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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시민권(빌3:17-4:1)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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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3-03-24 21:41 조회 23,109 댓글 0
 
2011년 말 통계로 하면 세계의 국가들 중에서 U. N에 가입된 국가의 숫자가 193개국이다. 50개국의 서명으로 시작된 U. N이 창설되던 1945년 10월 24일에 가입된 미국과 같은 국가도 있지만 우리나라는 1991년 9월 17일에 남한과 북한의 양 국가 체제를 그대로 인정하고 유엔이 동시에 가입 국가로 받아 들였다. U. N의 상임 이사국은 미국, 영국, 러시아, 중국, 프랑스의 다섯 나라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2년 마다 바뀌는 여섯 나라의 비상임이사국 중의 한 나라이다. 세계은행이 발표한 지구상의 국가 수는 229개국이다. 가장 작은 나라는 ‘몰로시아공화국’(Republic of Molossia)이라는 나라이다. 믿어지지 않지만 미국 네바다 주 사막 한 가운데 있는 엄연한 독립국가이다. 1999년 9월 3일 케빈 보(Kevin Baugh)는 몰로시아 공화국을 세웠으며 자신이 몰로시아의 대통령임을 선언하였다. 인구는 자기 가족이 전부인 4명뿐이다. 육해공군 중에서 공군은 없고 육군과 해군이 조직되어 있고 무기도 조금 있다. 육군과 해군은 대통령과 아들이다. 모스키토라는 루이 13식의 소총이 두 자루 있다. 해군력은 2척의 고무보트가 전부이다. 자체적인 화폐, 여권, 우표도 있다. 대외원조 차원에서 미국연방정부에 세금을 내고 있다. 매년 10명의 관광객을 받아들이는데 이메일로 허가를 받아야 하고 입국이 허락되면 대통령이 직접 45분 동안 나라를 소개하는 것이 관광의 전부이다. 관광객은 여권을 받아서 입국할 수 있고 절대로 총기나 담배를 소지할 수 없다. 나라 면적이 5. 8 평방킬로미터이다. 반면에 지구에서 가장 면적이 큰 나라는 러시아이고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중국이다. 세계에는 가난과 굶주림과 질병과 전쟁과 일자리를 구할 수조차 없는 생활고와 인권을 탄압 받는 악정과 가난의 악순환 속에서 살아가는 나라와 국민들도 엄청나게 많다. 북한 주민들은 그 중에 으뜸가는 고생을 하는 이들 중의 하나이다.

세계에서 가장 경제력이 강한 나라는 역시 미국이다. OECD 통계에 의하면 가장 복지가 잘되어 있는 나라들은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 순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이 실감나는 나라들이 덴마크나 스웨덴 같은 나라들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이 땅에서의 복지와 혜택을 최대한 누릴 수 있는 나라들이다.

가령 스웨덴은 최고의 교육복지를 이룬 나라이다. 모든 공교육비가 무료이고 대학의 학비도 없다. 여건에 따라서 학생의 생활비도 지원한다. 부모가 가난하기 때문에 배움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교육 평준화를 이룬 국가이다. 자신이 노력만 하면 무슨 공부를 하든이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고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는 여건을 국가가 골고루 누구에게나 제공하는 것이다. 지난 2007년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선정한 결과에 따르면 스웨덴의 수도인 스톡홀름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이다. 사실 스톡홀름은 14개의 섬을 이러 저리 수많은 다리들로 연결한 도시이다. 초창기에는 하수 처리가 잘 안 되어 바닷물이 지저분하기로 유명하였다. 그러나 오늘 날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살기 좋은 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어느 한 나라의 국민으로 태어나거나 받아들여지고 나면 그 나라의 국민인 것을 증명하는 시민권을 부여 한다. 뿐만 아니라 국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온갖 혜택과 특권이 골고루 보장된다. 우리나라로 하면 ‘주민등록증’을 발급해 주는 것처럼 말이다. 탈북해서 남한에 입국하여 정착하려하는 새터민들의 경우에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받아들이는 ‘주민등록’을 허락할 뿐만 아니라 일정한 정착 자금도 지원하고 매달마다 일정한 생활 지원도 한다. 그 외에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자격과 혜택과 신분 보장이 가능해진다. 우리나라도 경제적으로 살만하고 국제적인 위상이 높아지다 보니 우리나라에 와서 “대한민국국민”의 자격을 얻고 싶어 하는 이웃나라 사람들도 적지 않다. 미국의 경우를 예로 들면 오늘 날도 여전히 미국에 밀입국하거나 불법체류의 어려운 날들을 지내면서라도 영주권을 받거나 세월이 지나서 미국 시민권을 받기 위해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꿈을 버리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완벽한 복지와 혜택을 갖춘 나라라고 하여도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따라 갈 수는 없다. 이 세상에는 몸과 마음이 아픈 질병이 있고, 슬픔을 겪는 눈물이 있다. 애통하고 곡하는 죽음도 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는 이 땅에서 겪는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의 그 어떤 것도 다시 있지 않은 세계이다. 기쁨과 즐거움과 사랑이 있지만 이 세상 차원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완전한 기쁨과 즐거움과 사랑을 누리는 것이다. 사도 바울 자신은 그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늘 증거하며 살아갔다.

