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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막9:2-13)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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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2-03-03 23:56 조회 21,964 댓글 0
 
에이든 W. 토저 목사의 <철저한 십자가>(The Radical Cross)란 책에 보면, 십자가의 역설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살려고 하면 죽어야 한다.”는 주제의 말씀을 전해 주었다. 그는 그 묵상의 내용에서 4세기의 성자 어거스틴의 기도문을 머리말 부분에 인용했다.

“주님. 제가 죽게 하소서. 그래야 제가 살 수 있습니다.
오직 제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하소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이어서 기도했다.

“하나님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제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쉼을 얻게 하소서. 제 마음에 들어오시어 제 마음을 사로잡으소서. 그리하시면 제가 저의 죄악을 잊지 않을 것이며, 제 유일한 선이신 하나님을 붙들 것입니다.”

토저 목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늘 날도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시는 것으로 족하게 여기고 우리는 로마 황제의 면류관처럼 번쩍거리는 면류관을 쓰고 자기 왕국에서 왕 노릇 하려고 한다고 했다. 그는 1,800년대 말인 1897년 태어나서 1963년에 세상을 떠난 미국의 목사였다. 그런 그의 메시지는 지금으로부터 최소한 60년 전에 선포된 말씀들이다. 당시의 우리나라는 6. 25를 전후한 시대였다. 토저 목사는 그 당시의 미국 교인들을 향하여,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을 어둠과 연약함과 영적 무익함의 늪에 빠뜨릴 뿐이다. 우리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순수한 마음,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 영적 통찰력, 그리고 영적 열매를 잃어버리게 된다.”

고 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동의되고 깨달아 지는 말씀이 아닌가. 오늘 날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신앙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깨닫고 해석하지 않으면 잘못되고 말 것이다. 

기독교는 역설(逆說)의 종교이다. 낮아짐으로 높아지고, 나누어 줌으로 넉넉하게 된다. 빼앗김으로 오히려 풍성하게 되찾고, 아무 것도 없으므로 오히려 모든 것을 가지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다.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 이와 같은 역설의 진리를 몸소 절절이 체험한 인물은 사도 바울이었다. 고린도 후서 6장 8절 이하에 그와 같은 그의 고백이 나온다.(고후6:8-10)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된 자들이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이다.
죽은 자 같으나 살아 있는 자이다.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는 자이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자이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자이다.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이다.

우리의 믿는 믿음은 어둠 속에 있었으므로 광명을 회복하고 죽으므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신앙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요 영원한 생명 즉 영생의 종교다. 이 세상에 죽기 위해서 사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여기에 우리가 믿는 신앙의 신비가 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신앙의 역설이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성공하고 출세하고 힘을 얻고 재물을 모으고 명예와 권력을 얻고 잘 살아 보고 잘 되려고 발버둥을 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당신은 오히려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도리어 자신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다고 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막8:34-37)고 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크게 세 번에 걸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하여 미리 예언적으로 말씀하신 말씀이 나온다. 소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예고라고 하는 내용이다. 마가복음에는 오늘 본문으로 읽은 그 바로 앞부분인 마가복음 8장 31절부터 9장 1절까지가 첫 수난 예고의 기록이다. 인자이신 예수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첫 기록이 마가복음 8장 31절에 나온다. 이 일로 인해서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베드로가 예수께 항변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 때 예수는 모든 제자들 앞에서 베드로를 꾸짖으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막8:33)고 책망하셨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책망하신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 사건 후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놓고 하신 말씀이 그 유명한 자기 부인의 진리다. 성도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야 한다는 강조를 해 주셨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고 설명해 주신 것이다. 예수는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예수를 부끄러워하면 예수께서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다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말씀했다. 그리고 장차 권능으로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언급하셨다. 그 엿새 후에 일어난 장면이 오늘의 본문이다. 소위 변화산 사건으로 이름 붙이는 장면이다. 이 산이 어느 산일까. 성경에 그 산의 이름이 정확하게 기록된 곳이 단 한곳도 없다. 혹자는 이스라엘 평야 한 가운데 있는 해발 560미터의 둥그런 다볼 산이엇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그 정도의 산을 높은 산이라고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반문한다. 그러므로 시편 133편 3절에서 말씀하는 헐몬 산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강하다. 헐몬 산은 해발 2,800미터의 높은 산이다. 마가복음 8장 27절에서 언급한 빌립보 가이사랴 지역에서 가까운 산이며 그 이전부터 늘 거룩한 산 즉 성산(聖山)으로 일컫던 산이 헐몬 산이다.

어느 날 예수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 세 제자들만 따로 데리시고 이 높은 산에 올라 가셨다. 그리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변형되셨다. 그 광채의 영광스러움을 마가는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고 했다.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하신 예수.
그 때에 엘리야 선지자가 모세와 함께 나타나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서로 말하였다. 마가는 저들이 서로 대화한 내용에 대하여 전혀 기록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같은 본문인 누가복음 9장 31절에 보면,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라고 했다. 예수께서 엘리야와 모세와 더불어 장차 예루살렘에서 붙잡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셨다는 말이다. 왜 모세이고, 왜 엘리야일까.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요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자이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과 선지서의 완성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모세는 하나님의 언약을 체결한 자이며(출19:4-6), 엘리야는 하나님의 언약을 갱신한 자이다.(왕상 18:30)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하신 분이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들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5:17)고 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자이다.(출31:8) 그리고 엘리야는 호렙 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자이다.(왕상 19:8)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이심을 보여 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2:9)라고 했다.

