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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사43:14-21)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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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3-03-24 21:44 조회 20,480 댓글 0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그리고 마태복음부터 사도들의 서선서까지를 통틀어서 초대교회의 역사를 기록한 사도행전까지의 성경 기록을 총괄해 보면 하나님께서 그 때 그 때마다 행하신 크고 작은 기사와 이적들이 적지 않다. 그 중의 으뜸은 모세 시대에 43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 왕의 학정에서 구출하여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신 출애굽 사건이다. 하나님은 홍해를 육지처럼 가르셨고, 그 갈라선 물 한 가운데로 200여 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도록 하셨다. 그 40년 후에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를 앞 장 세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홍해처럼 갈라 주신 하나님의 기적을 다시 또 체험하였다. 40년 만에 행하신 하나님의 새로운 일이었다. 물론 그 40년 동안에도 목말라 하는 백성들에게 반석을 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하신 기적이나 아침마다 만나를 풍성하게 내려 주셔서 그 많은 광야 백성들이 먹고 살게 하신 일들이 날마다 새롭게 행하신 하나님의 이적이었다. 애굽에서 살 때에 먹던 고기 타령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메추라기를 보내셔서 배 불리 먹게 하신 일도 광야 생활 중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새로운 일이요 기적들 중의 하나였다.

그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다시 또 말씀하셨다.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여호와가 말하노라.”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의 구속자요 특별히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해방시키신 하나님
이스라엘은 주전 930년에 솔로몬 이후로 남 왕국 유다와 북 왕국 이스라엘로 나뉘었다. 세월은 지났고 이스라엘과 유다의 남북 왕조 모두 다 바벨론과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망하고 말았다. 북 왕국 이스라엘이 무너진 것은 주전 722년의 일이었다. 북 왕조 이스라엘은 주전 930년에 여로보암이 첫 왕이 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사마리아 성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한 역사로 변해 가던 중에 망하고 말았다. 호세아가 북 왕국 이스라엘의 19번째 왕인데 앗수르가 쳐들어가자 함락되고 말았다. 남 왕국 유다는 그 후 주전 586년까지 명맥을 유지하다가 마지막 임금인 제 20대 시드기야 왕 때에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망하고 말았다. 그 때 포로로 끌려간 예루살렘과 유다 고을의 그 많은 젊은이들 중의 몇 사람이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같은 인물들이다. 우리가 자주 묵상하지만 남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의 때에 남 유다는 비참하게 무너졌다. 왕이 보는 앞에서 두 왕자들을 죽이고 왕의 두 눈을 빼 버리고 쇠줄로 묶어 바벨론으로 끌고 가 버렸다. 시드기야 왕은 다윗 왕의 22대 손이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남 유다의 초대 왕이 되고 20대까지 명맥을 유지하다가 결국은 망하고 만 것이다.(B. C 930-586) 이처럼 모든 역사는 시작이 있는가 하면 끝이 있다.

우리가 이걸 알아야 한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나라이든 그 어느 민족이든 하나님이 버리시면 망하고 만다.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망한 후에 세월이 지났다. 70년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이 지나가고 바벨론이란 나라가 주전 539년에 바사 즉 페르시아라는 신흥 왕국에 의해서 멸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페르시아의 건국자이고 초대 임금인 고레스(Cyrus II, B. C. 590-529)가 나서서 바벨론 땅에 살아가던 유대인들은 모두 다 선조들의 땅인 고국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가서 무너진 성곽을 다시 쌓고 믿고 섬기던 여호와의 성전을 다시 쌓고 살아가라는 귀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고레스는 하나님을 모르는 왕이었다. 그런데 고레스가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와 같은 일들은 고레스 왕이 한 일이라기보다는 그 배후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그런 감동을 주신 것이다. 에스라 1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것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예언하신 예언의 성취였다. 어느 날 바사 나라를 건국한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렸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하신 결과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무너진 솔로몬의 성전을 재건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남아 있는 백성들은 은과 금가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되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에스라1:4)고 공포하였다.