사도 바울은 당시에 로마의 시민권자였다. 그러나 그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인 것을 훨씬 더 자랑스러워했다. 사도행전 22장에 보면 복음을 전파하던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을 때에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무리를 충동질하여 그를 붙잡았다. 많은 무리들이 동시에 달려들어서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하였다. 결국 사도 바울은 성전 밖으로 끌려 나갔고 성전 문이 닫혔다. 온 예루살렘이 술렁거릴 때에 이 사실이 로마의 군대에 보고되었고 천부장이 군대를 동원하였다. 여전히 달려드는 무리들로 인해서 군인들이 사도 바울을 높이 치켜들고 폭도들을 피하여 군대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수많은 무리들은 그 뒤를 따르며 사도 바울을 없애 버리라고 아우성을 쳤다. 영내로 끌려 들어가던 사도 바울은 유창한 헬라 말과 히브리말로 자신의 입장을 변명하였다. 천부장의 허락을 받은 사도 바울은 층대 위에 올라서서 침착한 어조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하나님과 예수께서 어떻게 자신을 오늘 날까지 사용하여 오셨는지를 차근차근 피력하였다. 그러나 결국 유대인의 무리들은 알아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며 티끌을 공중에 날리며 난폭하게 행동하였다. 결국 천부장은 “채찍질하며 심문하라”고 명령 하였다. 명령을 들은 부하들이 사도 바울을 가죽 줄로 결박하려고 하자 바울이 말했다.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않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깜짝 놀란 백부장이 이 사실을 천부장에게 보고하였다. 그랬더니 천부장이 “나는 돈을 많이 들여서 이 시민권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나는 나면서부터 시민권자이다.” 이 순간 이후로 로마의 천부장은 사도 바울을 영내에 결박한 것 자체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말했다. “나는 나면서부터라.”(행22:28)

