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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박한 자의 기도(시26:1-12) 2023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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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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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9-03 13:29 조회 2,741 댓글 0
 

                       절박한 자의 기도(시26:1-12)                    2023. 9. 3

 

 

오늘 설교의 제목을 ‘절박한 자의 기도’라고 정하기 전에 ‘다급한 자의 기도’라는 제목을 먼저 떠 올렸다. ‘다급하다’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 보았더니 “앞뒤를 가릴 수 없을 만큼 많이 급하다”라고 설명 되어 있었다. ‘다급스럽다’는 “일의 앞뒤를 가릴 수 없을 만큼 몹시 급한데가 있다”라는 설명이었다. ‘다급’이란 단어는 한자가 아니다. 순 우리말이다. 그 사용의 예가 불교적인 배경이었다. 아마도 한글 사용의 역사가 불교적인 배경이 오래되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졌다.

 

“부처도 다급하면 거짓말한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다급한 상황에서는 옳지 않은 행동을 하기도 한다는 말

 

“다급해야 관세음보살 한다”

어떤 일을 평소엔 하지 않다가 위급한 상황에 처해야 하게 된다는 말

 

“다급하면 아첨하게 된다”

사람이 다급한 환경에 빠지면 비굴한 줄 알면서도 아첨하게 된다는 말

 

등으로 정리해 놓은 것을 보았다. 오늘 본문은 시편 26편도 다윗의 시편이다. 내용을 보면 다윗이 몹시 다급하고 절박(切迫)한 상황에서 기도한 것이 분명하다. 여러분은 다급해지면 어떻게 반응하게 되는가. 우리가 아는대로 다윗은 그 생이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시편 26편은 아마도 사무엘하 15장에 나오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이나 사무엘하 20장에 나오는 세바의 반역 사건을 배경으로 고백한 시편이라고 여겨진다. 다윗의 주변에는 불의한 세력들이 적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다윗은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소연하고는 하였다.

 

다윗은 왕이 되기 이전이나 왕이 된 이후에나 언제나 사면초가와 같은 정적들 사이에 휩싸여 지내야만 했다. 그가 왕이 되기 전에는 사울 왕이 그를 너무 미워하였다. 그래서는 항상 죽어 없애려고 하였다. 다윗은 그가 왕이 된 후에도 나라 안팎에 수 많은 정적들이 득세하였다. 늘그막에는 아들 압살롬이 속을 끓였다. 결국에는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왕위에서 좇아내는 반역을 저질렀다. 

 

사무엘하 7장의 내용대로 다윗은 자신을 왕으로 세운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았다. 결코 자신의 역량이나 인기나 지도력이 남들보다 뛰어나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처럼 다윗의 마음 속에는 “신정주의 정통성”을 수호하려는 믿음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세상과 주변은 그가 그렇게 순적하게 나라를 통치해 갈 수 있도록 가만히 두질 않았다. 

 

시편 26편에 보면 4절에 ‘허망한 사람, 간사한 자’라는 표현이 나온다. 5절에는 ‘행악자, 악한 자’라고 했다. 9절에는 ‘죄인, 살인자’라는 표현도 썼다. 10절에서는 “사악한 손, 뇌물이 가득한 손”등의 표현을 하는 것을 볼 때에 그의 주변 사람들이 대개 어떤 자들이었는지를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그런 착잡하고 복잡다단한 주변 정세를 돌아보면서 하루도 한 순간도 잠잠할 때가 없는 나날을 지내던 다윗은 결정적인 순간에 다급하기 그지 없는 충격적인 사건 앞에서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하소연하며 간구하고 부르짖는 기도가 오늘의 본문이다. 비탄시라고 구분하는 시편 26편에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 무슨 기도를 드리고 있나를 살펴 보는 중에 은혜가 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나를 판단하고 단련하소서.

시편 26편의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평소에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던 신앙관, 가치관, 인생관 등을 엿보기에 충분하다.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의지합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습니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합니다.

 

나는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습니다. 

나는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나는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합니다. 

나는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주의 영광이 머물며 주께서 계시는 주의 집을 사랑합니다. 

나는 언제까지나 주를 송축하며 살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이 구절 구절마다 고백되고 있다. 우리는 세상을 살다가 보면 “자기 소개서” 혹은 “자기 신앙 고백서”라는 것을 작성할 때가 있다. 내가 나를 누군가에게 스스로 소개하고 밝혀야 할 경우가 있다. 진학, 유학, 취업, 진급 등등의 경우에 말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약에 내가 오늘, 지금 나를 소개하는 “신앙 고백서”를 작성해야만 한다면 무슨 내용을 쓸 수 있을까.