역사는 이렇게 변해가는 것이다. 70년 포로기의 때가 차니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나라인 바사의 임금 고레스를 감동하셔서 그런 역사를 이루신 것이다. 본문 14절 말씀을 자세히 보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사람을 보내어”라고 하셨다. 역사는 이렇게 해서 변화되고 변혁되고 발전되고 새로워지는 것이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나라이든 그 어떤 민족이든 하나님이 개입하셔야만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역사는 인간이 발버둥질 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준비하고, 수고하고, 애쓰고,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인류 역사의 범사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경륜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를 보라. 어떻게 고려시대에 몽골의 침략(A.D 1231-1259)으로부터 이 민족이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 고려 고종 18년부터 46년까지 무려 28년간이나 몽골사람들이 고려를 잡아 삼키려고 하였다. 몽골은 징키스칸이 제국을 통일하면서 30여년 동안 무려 여섯 차례나 고려를 침략해 들어 왔다. 당시에 왕궁을 강화도로 피신한 이유도 말 타고 달리는 몽골의 군대가 육지에서는 힘을 쓰지만 바다를 건너는 전쟁에서는 약한 것을 알고 고려의 고종이 강화도 섬으로 왕궁을 옮긴 것이다. 당시에 몽골의 군대는 경상도, 전라도까지 다 쳐들어갔었다. 그 긴긴 전쟁의 때에 고려 시대 백성들은 팔만대장경을 각인하여 가며 불교의 힘으로 고려를 지켜보려고 안간힘을 썼었다.  오늘 날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은 고려 고종 때에 12년이 넘는 긴긴 세월 동안 가로 70cm에 세로 24cm의 두께가 2. 6cm내지 4cm인 목판을 마련해서 81,350장의 경판, 1천538종의 불교경전, 5천200여 만자의 글자 수로 이뤄져 있으며, 제작하는데 동원된 인원만도 연간 130만 명에 달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오늘 날은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당시에는 하나님을 모르던 때이니 오직 부처의 도움을 청하고 불심으로 나라를 지켜보려고 발버둥 치던 역사였다.

어떻게 조선 시대에 일본의 수 없는 침략으로부터 이 땅이 보존 될 수 있었는가. 하나님을 모르던 시대에 조선에는 일본군대가 항상 두려워하는 이순신이란 명장이 버티고 있었다. 구한말과 개화기에 일제가 36년간이나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지배하던 참담한 역사가 어떻게 끝이 나고 해방이 되었는가. 6. 25 전쟁은 어떻게 멈추었고 휴전이 된 땅의 두 동강난 남한 땅이 오늘날처럼 발전하는 나라가 된 배후에는 누구의 손길과 섭리와 축복이 있었는가. 생각하여 보라. 이승만 대통령이나 맥아더 장군이 한 것이 아니라 그 역사의 뒤편에 하나님이 살아서 간섭하시고 주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이사야 44장 28절에서 말씀하신다. 고레스 왕을 하나님이 목자로 삼으셔서 ‘그는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고 선언하셨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중건되리라’고 예언하셨다. 또한 오래 전에 무너지고 불타 버린 솔로몬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고 계획을 미리 말씀해 주셨다. 무슨 말씀인가. 인간의 만사가 다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과 계획  안에 있는 것이다.

요즘 같은 현대 공법의 건축 현장에도 여전히 벽돌을 쌓고 공사를 마감해 가는 과저에 보면 벽돌공들이 공사 현장에 ‘다림줄’을 사용하여 수직과 수평을 잡는 것을 본다. 다림줄이란 수직을 잡게 하는 건축술의 한 과정이다. ‘다림’이란 국어사전에 보면 “수평이나 수직을 헤아려 보는 일”을 말한다. 스가랴 4장 10절에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이것이 무슨 말씀일까. 스가랴 4장 1절부터 보면 어느 날 천사가 잠을 자고 있던 스가랴 선지자에게 나타나서 그를 깨웠다. 천사가 스가랴에게 물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그 때 스가랴는 분명한 환상을 보았다. 순금 등잔대와 그 위에 있는 기름 그릇과 그 기름 그릇 위에 일곱 등잔과 그 위에 등잔을 위한 일곱 관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등잔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기름 그릇 오른 쪽에 있고 다른 하나는 그 왼쪽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때에 스가랴가 천사에게 물었다.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그 때에 천사는 스룹바벨에게 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4:6)