본문 가운데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3:20)고 말했다. 우리의 시민권이란 말씀이 무엇인가. 성도된 우리, 하나님의 아들딸인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말씀이다. 한 국가의 시민이 된다는 말은 의무도 따르지만 다양한 특권과 혜택이 주어지는 것이다. 국민이란 '의무와 특권'(Duty and Privilege)이 동시에 부여되는 것이다. 한 국가의 국민이 되려면 “교육, 근로, 납세, 국방의 의무”를 골고루 다 잘 담당하여야만 한다. 오늘 날 하늘의 시민권자요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일원인 성도들도 성도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성경을 읽고 배우고 따르고 실천하며 서로를 향하여 중보하며 간구하는 기도 생활과 더불어 땀과 눈물과 피를 흘려 가면서 순교자의 반열에 서서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봉사하고 돈과 재물 등 가진 것과 버는 것과 벌게 해 주시는 소득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선한 천국 사업에 헌신하고 충성하며 섬기고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의 무리들을 대적하여 영적 싸움에서 이기는 하늘나라 군대답게 성령의 충만함과 천군천사의 도우심 가운데서 복음을 모르는 이웃들에게 끊임없이 복음을 전파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며 주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그와 같은 하늘나라 시민권자다운 의무를 기쁜 마음으로 다 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특권과 혜택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하늘의 시민권자답게 살아가노라면 온갖 하늘의 풍성하신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은혜와 감사와 즐거움과 온유함과 겸손함의 은총과 축복이 폭포수와 같이 나의 삶에 공급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씀하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이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천국 백성이 되는 특권 말이다.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신분, 어떤 신체조건, 어떤 생활환경, 어떤 가정 여건, 어떤 가족 관계, 어떤 경제 여건, 어떤 국가의 어떤 국민의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든지 상관없이 하늘나라의 시민권자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성도된 우리들이 하늘나라의 시민권자가 된 자들로서 어떤 모습과 태도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는가.
나를 본받으라.
사도 바울은 엄격한 사도의 권위를 갖고 17절에서 명한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 어떻게 사도 바울이 감히 이와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사도 바울의 신앙관, 인생관, 가치관, 복음관, 선교관, 종말관이 과연 어떠하였기에 감히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와 같이 권면할 수 있었을까. 그 구체적인 내용은 빌립보서의 그리 길지 않은 편지 가운데 생생하게 담겨 있다. 사도 바울은 사도이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한 신앙인으로서 은혜와 평강의 사람이었다. 감사와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가시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가진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사도요 선교사요 목자로서 성도들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랑의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빌1:8)을 가진 열정의 사람이요 복음의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는 성도 각 사람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중보기도의 사람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고난 속에서 삶으로 점점 더 잘 알아가던 지식의 사람이었다.

메조 소프라노인 성악가 김청자 교수는 한국종합예술학교 교수직을 끝으로 40년 음악 인생을 국내에서 접고 요즘은 아프리카 말라위에서 고아들을 섬기며 신앙을 바탕으로 음악 지도와 인생 지도를 하며 노년기를 보내고 있다. 말라위에는 에이즈에 감염된 고아들만도 100만 명이 넘는다. 이 숫자는 전체 인구의 10%에 해당한다. 그 중에서 그가 돌보고 싶어 하는 에이즈에 감염된 고아 어린이들만도 9,000여명이다. 봉사와 섬김이 끝이 없는 현장에서 하루를 보내고 또 새로운 하루를 맞는다.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난 그에게 음악과 주님을 알게 해 준 것도 역시 선교사들의 도움이었기에 그리스도의 사랑에 빚진 자의 마음이 그의 노년기에 소명의 불로 불 붙여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철저한 복음의 사람이었다. 지금 바울은 감옥에서 이 편지 빌립보서를 쓰고 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와 빌립보서와 골로새서와 빌레몬서를 감옥 안에서 썼다. 그래서 ‘옥중 서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지금 사도 바울은 감옥 안에 붙들려 있으나 그는 감옥 안에 있든지 감옥 밖에 있든지 한결 같았다. 사도 바울은 공과 사가 모두 하나님 안에 있던 인물이다. 그는 빌립보서 1장 8절에서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고 하였다. 성도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소원은 너무나 분명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1:11) 심지어는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혀 지내는 것조차도 복음의 진전에 유익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이 전파되는 길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며 복음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살아가던 복음의 사도요 기쁨의 사도였다. 바울은 복음이 복음 되도록 전파되는 길이라면 그 어떤 일이라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복음의 사도였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0하-21)는 그의 고백을 대하다 보면 우리를 숙연하게 하는 사도 바울의 성숙한 신앙의 면모를 대할 수 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살아가는 하루의 삶 그리고 믿음의 진보와 기쁨이 모두 다 주 안에서 누리고 전파되고 이루어져 가는 복음의 수단이요 복음의 확증이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한 것은 결코 사도요 선교사요 목회자로서의 자기 의를 나타내려는 영적 교만이 아닌 것이다. 그는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서도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하였다. 바울이 교회들마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본받으라고 한 것은 자기 자신이 얼마나 엄격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였는가를 입증하는 말씀이다. 예전에는 잘 몰라서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이들을 박해하던 사울이었지만 깨닫고 나니까 달라졌다. 그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 우편의 부활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변한 것이다. 그래서는 바울이 과거에는 자랑거리도 많고 이력서에 쓸 내용도 화려하던 주인공이었지만 그 지난날의 모든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오직 그리스도를 얻고 만나고 체험하고 증거하고 전파하는 일이라면 그 어디라도 마다하지 않는 이방 선교의 선봉에 선 사도가 된 것이다.(빌3:8)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한 후의 사도 바울의 인생관은 완전히 바뀌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0-14)

바울의 신앙관과 인생관은 분명하였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라고 하였다. 예수는 죽으심으로 부활하신 것이다.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신 것이다. 부활과 승천이 영광스럽지만 결코 고난과 죽으심이 없는 부활과 승천이란 없다. 십자가의 고난이 없는 영광의 면류관은 결코 없는 법이다.

