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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요12:20-33)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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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2-03-25 02:47 조회 20,699 댓글 0
 
오늘 날도 마찬가지이지만 과거에 한 왕국의 국왕이 되어서 일정기간 동안 이웃 왕국과 국제 관계를 잘 유지하면서 국가를 평화롭게 통치하고 국내적으로 안정을 유지해 나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하다 보니 누가 왕이 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왕직을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 잘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느냐는 더욱 더 큰 숙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 모든 직위에는 시작하는 때와 마쳐야 하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역사에 루이 11세(Louis XI, 1423-1483)라는 왕이 있었다. 그가 38살이 되던 해인 1461년에 왕이 되어 그가 61살에 죽던 해인 1483년까지 22년 동안 왕이었다. 루이 11세는 그의 아버지 샤를 7세가 낳은 아들이었다. 어려서부터 못생겼다는 평을 받고 뚱뚱했던 루이는 엄격하게 격리된 환경에서 자라나 비밀스럽고 냉혹하며 미신을 잘 믿는 성격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미신에 대한 신앙심이 깊었고 총명했으며 아는 것이 많았고, 교활한 외교가에다 사람들을 복종시킬 수 있는 대담한 전사였다. 그는 그칠 줄 모르고 샘솟아나는 기략과 술수로 인해 '세계적인 거미'라는 별명을 얻었다. 또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프랑스 민족의식의 대변자로 내세웠는데, 뒤에 반란을 일으킨 신하들 앞에서 "짐이 프랑스다"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루이는 밀정을 통해 부왕인 샤를 7세의 병세에 관한 정보를 상세히 알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결국 독약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앞당겼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마침내 1461년 샤를이 죽자 루이는 5년간의 초조한 망명생활을 끝내고 프랑스 왕위에 올랐다. 그런 루이 11세는 불길한 예언을 하는 예언가들을 모조리 붙잡아다가 처형시키고는 했다. 그 중에서도 나라 안에서 이름 난 예언가 한 사람이 붙들려 왔다. 왕이 그에게 물었다. “네가 소문대로 유명한 예언가라면 나의 운명도 예언해 보아라. 네가 얼마나 더 살아남아 있을 것 같으냐?” 그 때에 예언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네. 폐하.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제가 폐하보다 3일 전에 죽는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이렇게 지혜롭게 말하여 그는 죽음을 모면하였다고 한다.

세상의 왕들의 나중은 거의 다 이러하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던 때의 39명의 왕들 중에서 55년간이나 왕으로 있었던 가장 오래 왕 노릇한 왕은 남 유다의 제 14대 왕인 므낫세 왕(재위 B. C 697-642)이다.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 왕은 위대한 왕이었다. 그러나 아들 므낫세는 아버지 히스기야를 전혀 닮지 못한 형편없는 왕이었다. 므낫세는 하나님을 떠난 왕이요 하나님을 버린 왕이었다. 그런 그도 55년간이나 왕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버린 왕이었다. 역사에 영원한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날과 때는 세상의 왕들이 살고 누렸던 때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때가 찬 경륜(經綸)
오늘 본문에 보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 간 사람들 중에 헬라 사람 몇몇이 있었다. 저들이 예수의 제자인 빌립에게 가서 예수 만나 보기를 청했다. 빌립은 안드레에게 말했고 안드레와 빌립이 함께 가서 예수님께 이와 같은 사실을 전했다. 그 때에 예수님이 하신 대답이 이것이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요12:23) 여기서 예수께서 대답하신 대답이 ‘때’에 관한 대답이셨다. ‘때’란 무엇인가. 요한복음 2장에는 어머니 마리아가 가나의 혼인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아들 예수께 알리는 장면이 나온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그 때에 예수께서 하신 대답이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2:4)였다. 이 같은 말씀은 그 이후에 두 차례 더 나온다.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요7:28-29) 그러나 예수를 잡고자하면서도 예수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는데 그 이유를 사도 요한은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요7:30)고 관찰하여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8장 20절에 다시 성전 안에서 가르치실 기회가 있었으나 예수님을 붙잡지 않은 것은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라고 예수님이 붙잡혀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그런 주님이 오늘 본문에서는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선언하셨다. 요한복음 7장 39절에는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아니하셨으므로”라고 했는데 오늘 본문인 12장에 와서는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하고 선언하신 것이다.

요한복음의 기록 순서로 하면 이미 12장 서두에서 예수님은 이미 베다니 나사로의 가정에서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리는 헌신을 받으신 바 있다. 사람들은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를 예수와 함께 다 같이 죽여 없애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을 때였다. 그런 그 이튿날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새끼 나귀를 타고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셨다. 요한복음 12장 16절에 보면, 사도 요한은 이 사건을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일로 기록하고 있다.

다음 주일이 종려 주일인데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묵상함으로 올 해 사순절을 마무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으심과 부활을 중심으로 한 성경의 주요한 교훈을 다시금 깨닫는 시간이 되길 소망한다.