그리고 이어서 해 주신 말씀이 이것이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슥4:7)

“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주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슥4:9)

솔로몬의 성전에 비해서 스룹바벨 시대에 포로의 땅에서 되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장을 서서 지어가기 시작한 소위 스룹바벨 성전의 규모는 훨씬 작고 작아 보였다. 그래서 실망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것이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눈에 작아 보인다고 작은 하나님이 아니시고 우리 눈에 커 보인다고 그 만한 크기로 제한 받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이와 동시대에 하나님이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해 주신 말씀이 학개 2장 9절의 말씀이다.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우리는 모두가 이런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하신 모세 때의 하나님은 여호수아 시대에 요단강을 다시 또 육지처럼 건너게 해 주셨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 바베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70년의 세월 동안 고난을 겪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사 즉 페르시아의 건국자인 고레스 왕을 통하여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스룹바벨을 앞장 세우셔서 솔로몬의 무너진 성전 터에 다시 성전을 재건하도록 시작하신 것이다. 그 현장으로 보고 작게 여긴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고.


역사의 교훈을 통하여 교훈하시는 하나님
15절에 보면 하나님은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이시며 만물의 창조자요 왕 중의 왕이시다. 그러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믿고 따르고 섬기는 하나님은 어제도 계셨고 오늘도 계시고 장래에도 영원히 역사 속에서 살아서 역사하시는 역사의 주관자요 섭리자이시다. 그 하나님은 모세의 때와 여호수아의 때에 바다 가운데에 길을 내시고,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셨던 하나님이시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16절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윌 내 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21절에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바다 위로 지팡이를 잡은 손을 내어 밀 때에 여호와께서 큰 동풍을 밤새도록 불게 해 주셔서 홍해의 물이 물러가게 하셨다.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되었다. 그 하나님이 지금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고 계시다. 지난 날 모세의 때에 바로왕의 군대가 홍해를 건너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뒤 쫒아 올 때에 하나님은 애굽의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들을 그 홍해 한 가운데서 일시에 엎드러져서 물속에 수장되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장사지내셨다. 소멸시켜 버리셨다. 17절은 그 당시의 역사를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같게 하였느니라”고 언급하셨다. 하나님은 필요하시면 없는 것에서 있게도 하시며 작은 것을 많게도 하시되 또 필요하시면 많은 것이 적어지게도 하시며 있던 것도 없애 버리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요즘 우리나라 극장가에 ‘링컨’이란 영화가 개봉되었다. 링컨이 누구인가.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이었던 아브라함 링컨을 말한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감독한 역사물이다. 우리는 링컨 대통령에 대한 일화를 나름대로 적지 않게 알고 있다. 1863년 1월 1일 미국의 A.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 대통령은 연방정부에 대항하던 남부연합정부의 노예의 해방을 선포하였다. 그 내용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반란상태에 있는 모든 노예를 해방한다.
둘째, 해방된 흑인은 폭력을 삼가고 적절한 품삯으로 충실히 일하여야 한다.
셋째, 흑인에게 연방 군대에 들어갈 기회를 제공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 선포문은 1865년 12월에 실질적인 노예해방선언문으로 수정헌법 13조가 비준됨으로써 공식 승인되었다. 링컨은 노예 행방 문제를 해결한 후 총탄에 맞아 56살 나이에 죽었다. 그러나 그는 역사에 영원히 살아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링컨의 믿음은 켄터키에서 그를 낳은 그의 아버지 토마스 링컨과 그를 어려서부터 신앙으로 양육해준 새어머니 사라 부시 존스턴 링컨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다.