그와 같은 사도 바울이기에 그의 곁에는 2장 19절의 ‘디모데’나 25절의 ‘에바브로디도’ 같은 탁월한 믿음의 인물들이 언제나 함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교회, 그런 공동체를 이루어가자. 구경꾼 인생이 아니라 주인공 인생으로 살아가자. 기도생활과 예배생활과 말씀생활과 복음전파와 교회건축 마무리 해에 건축에 함께 동참하는 성전 건축자의 헌신생활과 거룩한 부담감과 연합된 공동체 의식을 갖는 모두가 되자. 참으로 서로에게 본을 보이고 본을 받을만한 역사적인 새로운 꿈의 신앙 공동체를 서로가 가꾸어 나가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기다리라.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다가 보면 숙연한 감동이 전해져 온다. 사도 바울이 알기에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 가운데 이름만 교인이지 엉터리 신자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 번 권면할 기회를 가졌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노라고 했다. 감옥에 갇혀 지내는 사도 바울의 안타까운 마음이 전달되는 장면이다.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3:18하-19)고 안타깝게 편지하였다. 성도인 것 같은데 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가. 누가 그 마침이 멸망인 줄 알면서도 배를 신처럼 섬기면서 살아가는가. 누가 부끄러움도 모르고 땅의 일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가. 누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면서 살아가는가 하고 말이다. 당시나 오늘 날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빌립보라는 도시에는 막 사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2절에서 “개들을 삼가고”라고 하였다. 여기서 개들이란 양심에 화인을 맞아서 회개도 없고 부끄러움도 모르며 거짓과 위선과 탐심과 타락한 양심과 더러움을 더러움으로 모르고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린 채로 세상을 되는 대로 막 살아가는 이들을 말한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당시에 유대인들 중에서 율법을 준수한다고 가장하면서 죄와 악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범하는 타락하고 불행한 무리들을 통틀어서 언급한 말씀이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겉으로는 율법에 철저한 척하면서 악을 행하고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지내며 거짓 교훈을 전파하며 말썽만 일으키며 몸의 할례 정도로 만족하는 자들을 지적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 15절에서도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한다고 했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 같으나 사실은 자기들끼리 당을 짓고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비방하면서 대적하거나 공연히 사도 바울을 미워하고 시기하던 무리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분명히 강조하였다. “시민권을 하늘에 두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기다리라” 그렇다. 이 세상에 아무리 좋아도 영원한 나라는 아니다. 우리 성도들의 마음의 처소는 하늘에 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의 소속은 천국이라는 강조이다. 빌립보서 3장 20절의 ‘기다림’이란 사도 바울의 분명한 신앙이었다. 이는 성도된 우리들도 분명하게 본받아야만 할 신앙인 것이다. 당신의 기다림은 어디에 있는가. 사람들은 누구나 다 나름대로의 기다림을 갖고 살아간다.

이제 어린아들딸을 초등학교에 입학시켜야 하는 부모들에게서는 어린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날을 기다린다. “선생님은 누구일까. 남자 선생님일까 여자 선생님일까. 결혼한 선생님일까 아직 미혼일까. 성격이 좋은 분일까 성격이 불같은 분일까. 우리 아이를 사랑해 줄만한 분일까. 우리 아이에게 무관심할 분일까. 우리 아이가 학교에 가면 잘 적응할까 못할까.” 별의 별 생각을 다 하면서 어린 자녀가 학교에 입학할 날을 기다리면서 보낸다.