모세는 죽음을 경험한 자이고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자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죽음으로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신 부활의 첫 열매이시다. 그러므로 모세는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무덤 속에서 일어나 주님을 맞을 죽은 성도들을 대표하는 것이고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살아서 예수의 강림을 맞을 성도들을 예표하는 것이다. 즉 죽은 자와 산 자의 대표인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장차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즉 죽으실 것과 부활 하실 것에 대하여 말씀을 나눈 것이다.

참된 성도들의 특징은 죽음과 부활을 생각하고 말하고 믿는 자들이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 궁리만 한다. 다 보이는 것에만 투자하고 치장하고 뜯어 고치고 다시 고치고 또 뜯어 고치고 또 다시 고친다고 하지 않는가.

요즘 어느 백화점에서 명품 백을 세일한다고 하니까 아침부터 문을 열자마자 홍수가 밀려들어가듯이 장사진을 쳤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나라는 가방이든 옷이든 구두이든 시계이든 그 어느 보석이든 그 무슨 화장품이든 비싸게 부르면 부를수록 잘 팔리는 나라 중에 대표적인 나라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나라처럼 얼굴과 몸에 성형 수술을 많이 하는 나라도 없다 하지 않는가. TV에 등장하는 여배우들은 거의 다가 그 사람이 그 사람이것처럼 눈, 코, 입을 뜯어 고치고 또 뜯어 고친다고 하지 않는가. 여대생들이 겨울 방학이나 여름 방학에 얼굴 고치기 위해서 아르바이트하고 돈 모으려 한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나라처럼 보이는 것에 목숨을 걸고 투자하고 가치를 두는 민족도 없을 것이다. 때가 되면 다 늙고 다 썩을 영광을 위하여 목숨을 거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이런 나라가 되어가기 시작했는가.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성도들은 무언가 좀 다르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베드로 사도가 깨달음을 갖고 나중에 편지한 베드로전서 1장 3절과 4절에 보면,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는 분은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최근에 48살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안타까운 죽음을 죽은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을 보라. 그는 어려서 교회학교 시절에 어린이 성가대로 활동하던 교회 생활이 있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런 그의 과거를 뒤로 하고 그 좋은 재능, 그 아름다운 목소리의 주인공이 불행하고 불쌍한 생을 마치고 만 이유가 무엇인가. 마약과 약물에 중독되면 그 가는 길이 어디이며 그 나중 모습이 대개 어떻게 되는가. 그녀의 ‘I will always love you' 같은 노래는 얼마나 잘 알려진 유명한 노래인가. 그 사랑의 대상이 세상 남자나 세상 여자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여야 영원한 가치가 있고 그 사랑이 숭고해 지는 것이다.

예수를 만나야 한다. 예수를 체험해야 한다. 예수를 마음 깊이 모셔 들이고 영접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으로 내 안에서 영적인 변형(變形)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와 엘리야 앞에서 세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변형되셨다. 변형되었다는 말이 무엇인가. 영어 성경에 보면 ‘transfiguration’이라고 했다. 그 원 뜻은 형상의 외형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형상이 바뀌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적 본질에 대한 신비로운 계시를 말한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이것은 장차 예수께서 이룩하실 육의 몸에서 부활의 몸으로의 변화를 보여주신 예표적 사건이다. 이 같은 변형은 훗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고난을 당할 것이나 사탄의 세력을 꺾으실 승리를 미리 보여 주신 사건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실 천국의 영광과 장차 있을 재림까지를 모두 보여 주신 사건이다.

그러므로 그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변형을 체험하는 신앙생활을 살아가야 한다. 겉으로의 모양의 변형이 아니라 속사람이 변형되고 나 안에 있는 자아가 변형되어야 한다. 이것은 영적으로 거듭 나는 것이며 중생이며 죄 사함이며 진리를 깨달아 아는 것이다.

산꼭대기의 영적 만족과 하산(下山).
베드로는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변형의 장면을 목격하면서 너무나 감격스럽고 기쁘고 한 편으로는 무섭기까지 하였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께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를 위하여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다고 제안하였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귀한 손님이 오시면 자신들의 거처 말고 따로 새롭게 초막을 지어서 손님을 맞는 풍습이 있었다. 열왕기 하 4장에 보면 수넴 여인이 남편과 상의하고 선지자 엘리사를 위해서 새롭게 담장 위에 새 방을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그 방 안에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마련하여 선지자 엘리사가 자유롭게 머물며 선지 활동을 하도록 배려하였다.(왕하4:8-10)