영생(永生)의 비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사신 날들은 33년이었다. 그런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고 인자(人子)로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셔야만 했던 사명을 이루어 가시는 그 마무리를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라는 말씀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해 주신 교훈의 말씀이 땅에 떨어져 죽으므로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에 관한 말씀이셨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리고 이어서 설명해 주신 말씀이,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는 선언이셨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면 잃고 미워하면 영생하도록 보전한다는 말씀이 무엇인가. 이 세상을 살아가다가 보면 나라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피할 수 없는 역사의 현장에서 죽어가는 이들이 있고, 또한 죽는 이들이 있다. 저들의 죽음은 죽었으나 영원한 이름이 된다. 우리나라의 근대사로 하면 독립 운동의 선봉에 섰던 유관순의 죽음이 그러하고 민족시인 윤동주의 죽음이 그러하고 신사참배를 반대하가다 극심한 고문을 받아야 했던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죽음이 그러하다. 2010년 3월 23일, 천안함 폭침 사건으로 희생을 당한 46명의 해병 용사들의 죽음이 그러하다. 

그러나 여기서 성경이 말씀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죽음의 의미와 생명의 교훈은 그런 정도의 차원을 뛰어 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사람 아담에게서 들어온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둘째 아담이시다. 첫째 사람 아담에게서 죽음이 왔고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영생이 온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이 생명 즉 영생을 주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께서 평소에 강조하신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생하리라.” 혹은 “이 물을 마시는 자는 영생하리라.”는 교훈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 본문 25절 끝에 예수께서 사용하신 표현 중에 ‘보전’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 ‘보전’(保全, fulavxei,퓨락세이)이란 말씀은 현재적이면서 동시에 미래적인 것을 포함한 말씀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얻을 영생은 지금 당장 현재부터 주어지는 현재적인 영생이며 영원한 영생인 것이다.

마태복음 25장 후반부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의 마지막 절 교훈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25:46)고 하셨다. 그 비유 말씀의 시작이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마25:31)라고 전제하시고 교훈하신 비유의 말씀이 바로 양과 염소의 비유 말씀이시다. 그러면 누가 영생할 자인가. 사도 바울은 영생을 로마서 5장 21절에서,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고 선언해 주었다. 인간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 죄가 인간을 지배하고 다스려서 죄와 사망의 상태에 머물고 만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 받고 죽음과 사망을 이긴 생명 즉 영생을 선물로 얻고 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되는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 생명 즉 이 영생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주어지는 은총이다. 이것이 죄 사함이고, 이것이 구원이고, 이것이 천국의 시작이고, 이것이 거듭나는 것이고, 이것이 중생이다.
 
예수를 섬기는 자의 받을 은총
그리고 이어서 해 주신 예수님의 말씀이 섬김에 관한 말씀이다. ‘예수님을 섬긴다.’는 말씀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해 주신 말씀 그대로 묵상해 보자.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를 섬기려면 예수를 따라야 한다. 신앙생활의 조건이며 의무이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예수를 섬기려면 예수와 늘 함께 하여야 한다. 신앙생활의 보증이며 사명이다.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라고 하셨다.

예수를 섬기면 하나님께서 그를 귀히 여기신다. 신앙생활의 상급이다.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했다.

예수님을 섬기는 시작이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이라고 했다. "나를 따르라“는 초청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를 교훈한다. 예수께서 계신 곳에 예수를 섬기는 자도 있다는 말씀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가난한자와 배고픈 자와 목마른 자와 불쌍한 자와 병든 자와 소외된 자와 귀신들린 자와 눌린 자와 포로 된 자와 억압 받는 자와 심지어는 죽은 자들 곁에까지 찾아 가셔서 배 불리 먹여 주시고 고쳐 주시고 자유하게 해 주시고 살려 주시므로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와 축복의 부활과 생명을 영원히 선물해 주셨다.

이 세상의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서 산다. 이기적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거듭난 성도의 삶이란 누군가를 섬기고 무엇인가를 섬기고 어디에선가 섬기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남을 위하고 배려하며 이타적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금번에 세계은행 총재로 지명된 김용 미국 다트머스대학 총장의 경우를 보라. 세상도 그런 사람을 찾는 것이다. 그는 다섯 살 때 부모 따라 미국에 가서 성장했고 브라운 대학을 나오고 하버드대학원에서 공부한 의사이지만 20여년을 아시아와 특히 아프리카 지역의 가난하고 병든 이들 곁에 찾아다니면서 결핵과 에이즈로 고생하고 죽어가는 이들을 도와주고 치료하고 회복시켜 나갈 수 있는 길을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주인공이었다. 그는 지난 2009년에 미국 10대 명문 대학인 다트머스 대학의 총장직을 수락한 이유도 “청년들의 가슴 속에 장차 세상에 나아가서 가난하고 소외되고 약한 이들을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 가를 실감나게 깨우쳐 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죽음을 이기는 생명 즉 영생을 보전하는 신앙의 신비와 오묘한 교훈을 말씀하신 예수께서 이어서 교훈해 주신 말씀이 섬김에 관한 말씀이다. 그렇다. 신앙생활이란 끝  없이 누군가를 섬기는 것이어야 한다. 가진 자가 없는 자를 섬겨야 한다. 배운 자가 모르는 자를 섬겨야 한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겨야 한다. 실력 있고 역량 있고 능력 있는 자가 부족한 자를 돌보고 섬겨야 한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 보면 예수께서는,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25:35-40)고 말씀했다. 섬기는 자가 받을 은총이 있다고 하셨다.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12:26) 이는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가족들 간에도 섬길 수 있는 자가 할 수 없는 가족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다. 일상생활 중에서 주변의 그 누군가를 그런 마음으로 섬기는 일이다. 그것이 밀알처럼 죽어가고 영생하는 신앙의 비밀이며 섬김의 은총이다.