이와 같은 기다림은 우리 각 사람들에게 있어서 형편과 살아가는 여건에 따라서 서로 다 다르다. 사도 바울은 육체를 신처럼 섬기며 악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은 세상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기다리라고 하였다. 두 달이 넘도록 병원 생활을 하는 집사님을 새벽 기도 후에 일산 백병원에 찾아 갔다. 병원에서 새해를 맞고 병원에서 구정을 맞았으니 얼마나 집이 그립고 얼마나 건강해져서 퇴원한 날을 기다리겠는가.

기다림이란 그런 것이다. 구원을 기다린다는 말은 우리의 일상생활로 하면 군인이 건강하게 제대할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타국에 가서 지내는 가족이 조국에 있는 가족을 만날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감옥에 갇혀 지내는 이가 형을 모범적으로 잘 마치고 다시 가족들 곁으로 돌아 올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나로호를 세 번째에 쏘아 올린 우주선 발사 연구원들은 러시아의 도움 없이 자체 실력으로 우주선을 쏘아 올릴만한 우주공학을 발전시켜 척척 성공시킬만한 저력을 갖출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아기를 복중에 임신한 이들은 건강한 아기를 순산할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 교회로 하면 삼 개월 정도 후에 건축을 마치고 준공검사를 받고 새 예배당에 입당할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실생활에서 갖가지 다양한 구원을 향한 기다림을 갖고 살아간다.

그러나 성도된 우리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하고 온전한 구원을 사모하고 기다리며 살아갈 줄 알아야만 할 것이다. 성도된 우리는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던 성전의 안나 선지자나 시므온 선지자나 동방 박사들이나 목자들의 기다림처럼 오늘 날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실 재림의 날을 기다라는 기다림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5절에서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라고 하였다.

육체의 온갖 탐욕과 탐심 가운데 살아가는 이들이 넘쳐나는 세상 중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는 성숙한 믿음의 주인공답게 살아가자.


주 안에 서라.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4장 1절에서 말씀하는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는 말씀은 군사용어이다. 여기서 ‘이와 같이’라는 말씀은 이미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연합하고 단합해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고 굳게 서서 신앙 승리의 삶을 살아오고 있는 것을 칭찬하는 말씀이다. ‘서라'는 헬라어로 ‘스테코’(sthvkw)라는 말인데 이는 전쟁에 임하는 군인의 임전태세(臨戰態勢)를 말하는 것이다. 즉 사도 바울은 그 동안도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거짓 교사들로 인한 영적인 유혹이나 배를 신처럼 섬기는 이들이 행악하며 살고 육체의 할례만을 자랑하며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본받으며 살아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이와 같이 편지한 것이다.

본문을 읽다가 보면 사도 바울의 눈물과 따뜻하고 훈훈한 마음을 느낄 수가 있다. 17절에 “형제들아”라고 하였다. 4장 1절에서는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이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주 안에서 형제된 성도들은 그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본을 보여 주시기 원하셨던 사랑이 이런 사랑이 아닌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누구인가를 비유로 말씀하신 교훈 뒤에 교훈하시는 바가 그러하지 않는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10:37) 제사장이나 레위인인 것을 자랑하지 말고 강도 만나 죽어 가던 사람을 진실한 마음과 정성으로 돌보았던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살아가라는 말씀이 아닌가. 그것이 주 안에 서는 신자의 모습이며 하늘나라 시민의 모습이 아닌가.

