이다. 언제나 하나로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과 진리는 신앙의 기본요소이다. 진리를 떠난 사랑은 병들고 만다. 사랑이 빠진 진리는 울리는 꽹과리와 같은 것이요 ‘비가 없는 구름과 바람’ 같은 것이다.(잠25:14)

우리의 신앙 성장 목표는 어느 아는 신앙의 선배나 그 누구에게로 향하는 차원이 아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 그대로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에게까지 자라나야 한다. 우리의 신앙 성장과 성숙이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는 것
·서로 서로 연결되고 결합되는 것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는 것
·그리함으로 온 몸이 건강하게 자라게 하는 것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워져 가는 것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몸이 보이는 몸과 보이지 않는 오장육부와 200여개의 뼈마디와 신경조직과 혈관과 살과 세포의 연합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지탱하는 것처럼 범사에 연결되고 결합되고 서로의 지체가 작용해서 온 몸이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과 똑 같은 원리다. 

개인의 신앙도 그러하고 교회의 일원인 공동체로서의 믿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된 성도의 거룩한 연합을 통하여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갖 좋은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공급 받아 우리의 삶과 사역에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서로 받고 연결되어 가고 결합되어 가는 건강하고 미래 지향적이고 천국 지향적인 성숙한 공동체, 그런 교회의 앞날을 꿈  꾸는 우리 모두가 되자.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나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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