베드로는 이처럼 너무나 감격하고 놀라워서 예수 그리스도와 모세와 엘리야를 위하여 초막을 지어 드리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세 제자들을 이끌고 산 아래로 내려 왔다. 그 때에 예수께서 다시 한 마디 하셨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막9:9) 그리고 엘리야를 통한 회복과 인자이신 예수께서 당하실 고난과 멸시에 대하여 언급하셨다. 산꼭대기에는 영광스러운 변형이 있던 곳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들이 고난 속에 살아가는 산 아래의 마을과 동네로 내려오기를 원하셨다. 산 아래는 가난과 고통과 질병과 두려움과 한숨과 걱정과 근심과 염려와 불안과 초조가 끊임없이 계속되는 곳이다. 그야말로 갈릴리인 것이다.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마28:10)는 말씀의 의미도 바로 그러한 것이다.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는 장차 당하실 주님의 고난과 멸시를 언급하셨다. 이 세상에 고난과 멸시를 원하는 자가 누구인가. 그러나 여기에 복음의 신비가 있고 인자로 오셔서 인간의 몸을 입고 살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핍박과 죽으심과 부활의 신비가 담겨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1:8)고 권면했다. 복음을 위한 고난에는 가치고 있고 보람이 있고 상급이 있다. 복음을 위한 고난의 상급은 영원한 것이다.

주기철 목사(朱基徹,1897-1944)나 유관순(柳寬順, 1902-1920)은 죽었으나 민족과 기독교인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이름인 것처럼 말이다. 유관순이 언제 인물인데 사람들은 유관순을 누나라고 부르지 않는가. 그는 영원히 이 민족의 누나요 누님으로 존재하는 부활의 이름이여 영원한 이름인 것이다. 독립 운동가요 신앙적이고 양심적인 지식인으로 살았던 청년 시인 윤동주(尹東柱, 1917-1945)는 27살 젊은 나이에 일본의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 되었다가 극심한 해방이 되던 해 2월 16일 고문 후유증으로 죽고 말았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에 대한민국의 해방과 독립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가슴 속에는 영원히 불타오르는 조국의 독립과 해방의 열망이 있었다. 이것이 진정한 변형인 것이다. 이것이 참다운 회복이며 완성인 것이다. 애국 시인 윤동주는 그의 시 100편과 함께 영원히 살아있는 자랑스럽고 영원한 믿음의 청년이요 애국 시인인 것이다. 이것이 복음 안에 고난과 멸시와 질고를 겪으며 산자들의 영광이 아니고 무엇인가. 만주 북간도에서 태어난 그는 이미 할아버지 때부터 기독교 가정의 신앙을 받아 들였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그는 일제가 창씨개명을 할 때에 그렇게 괴로워하였다고 한다. 1942년에 일본에 건너가서 도쿄 릿쿄(立敎)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6개월 만에 그만두고 도쿄 도시샤(同志社) 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였다. 그런 환경에서 그러나 그는 그 다음 해에 사상법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고 감옥에 쳐 넣어 졌다. 심한 고문을 계속하여 받았고 몸은 몹시 쇠약해져 갔다. 결국 해방을 6개월 남겨 놓고 일본의 감옥에서 옥사 하고 말았다. 그리고 3년 후인 1948년 그의 유작시 31편을 모아서 시인 정지용이 서문을 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유고시집이 발간되었다.

고난과 죽음과 부활신앙이란 무엇인가. 물론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가운데 죄 사함을 받고 영생하고 천국 백성의 복락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답게 변형되고 변화된 성도다운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의 말씀.
예수께서 변화 산꼭대기에서 변형되시고 모세와 엘리야와 말씀을 나누실 때에 하늘에는 구름이 저들을 덮었고 그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막9:7)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산 꼭대기에서 내려 오셔서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가 가까워 오고 있다.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마라라.
인자는 장차 많은 고난과 멸시를 받을 것이다.

그 후로 예수는 두 번 더 반복하여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고 또 다시 말씀하셨다.(막9:30-32, 10:32-34) 그리고 잠잠히 고난의 날과 죽음의 날을 거치는 부활을 새벽을 준비하셨다. 죽음과 부활! 이 복음의 본체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높은 산, 변화 산의 꼭대기에서 구름으로 덮으시고 말씀하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듣는 이마다 이기게 될 것이다. 듣는 이마다 살아날 것이다. 듣는 이마다 영생할 것이다. 듣는 이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과거에 미국인 선교사 릴리언 딕슨과 남편이 대만에서 선교하기 위해서 대만정부 사회사업 관리와 협의하였다. 관리는 그 동안의 선교단체들의 실패를 예로 들어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미국으로 돌아가십시요. 대만에서 기독교를 전한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이곳에서 선교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 부부는 일어나 창가로 가서 바다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바다가 보이지요. 대만 사람들을 도와주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지요. 그것은 마치 저 바닷물을 한 양동이씩 퍼내는 것처럼 어렵긴 해도 불가능하지는 않지요.” “자! 어서 이곳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나갑시다.” 둘은 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50여년이 넘게 대만에서 선교를 했고 그 후 5,000개가 넘는 교회와 학교와 병원이 저들 부부의 손길을 거쳐서 세워졌다.
 
복음 안에서 살아가는 현장에는 고난과 멸시가 있다. 그러나 그 나중은 영광스러운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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