기이드포스트 2013년 3월호를 받아 보았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간증기사가 실려 있었다. “Small Town, Big Hearts"라는 제목의 간증문이었다. ‘불어라, 사랑의 바람’이라고 한글 제목을 붙였다. 간증문을 쓴 주인공인 도나 마틴(Donna Martin)은 미국 택사스 주와 루이지에나 주의 접경 지역에 위치한 포섬 트롯(possum trot)이란 작은 마을의 베네트 채플을 중심으로 600여명의 살아가는 두메산골 시골 마을에서 목회하는 흑인 목사의 부인이다. 미국이지만 그 곳에는 도로도 포장되어 있지 않다. 신호등도 물론 없다. 바닥재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일하는 이들이 주로 모여 사는 농촌 마을이다. 크지는 않지만 잘 정돈된 주택지에 이동 주택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으리으리한 집은 한 채도 없다. 좋은 차도 전혀 구경조차 할 수 없다. 그런 마을에 사랑의 기적이 일어났다. 부모 없이 입양 기관이나 위탁 시설에서 자라나는 어린이를 76명이나 입양하여 키우고 있다. 목사의 가정도 마찬가지고 온 마을 사람들과 교인들이 너도 나도 앞장서서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다가 키우기 시작했다. 말이 그렇지 사연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시작은 이렇다. 17남매들 가운데 자라난 사모는 친정어머님이 돌아가신 슬픔을 잘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걸핏하면 슬퍼하고 울며 지냈다. 그녀의 친정어머니는 훌륭한 분이었다. 그래서 큰 산처럼 모든 자녀들에게 의지가 되는 분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성년이 되고 가정도 이루고 더군다나 목사인 남편 곁에서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는 목사의 아내인 자신인데도 친정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쉽게 극복하지 못하고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설거지를 하다 말고 어머니 생각이 나서 부엌의 뒷문을 열고 큰 참나무 아래 흔들의자에 앉아서 행주를 곁에 떨어 트려 두고 울고 있었다. 그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다. 너는 엄마로 인해 큰 사랑을 오래도록 누리며 살아 왔지만 이 땅에 엄마의 사랑을 전혀 누리지 못하며 자라나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니. 네가 그 동안 어머니께 받은 그 사랑을 누군가 어린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면 좋겠구나.” 깜짝 놀란 그녀는 마치도 하나님이 곁에 계신 것처럼 물었다. “하나님 어떻게요.” 사실 그 농촌 마을의 아이들은 집집마다 다들 행복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 때 하나님의 음성이 계속하여 들려 왔다. “위탁 양육 기관을 통해서 엄마 아빠 없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키우렴” 그 때까지  그녀는 목사의 아내요 교회 사역의 중심에서 살면서도 ‘위탁양육’이나 ‘입양’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한 적이 없이 살아 왔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음성이 구체적으로 그에게 들린 것이다. 그는 전화번호부를 찾아서 수양부모교실에 등록을 하였다. 그 곳은 그가 사는 시골 마을에서 무려 965km나 떨어진 곳이었다. 목사인 남편과 결혼 하지 않고 함께 살던 시뉘이도 정신이 나갔느냐며 항변하였다. 그러나 일은 시작되었고 설득 끝에 목사 내외와 시누이까지 세 사람이 두 달 동안 일주일에 두 번씩을 그 먼 거리를 운전하고 다니며 ‘위탁 부모 과정’을 이수하였다. 그리고 시작한 입양이 교회의 성도들과 마을 안에 번져 가면서 지금은 76명의 엄마 아빠 없는 어린이들을 입양하여 키우는 특별한 교회요 마을이 되었다. 늘 훔치고 빼앗고 숨기고 도둑질하는 것이 익숙한 환경에서 지내던 그 어린이들은 정작 가정에 입양된 상태에서도 냉장고나 식탁과 주방의 과자나 빵이나 치즈나 소시지나 음료수나 과일들을 몰래 훔쳐다가 침대 밑에 감추어 두기고 하고 그래서 썩고 곰팡이가 나고 벌레가 나고 악취가 나는 경우도 흔했다. 그런 아이들을 한명 씩 한명씩 맞아들여 목사의 가정에서만도 다섯 명의 아이들을 입양하여 키웠다. 어떤 아이는 그 동안 얼마나 못 먹고 지냈던지 집에 입양한지 여섯 달 만에 먹어 대더니 15cm가 자라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입양아들은 9학년 때에 부모를 속이고 학교를 장기 결석하고 낙제를 하고 몰래 담배를 피워 대면 속을 무척 썩인 아들도 있었다. 그런 입양아들딸들이 커서 지금은 직장생활도 하고 장차 사회복지사가 되어 자기 같은 불쌍한 아이들을 돌보겠다는 꿈을 가지고 대학교도 다니고 고등학교도 다닌다. 그는 간증문의 끝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다 특별하며, 누구나 다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Every child is special, every child deserves to be loved.)

사도 바울은 말한다.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행하며 살아가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기다리는 하늘의 시민권자답게 살아가라.
사랑하고 사모하는 기쁨이요 면류관인 형제들아 주 안에 굳게 서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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