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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눅18:15-30)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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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2-09-02 18:56 조회 21,815 댓글 0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 일관되게 하나님의 나라라고 표현되는 이곳은 마태복음에서는 ‘천국’이라고 했다. 요한복음에서는 ‘거듭남’이나 ‘영생’이나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우린 좋은 곳을 ‘천국’같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를 주제로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의 실재를 가르치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조건과 자격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였다. 요한복음 3장에 예수를 만나러 와서 예수께 관심을 보이고 대화를 시도한 장면이 나온다. 그는 예수가 하나님게로 보냄 받은 선생이라고 했다. 또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분으로 인정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런 표적들이 가능하겠느냐는 관심을 보였다. 그 때에 예수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초청해 주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고 했다. 요한 계시록 22장 15절에는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 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고 경고하였다. 이렇게 막 사는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못 들어간다고 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하나님의 장막에 들어가는 자들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요한 계시록 21장 6절에 보면 두려워하는 자들, 믿지 아니하는 자들, 흉악한 자들, 살인자들, 음행하는 자들, 점술가들, 우상 숭배자들,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 지리라고 했다. 그러면 어떤 인생들이 천국 백성이 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가 된다는 말일까.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누구나 구원받고 영생하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기를 원한다. 본문의 강조가 바로 그것이다. 어린 아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셨다. 또 하나는 큰 부자 관리와의 대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소개해 주셨다. 그러면 과연 누가 영생하는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하는가. 누가 구원 받을 수 있는가. 무엇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조건이요 자격인가. 본문 27절에 보면 사람이 스스로를 구원하거나 영생하게 하거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할 수 있는 능력이란 없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인 것이다.

아기가 갓 태어나면 일정한 기간 동안 그 아기를 양육하는 유모의 지속적인 정성과 보살핌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 모유로 먹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영양을 공급해 주든지 마찬가지이다. 일정한 영양분을 공급해서 생명이 자라나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한 어린 아기의 생명이 탄생해서 일정한 인격을 가지고 스스로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 때까지에는 끊임없이 그 누군가의 도움과 보살핌의 손길이 반드시 필요하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영적으로 이와 같은 어린 아기의 상태를 지속하여야 들어 갈 수 있는 나라라고 교훈해 주셨다. 천국 즉 누가복음에서 계속해서 강조하는 하나님의 나라에는 누가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누가 과연 하나님의 나라 백성인가. 15절에 보면 사람들이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예수께 와서 만져 주시길 원했다. 여기 어린 아기란 브레포스(brevfo")인데 이는 ‘infant’ 즉 유아인 젖먹이 아기를 말한다. 아주 어린 아기이다. 이처럼 당시 유대인들은 아주 어린 유아와 영아를 비롯한 어린 아이들을 랍비에게 데리고 와서 안수기도를 받고 축복 기도를 받기를 매우 소원하는 전통이 있었다. 부모들이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예수께 와서 그런 요구를 할 때에 제자들은 꾸짖었으나 예수는 환영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어린 아기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진리를 교훈해 주신 것이다.

자 그러면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곳이며 과연 누가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인가. 16절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셨고 17절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까지 엄하게 말씀하셨다. 더군다나 이는 제자들에게 해 주신 말씀이어서 더욱 심각한 교훈으로 깨달아야만 하는 진리인 것이다. 제자들은 날마다 예수님 곁에서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고 함께 잠도 자고 늘 모든 선교 일정을 더불어 다 함께 소화해 나가던 12명의 사도들이었다. 그런데 저들에게 이런 심각한 교훈을 말씀해 주신 것이다. 이 12제자들은 거의 날마다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예수님을 지켜보았다. 귀신이 떠나가고 각색 병자들이 치유 받는 기적의 현장을 목격하며 지냈다. 거의 날마다 반복되는 비유의 다양한 말씀과 교훈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해 주시는 말씀도 듣고 또 들었다. 그러나 제자들의 행동은 예수님의 교훈과 가르침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예수님은 장차 붙들리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실 것을 교훈하셨지만 야고보와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의 관심은 장차 예수님의 좌우편에 누가 앉게 될 것이냐는 허황한 생각에 붙들려 있었다. 이미 누가복음9장 46절에서 48절까지에서 어린이를 통해 교훈하신 교훈을 다시 또 강조하신 내용을 대하게 된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도 이 세상에서 정당 간에 경합하고 대표자들 간에 국민들의 표 몰이를 해서 일정한 정치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일정한 기간 동안 권력자의 행세를 하는 그런 식의 세계가 아니란 말이다. 어린 아기는 그를 낳아 기르는 엄마를 비롯한 양육자의 절대적인 도움의 손길이 없이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할 수가 없다. 어린 아기는 버려지면 죽고 만다.  아린아기와 양육자의 관계가 그러한 것처럼 하나님과 나, 예수 그리스도와 나의 관계가 이와 같은 긴요한 관계를 지속하지 않으면 주어지지 않는 세계가 하나님의 나라이다. 누가복음 17장 20절 이하의 교훈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성도라면 노아의 때와 같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에 붙들려서 노아가 100년 동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슨 일을 하며 지내는지 무관심하고 오히려 조롱하고 비난하는 그런 식의 태도로는 들어 갈 수 없는 나라인 것을 선포하신 것이다. 또한 롯의 시대에 소돔과 고모라 성의 백성들이 살아가던 모습과 같이 살아서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7장 27절과 29절에 보면 그런 식으로 살아서는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는커녕 멸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노아 때의 홍수 심판과 롯의 시대에 소돔과 고모라 성에 임한 불과 유황이 비가 오듯 했던 심판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이며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하여야 한다는 말씀인가.