노예의 해방! 그 거대한 역사가 수많은 정적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60만 명 이상이 노예 해방을 위한 남북 전쟁으로 죽어 가면서 성취되기까지에는 그 배후에 하나님의 새로운 일을 행하시는 크신 손길이 함께 하신 것이다. 당시 미국은 1861년부터 1865년까지 4년 동안 전쟁이 계속되었다. 그 바탕에는 노예 문제가 가장 큰 문제 거리였다. 링컨을 대통령으로 하는 미연방 정부와 그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미국 남부의 11개 주의 반대 세력과의 전쟁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고난과 희생과 아픔과 어려움이 없이 이룩된 역사란 없다. 어느 때에나 격동기는 있었다. 이는 한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요, 몇 명의 식구가 모여 살아가는 가족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더군다나 한 국가나 한 민족이 발전하고 변화되어 가는 그 바탕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간섭하시는 섭리가 선명하게 드러나고는 하였다.

 
새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를 주목하라.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18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이것이 무슨 말씀일까. 16절과 17절에서 언급하신 홍해를 건넌 출애굽 사건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특히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올 즈음의 그들에게 있어서 지난 날 출애굽 사건처럼 큰 사건이란 없다. 그와 같은 놀랍고 감격스럽고 흥분되는 역사적인 기사와 이적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그 하나님은 필요하시면 언제라도 바다 가운데 길을 내실 수 있는 전능자이시다. 또한 언제라도 필요하시다고 판단되시면 큰 물 가운데 지름길을 내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지난날의 옛 일들을 기억하고 생각하는 일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으로 그것들보다 천배 만 배 아니 그보다 더 대단한 기사와 이적들을 새롭게 행하실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동안 행하신 크고 놀라운 일들보다 더욱 새로운 일들을 계속하여 행하실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새로운 일이란 무엇일까. 하나님은 언제라도 또 다시 새 일을 행하실 수 있는 전능자이시다. 그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낼 것이다.
장차 승냥이와 타조와 같은 들짐승들도 나를 존경하게 될 것이다.
내가 광야에 물을 낼 것이다.  사막에 강들을 낼 것이다.
그리하므로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우리가 알고 믿는 대로 하나님께서 이사야 시대 이후로 행하신 가장 크고 놀라운 새 일이란 무엇인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이룩하신 구원의 큰 역사가 아닌가. 왜 우리가 사순절을 맞이하고 종려주일과 부활 주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의 마구간에 오시고 나중에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좆으시며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죽은 자라도 살리시며 배고픈 자들에게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어리를 축복하셔서 이만 여명의 무리들을 먹이시고 오히려 열 두 광주리가 남게 하신 그 모든 새로운 일들을 날마다 새롭게 행하셨다. 그 주님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었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사십일 만에 승천하여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은 때가 되면 이 땅에 재림 주로 다시 오실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을 날마다 순간마다 새롭게 행하시는 분은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왜 슬퍼하고 있는가
왜 우울해 하고 있는가
왜 답답해하고 있는가
무얼 걱정하고 있는가
무엇 때문에 불안해하고 있는가.

다 같이 ‘왜 슬퍼하느냐’라는 복음성가를 부르자.

왜 슬퍼하느냐 왜 걱정하느냐
무얼 두려워하느냐
아무염려 말아라
큰 어려움에도 큰 아픔 있어도
이젠 아무 걱정 하지 마
내가 널 붙들어 주리
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하리라
내가 너를 지키리라

실망치 말고 나를 보아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탄식과 원망과 불평과 시비와 절망의 말을 떨쳐 내고 새 일을 행하시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찬송하고 송축하고 경배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물을 마시게 하시고, 사막에서 강물을 마시게 하시되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하시는 축복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행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세계는 요한 계시록 21장 6절의 말씀처럼 다시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축복의 새날인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신 동안에도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7:37-38)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영원토록 이와 같은 생명수 강가의 은총이 풍성한 믿음의 승리자들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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