일본은 한국보다 기독교인이 적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의 기독교인들이 신실한 것은 세계 교회가 인정하는 바이다. 과거에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한 존 데 훼레스트 선교사가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 파송된 선교사였는데 일본 말을 유창하게 구사하였다. 그는 당시에 일본인들의 성실함과 좋은 점들을 칭찬하고 인정하면서 자신도 일본에서 선교하다가 죽어 일본에 묻힐 것이라고 눈물을 흘리며 열심히 일본의 영혼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설교하였다. 존 데 훼레스트 선교사는 실제 그의 말처럼 평생을 일본에서 선교하다가 일본에서 죽어 일본 땅에 장례되었다. 그가 일본말로 설교하면 청중들이 ‘아멘, 아멘’ 하면서 회개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 중에 이마이 가와씨라는 이름의 승려 한 사람이 그의 설교를 듣고 개종하였다. 그는 승려에서 벗어나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고 일본 역사에 이름이 알려진 부흥사가 되었다. 섬김에는 놀라운 신비가 있다.

예수님의 고난(苦難)과 장차 얻으신 영광(榮光)
예수님의 나중 생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즈음에서 예수님의 심경이 몹시 괴로우셨던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요12:27)라고 했다. 다가오는 고난과 죽음의 순간 앞에 착잡해 하신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장면이다. 27절과 28절을 표준새번역 성경으로 보면 훨씬 실감이 난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내가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 아니다. 내가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이때에 왔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이미 영광되게 하였고, 앞으로도 영광되게 하겠다."

 그렇다. 오늘 날의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면 예수님이 고통과 수치와 아픔과 배반과 모욕을 다 당하시고 죽으셨으나 부활 승리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스럽고 존귀한 날이 분명히 다가 올 것이다.

슬퍼하며 괴로워하며 착잡해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응답이 무엇인가. 예수님의 곁에 섰던 무리들은 천둥이 울렸다고 했다.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예수님께 말했다고도 했다. 하나님이 아들 예수님께 말씀해 주신 것이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신 예수님은 당혹해 하는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단호한 말씀으로 장차 주께서 죽으실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해 주셨다.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 죽어야 산다. 사망을 뛰어 넘어야 영생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사망의 종교가 아니라 부활의 종교요 생명의 종교요 영생의 종교다. 우리는 죽음과 사망을 두려워하거나 고민하는 자들이 아니라 생명을 감사하고 영생을 감격해 하며 영원한 삶을 살고 그 영원한 삶을 나누는 자들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고난이 있다. 슬픔도 있고 아픔도 있고 괴로움도 있다. 그러나 그 고난과 아픔과 슬픔과 괴로움의 언덕 너머에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고 가 본 적이 없는 영광스러운 세계와 그런 날이 다가 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계속하여 영광스럽게 하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원히 살아계시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다.

박해와 핍박 속에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10;22)고 했다.

<예수가 가르친 제자도>(You Follow Me)라는 책에 보면 찰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 1834-1892) 목사는 그의 할아버지에 관한 일화를 소개한다. 그의 할아버지도 평생을 주를 섬긴 목회자요 설교자요 전도자였다. 그의 할아버지가 청년의 때에 부름을 받고 50여년을 한 결 같이 하나님을 섬겼다. 80이 넘어서 병약하여 하나님 앞으로 가시기 전에 손자 목사인 스펄전에게 남긴 일화를 전해 주는 것이다. “평생토록 믿은 하나님께 대한 나의 신앙과 교리에는 하나도 변함이 없다. 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려 왔고 지금도 이전보다 더욱 더 하나님의 그 가르치심을 사랑한다.” 그런 말씀을 남기고 하나님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종말의 현상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종말의 때가 되면 불법이 성해지고 사랑이 식어진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강조해 주신 말씀이 이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24;13) 성도여! 고난 많은 세상 중에서 죽임을 이기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와 함께 우리 모두 각 사람이 영광스러운 삶을 서로 가꾸어 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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