어린 아기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만 절대 의지하며 온유하고 순결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받기를 원하고 갈급해 하는 그런 상태를 말한다. 전쟁 중에 부모를 잃으면 그 고아는 죽고 만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갓 태어난 어린 아기 즉 신생아를 방치하고 쓰레기통에 내버리면 죽고 만다. 이처럼 지속적으로 계속하여 보살피고 먹이고 입히고 닦아 주고 안아주고 돌아보아 주는 사랑이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갓난아기의 상태인 것처럼 그런 영혼의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며 예수의 이름을 자기가 누리는 이 세상 축복이나 이 세상 번영의 도구로 삼고 세상으로 치달으면서 ‘주여! 주여!’ 하고 살다가 나중에 주님 앞에 서면 주님께서 모른다고 하실 수도 있다고 했다. 마태복음 7장 21절과 22절에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아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고 물을 날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하신 대답이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3)고 엄하게 경고하셨다. 그렇다.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그 모든 것들을 제 멋대로 제 하고 싶은 대로 제 육체의 욕구대로 다 즐기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방법으로 살다가 나중에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들어가는 나라가 분명히 아니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다.

주일 날 예배드리는 것이 귀한 믿음이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고 나서 한 주간을 매주 살아가면서 하루하루 순간순간 하나님과 나, 예수 그리스도와 나, 성령님과 나와의 관계가 마치도 갓 태어난 젖 먹는 아기인 신생아가 본능적으로 엄마의 젖을 찾고 엄마의 젖을 빨고 엄마의 품에서 안식을 누리고 평화를 누리며 잠을 청하는 것처럼 그런 관계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과의 관계를 지속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모습이란 말씀이다. 하나님을 떠나서 살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 사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와 상관이 없는 하나님 나라 밖의 백성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는 지속적인 지배 상태에 들어가야 한다는 선언이다. 이것이 임마누엘 신앙이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은 알되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인줄 몰라서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신자들을 박해하던 상태에서 다메섹 체험을 경험하게 되었다.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사건이다. 그날 이후로 교회의 핍박자요 성도들에 대하여 폭행자였던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은 사도의 한 사람으로 변모된 생애를 살아갔다. 그는 로마서 6장 18절에서 그런 교훈을 전했다.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이런 상태를 지속하는 것이 천국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스스로 지금 자기 자신에게 물어 보고 스스로 답해 보라. 나는 죄의 종인가 의의 종인가. 지금 나를 다스리고 주장하는 법이 세상의 법인가 하나님 나라의 법인가 하고 자문자답해 보란 말이다. 로마서 6장 19절은 이 같은 내용을 설명해 주고 있다. 19절 중반부에서부터 보면,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 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천국 즉 영생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은 골고다 언덕에 예수님 좌우편의 십자가에 달린 강도 중에 우편 강도와 같은 고백과 선택으로 통해서도 들어 갈 수 있는 나라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고백의 기회와 복음 영접의 기회조차 거부하고 세상의 쾌락을 즐기며 막 살다가 불나방과 같이 심판의 지옥을 떨어지는 인생들이 그 얼마나 많은가. 이 같은 진리를 깨닫고 전파하기 위하여 평생을 이방 선교사의 삶을 살아갔던 순교의 사람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 23절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선언하고 초청해 주었다.