다윗은 이렇게 다듭하고 절박한 상황 앞에서 하나님께 평소에 품고 지내던 자기 자신의 신앙관과 인생관을 자세하게 피력하고 있다. 물론 어쩌면 하나님은 다윗 자신이 아는 자신의 모습보다 다윗을 더 잘 아실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뜻과 범사를 감찰하시는 분이시니까 말이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솔직한 자신의 심경을 털어 놓으면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 나를 판단해 주세요.

하나님. 나를 살펴 주시고 시험하셔서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해 주세요.

 

라고 말이다. 우리는 다윗의 이와 같은 내용의 기도를 대할 때에 “감히 내가 이런 기도를 하나님 앞에서 드릴 수 있을까”하고 반문하게 된다. 그렇지 않나.

 

1-2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으면 이렇다. 

 

“주님, 나를 변호해 주십시오. 나는 올바르게 살아왔습니다. 주님만을 의지하고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주님, 나를 샅샅이 살펴보시고, 시험하여 보십시오. 나의 속 깊은 곳과 마음을 달구어 보십시오.”

 

다윗은 감히 하나님 앞에서 이런 기도를 드릴만한 영적 자세와 태도를 가지고 살아 왔다. <공동번역성경>으로 읽으면 훨씬 실감이 난다. 

 

“야훼여, 나의 무죄함을 밝혀주소서. 깨끗하게 살며 당신만을 철석같이 믿었사옵니다. 야훼여, 샅샅이 캐어보고 알아보소서. 속속들이 내 마음 뒤집어보소서.”

 

다윗은 지금 억울하고 속 상하고 답답하고 괴롭기 그지 없다. 그렇지 않겠나. 자신이 이날 까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 왔는데 지금 이런 일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이런 고백의 배경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이라고 상상해 보자. 살다 살다 그래 다른 이도 아니고 내 자식에서 반역을 당했다고 상상해 보자는 말이다. 시편 26편이 고백된 배경이 만약에 압살롬의 반역 사건이라면 다윗이 감히 그 어느 누구에게 하소연 할 수 있었겠는가. 그 어느 누구에게 자신이 답답하고 속 상한 심정을 토로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다윗은 더욱 더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다. “하나님. 허망하고, 간사하고, 악을 일삼고, 살인을 두려워 하지 않고, 사악이 가득한 자들 가운데에서 주님을 의지합니다. 그러하니 주께서 선악을 판단해 주세요. 주께서 나의 형편을 살펴 주세요. 주께서 나를 시험해 보세요. 주께서 나의 뜻과 양심을 살피셔서 무죄함을 변호해 주세요.”라고 하소연하는 것이다. 

 

우리도 세상을 살다보면 별의 별 일을 다 겪게 된다. 별의 별 일을 다 맞닥트리게 된다. 때로는 속이 부글 부글 끓기도 한다. 억울하기도 하다. 어려서 시골에서 듣던 속담 중에 “아이코, 차라리 버선 속이라면 뒤집어서 보여 주기나 할텐데”라고 말하며 자신의 답답함이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표현을 들은 기억이 난다.  맞다. 우리는 세상을 살다 보면 차마 그 어느 누구에게도 감히 다 말할 수 없는 개인적이고, 가정적이고, 그 누군가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는 마음이 먹먹한 일을 겪을 때가 있다. 

 

다윗은 그처럼 속이 상하고 애 간장이 녹아 내리고 사고와 사건을 한 두 번 경험한 것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이었다.

 

3절에 있는“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합니다.”라는 고백의 바탕이 무엇인가. 평소에 다윗은 알았다. 주님은 인자와 인애와 사랑과 긍휼과 자비가 가득하시다는 것을 말이다. 그 뿐만 아니라 다윗은 언제나 자신이 진리 안에서 행하며 살아간다는 확신과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다윗은 감히 하나님 앞에서 하소연하며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의 후손 중에 히스기야 왕이 다윗과 비슷한 믿음의 주인공이었다. 남 유다 13대 왕이었던 히스기야는 29년 동안 왕으로 있었다. 열왕기하 20장 3절에 보면 그는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라고 하였다. 이 기도는 히스기야가 병들었을 때에 그의 얼굴을 벽을 향하고 기도하던 때에 기도한 내용이다. 

 

우리는 어떤가. 다급할 때에, 절박할 때에만 기도하고 주를 찾는 것이 아니라 다윗처럼 히스기야처럼 평소에 늘 진실함과 전심으로 주님을 찾고 의지하는 믿음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요즘 어떤 기도 제목을 가지고 지내는가. 요즘 어떤 일이, 무슨 사건이, 어느 누가 나의 마음을 다급하게 하고, 절박하게 만드는가.