다시 16절 끝 부분에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주목해 보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여기서 ‘이런 자’란 그날 그 곳에 예수 앞에 안겨 나와 만져 주시기를 바라던 그 아기 몇 몇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유아 즉 젖을 먹는 어린 아기를 일반적으로 언급하시면서 ‘온유하고 겸손하고 순결하여’ 절대적으로 엄마의 손길과 공급을 필요로 하듯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만을 지속하는 영혼에게 주어지는 세계가 하나님의 나라인 것을 선포해 주신 말씀이다. 젖 먹는 어린 아기가 엄마를 찾고 의지하듯이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갈 때에 그가 하나님 나라 백성이란 말씀이다.

부자와 하나님의 나라
본문은 크게 ‘어린 아기와 하나님의 나라 교훈’(눅18:15-17) 그리고 또 이어서 ‘부자 관리와 하나님 나라 교훈’(눅18:18-30)으로 이어지는 두 내용을 담고 있다. 돈이 많고 재산이 많은 부자인 상태 그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부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못 들어가거나 가난해야만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국가도 부자 국가가 되어야 고속도로도 건설하고 공항도 건설하고 다리도 놓고 터널도 뚫고 기차 길도 건설하고 수만 명씩 들어가는 체육관도 지을 수 있는 것이다. 나라의 어린이 복지, 노인 복지, 국민 복지도 돈이 없으면 생각만 가지고 할 수 있는 사업이란 하나도 없다. 미국이 과거 1969년에 유인 우주선을 달에 쏘아 올리고 이제는 미국의 항공우주국인 ‘NASA’와 같은 기관을 운영하며 세계적인 우주 공학자들을 통해서 우주 과학 시대에 선봉에 설 수 있는 힘도 결국은 과학의 힘과 함께 돈의 힘이다. 엄청난 예산을 투입해서 화성에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고 인공 로봇이 화성을 탐사하게 하는 그 모든 힘은 과학의 힘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돈의 힘 즉 재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2011년 11월 26일에 발사한 큐리오시티가 2012년 8월 6일에 성공적으로 화성에 로봇을 안착시키고 탐사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1초에 30만 킬로미터를 가는 속도로 19분이 걸리는 거리다. 1960년대 이후 50여년만의 성공이다. 물론 소련인 1971년에 마스 2호를 궤도 진입에 성공시켰고 마스 3호는 화성 표면에 도착하는데 성공하기도 하였다. 나라를 지키는 국방력도 마찬가지이다. 육군의 병력이나 군사 무기의 개발과 확보도 그러하지만 최첨단 전투기나 항공모함이나 잠수함을 개발하고 확보하고 운영하려면 막대한 국방 예산을 지속적으로 투자하지 않고는 한 나라의 국방 계획을 운영하기란 어려운 것이 아닌가. 독도 문제로 불거진 한일 관계의 군사력 비교 발표를 보면 한국의 해군력이나 공군력보다 일본이 더욱 우세하다고 한다. 물론 육해공군 연합으로 하면 실전경험이나 훈련의 강도가 다르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결국은 잠수함이나 구축함이나 전투기를 확보하는 힘은 돈의 힘 즉 그 국가의 경제력인 것이다. 가령 세계 최강의 전투기로 알려진 F-22 전투기는 미국이 지난 냉전 시대에 개발한 최첨단 전투기로 알려져 있다. 그것을 사 들일 수 있는 나라는 서독, 일본, 이스라엘, 한국 등의 국가라고 손꼽힌다. 그러나 워낙 성능이 우수한데다가 팔고 나면 국제적으로 오히려 상대적으로 위협이 되는 그와 같은 전투기의 개발과 국제적인 판매를 미국의 민주당이 앞장서서 반대하는 바람에 1998년부터 2015년까지 국제적인 판매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놓은 상태라고 한다. 공군은 277기를 요구했고 미 국방성인 팬타곤은 183대의 생산을 허락한 상태라고 한다. 그 전투기 한 대 가격이 3억불이라고 하니까 한국 돈으로 얼마인가. 한 대 가격이 3,300억 원 이상이다. 10대만 해도 3조 이상의 국방 예산이 필요하지 않는가. 이처럼 개인이든 가정이든 그 어떤 기관이든 나라이든 돈이 없이 생존하거나 유지될 수는 없다. 그 돈이란 것이 없이는 이 세상을 단 하루도 살아가기 어렵지 않은가. 그러나 그 돈을 지나치게 의지하거나 집착하거나 사랑하기까지 하면 문제는 복잡해지고 심각해지고 만다.

어느 날 유대의 부자 관리 한 사람이 예수를 만나러 왔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의 같은 본문에 보면 그 부자 관원은 청년이라고 했다. 청년인데 부자인 것을 보면 아마도 집안에 내려오는 유산을 적지 않게 분배 받은 것 같다.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 교육도 철저하게 받고 자라서 그 동안 살아오면서 계명을 지키는 신앙생활도 철저하였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등의 대인관계의 모든 계명들을 하나도 어긋나지 않고 잘 지키며 어린 시절과 청소년의 때와 청년의 날을 살아가는 유대 사회의 모범 청년이었다. 신분적으로도 이미 유대의 주류 사회에 진출해 있는 관리이었다. 그의 사회적인 신분을 성경은 더 이상 정확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The Good News Bible"에 보면 ‘A Jewish leader'라고 했다. 성경의 그의 나이도 정확히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젊고 이미 유대 사회의 지도자로 성공해 있었고 재산도 많았다. 부자였다. 웬만한 부자가 아니라 23절에 보면 큰 부자였다. 우리나라로 하면 어떤 사람들을 큰 부자라고 하는지 대강 그 이름이나 얼굴이 떠올려 지지 않는가. 국가를 대표하는 기업의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는 젊은 세대들을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그 큰 부자인 유대 관리 한 사람이 예수께 찾아 와서 질문하였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본문의 예수님과 유대의 큰 부자 관리와의 대화의 주제는 영생과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다. 그는 큰 부자였다. 또한 모든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아가려고 씨름하던 바리새인이었다. 세상적으로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고 언제나 당당하고 언제나 씩씩하고 언제나 활력이 넘치고 의욕이 퍼덕이는 생활을 할 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해결되지 않는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이 있었다. “영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었다. “인간은 과연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 이 세상에 아무리 재산이 많고 나라의 땅이라도 사들이고 도시라도 사 들일 만큼의 큰 재산가라고 할지라도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인간의 마지막 가는 길은 어디인가. 여기 예수를 만나러 왔던 유대 관리인 큰 부자 청년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이 오래 살면 얼마나 오래 살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과 함께 영생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1987년 10월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부를 이룬 기업가였던 삼성 그룹의 창업자인 고 이병철(1910-1987.11.19) 회장이 1985년에 폐암으로 투병생활을 시작했고 이년 후인 1987년 말에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인 10월에 병상에서 남겼다는 신앙 질문 24가지가 세상에 공개 되었다. 경남 의령 태생인 그는 24살인 1934년에 일본 와세대 대학 중퇴하고 돌아 와서 마산에서 26살에 정미소를 시작했다가 대구에서 28살에 삼성상회라는 상점 운영을 시작으로 오늘 날의 삼성을 일군 세계적인 기업인이다. 그의 신앙 질문 24가지 중의 일부는 이런 것이다.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나?”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신은 왜 악인을 만들었는가?”
“신앙이 없어도 부귀를 누리고 악인 중에도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많은데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종교란 무엇이며 종교는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
“종교가 없어도 종교가 달라도 착한 사람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였다는데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당신은 이런 질문 앞에 무슨 대답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큰 부자 청년인 유대 관리에게 제안하였다. 그는 철저하게 계명을 잘 지키며 살아온 장래가 촉망되고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처하단 유대 청년이었다. 222절에 보면,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라고 지적하셨다. 그리고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 그리하며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선언하셨다. 큰 부자였던 그 유대 관리는 예수님의 이같은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기 시작했다. 같은 본문을 다루는 마태복음 19장 22절에 보면,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했다. 더 이상 예수님과 대화하려 하지 않고 예수의 곁을 떠나가 버렸다.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고 선언하셨다.

마가복음 10장 22절에 보면 훨씬 실감나게 기록하였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했다. 예수님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그리고 하신 비유 말씀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비유였다. 여기서 부자는 두 종류이다. 본문의 큰 부자처럼 재산이 많은 부자가 있고 또 한 부류의 사람은 언제나 항상 재물과 돈에 집착하는 사람을 말한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라고 하셨다. 그리고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셨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비유 중에 누가복음 16장 19절에서 31절까지에 나오는 ‘지옥에 간 부자와 하나님의 나라에 간 거지 나사로’의 비유 말씀이 교훈하는 내용도 마찬가지이다. 그 비유 중에 나오는 부자가 부자이기 때문에 지옥 간 것이 아니지 않은가. 또한 부자 집의 대문 밖에 버려진 채 거지로 지내면서 부자 집의 상에서 떨어진 음식 찌꺼기를 음식 쓰레기통에서 주워 먹으며 심한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거지 나사로가 등장한다. 그 거지 나사로는 개들이 그의 헌 곳을 핥을 정도의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자도 죽고 거지 나사로도 죽었다. 그런데 부자는 지옥에 갔고 거지 나사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다. 그 거지 나사로가 불쌍하고 살고 몸이 병약하게 살았으니 하나님이 그를 긍휼이 여기셔서 세상에서 불쌍하게 살았으니 천국에서 잘 살거라 하고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삼아주신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의 나라는 누가 들어가는 나라이며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예수께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배경이 있다. 누가복음 16장 14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했다. 저들 바리새인들은 심지어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면 비웃기가 일수였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천국 비유 말씀을 별로 심각하게 들으려 하지 않았다. 저들 바리새인들은 철저하게 현세적이었고 성공 중심, 출세 중심, 권력 중심, 재물과 돈 중심, 명예 중심의 삶을 살아가던 대표적인 부류들 중의 하나였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6장 서두에서 지혜로운 악한 청지기 비유의 교훈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교훈을 말씀하셨다.(눅16:1-13) 그 비유의 끝에 하신 말씀이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고 책망 겸 교훈을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언제가 시큰둥하였다. 누가복음 15장 2절에도 보면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의 교훈을 듣고 싶어서 모여들었을 때에 바리새인가 서기관들이 수군거렸다.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비난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생 구원과 하나님 나라
예수님은 그 큰 부자 관리가 예수님과 제자들의 곁을 근심하며 떠나간 후에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는 구원에 대하여 그리고 영생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명확하게 선포해 주셨다. 구원과 영생은 인간의 자기 선택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한이라는 것이다. 구원과 영생이 사람 스스로 해결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란 말씀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렵다고하면 “누가 구원을 얻으리이까”하는 반응과 질문에 대하여 다시 답해 주신 것이다. 이 같은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이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베드로가 나서서 제자들의 근황을 예수님께 아뢰었다.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유명한 진리를 교훈해 주셨다. 버려야 얻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진리이다. 포기해야 풍성해 지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것을 먹고 기름진 것을 먹고 맛있는 것을 먹었을지라도 위와 소장과 대장을 거치는 동안에 몇 시간 동안 일정하게 음식물이 분해되고 소화되고 나면 모든 것이 다 배설물이 되어 배변되고 마는 것처럼 말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 무엇에도 집착하면 하나님의 나라와는 상관이 없는 백성의 생활이 되고 마는 거이다. 그것이 재물이든 보석이든 그 무슨 진기한 것이든 금은보화와 일체의 재물과 돈에 대한 집착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재물과 돈을 선용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언제든지 내어 드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여기 베드로를 비롯한 12제자들은 자신들의 가족관계와 재물과 소유와 직업을 비롯한 그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주를 따라 나선 이들이었다. 그래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예수께서 붙잡히시고 고난을 당하실 때에 다 같이 부인하고 도망가고 숨고 말았었다. 그런 저들이 나중에 되 돌아와서 회개하고 성령 받고 순교자의 길을 가는 초대 교회의 위대한 사도들이 된 것이 아닌가. 물론 가롯 유다와 같은 불행한 제자도 있었지만 말이다.

성경을 관찰해 보라. 누가복음 17장 20절, 21절, 본문인 18장의 16절, 17절, 24절, 25절, 29절에 계속하여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교훈하시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 구원과 영생 즉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부자면 무엇하고 왕이면 무엇하고 잘 생겼으면 무엇하고 젊었다면 무엇 하겠는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아가자.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 강조한대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자. 그런 삶을 살아가는 가정과 교회와 세상을 만들어 가자. 하나님을 친근히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주님과 동행하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 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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