 

6-7절을 <새번역성경>으로 보면 절박한 상황에서 다윗은“주님, 내가 손을 씻어 내 무죄함을 드러내며 주님의 제단을 두루 돌면서, 감사의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며, 주님께서 나에게 해주신 놀라운 일들을 모두 다 전하겠습니다.”라고 하소연하고 있다. 이게 무슨 뜻인가. 지금 다윗이 비록 절박한 상황으로 인해서 평상시처럼 평안하게 지낼 수 없는 불안하고 초조하고 장래가 불확실한 형편 가운데 있을지라도 다윗의 믿음은 분명하였다. “내가 장차 주의 제단에서 감사하며 주님이 나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간증할 것입니다. 주님 나의 무죄함을 드러내 주십시요”다윗은 이런 마음가짐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찬양한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라는 찬양처럼 말이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 바라보아라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 주리라”

 

마음이 답답하고 우울하고 속이 상하고 불안하고 괴로울 때에 다윗처럼 주님의 판단과 보살피심을 믿고 주께 하소연하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를 속량(贖良)하시고 은혜(恩惠)를 베푸소서.

다윗은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 9절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라는 기도를 볼 때에 지금 다윗은 그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의 화살과 창 끝에 그의 출입이 노출되어 있다. 불안하고 초조하다. 어느 순간에 심장에 화살이 날아 들지 모른다. 어느 순간에 그의 심장에 창이 꽂힐지 모르는 불안한 순간 순간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 다급하고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시고 네게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라고 말이다. <공동번역성경>으로 읽으면 훨씬 실감이 난다.

 

“야훼여, 나는 당신께서 사시는 집이 좋사옵니다. 

당신의 영광이 깃들이는 곳이 좋사옵니다.

이 목숨을 죄인들과 함께 거두지 마소서. 

살인자들과 함께 이 생명을 거두지 마소서.

그들은 뇌물만 집어주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자들입니다.

이 몸은 그런 죄를 짓지 않았사오니 불쌍히 여기시고 건져주소서.”

(시26:8-11)

 

생각하여 보아라. 요즘처럼 사고와 사건이 많은 세상에서 하루, 한 순간 안전하게 살아가는 것이 나의 선택으로 가능한가. 나 한 사람 조심하고 삼가고 신중하게 출입하는 것으로 가능한가 말이다. 

 

사람이 자기가 지은 죄의 값으로 불행해지고 고난을 겪는다면 할 말이 어디 있겠는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다. 다윗은 시편 26편에서 1절과 11절에서 반복되는 고백을 하고 있다.

“하나님.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할 것입니다.”

라고 말이다. 이런 고백을 아무나 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우리는 이런 기도를 쉽게 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다. 다윗의 그런 면을 하나님은 마음에 들어 하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하튼 다윗은 달랐다. 그도 우리처럼 죄 많은 인생이요 흠이 많고 약점이 많고 부족이 많은 인생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다. 그는 기도할 때마다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할 것입니다.” 이는 다윗이 완전한 자의 삶을 살아 왔다는 증거가 아니다. 다윗은 자신의 부족과 허물과 죄를 그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아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이런 기도를 더욱 더 하려고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죄도 많고 허물도 많고 부끄러운 일들도 많고 약점도 많았던 다윗이지만 다윗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마음에 드는 인생으로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6절에서 이런 기도도 드렸다.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닙니다.”4-5절이 윤리적인 무죄를 주장하는 것이라면 6절은 종교적인 무죄, 신앙적인 무죄를 입증받고 싶었던 다윗의 고백이다.‘손을 씻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는’ 행위는 제사장이 성막과 성전에서 제사를 집전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물론 제사장도 인간이고 제사장도 죄인이다. 그러나 제사장이 성막이나 성전에서 제사를 집전하는 그 순간은 얼마나 영광스럽고 존귀한 순간인가. 다윗은 알았다. 믿음의 사람이 ‘주의 계신 집,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인 성막을 마음에 품고 사랑하며 예배를 소중히 여기고 제사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시간인가를 말이다.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이란 찬양이 생각난다.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그것뿐예요

 

사랑한다 아들아 내가 너를 잘 아노라

사랑한다 내 딸아 네게 축복 더하노라

 

나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나의 모든 허물을 가리워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나를 속량하시고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는”주님을 길이 길이 찬양하는 믿음의 나날을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내가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지금 다윗은 불안에 휩싸여 있고 지금 다윗의 마음은 초조하기 그지 없다. 그런 그가 하나님 앞에 절박한 심정으로 부르짖고 기도하는 중에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12절에서 말하는 ‘평탄한 데’의 반대말은 한발자국도 더 앞으로 내 딛을 수 없는 ‘낭떨어지’를 의미한다. 사실 지금 다윗은 낭떨어지의 끄트머리에 있다. 그래서 다급하고 절박한 기도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사면초가의 우겨싸임 가운데 있다. 그의 주변에는 지금 “허망한 자, 간사한 자, 악한 자, 그를 죽이려고 달려 드는 살인자, 뇌물에 눈이 어두워 져 있는 사악한 자”들이 빈대처럼 득실대고 있다. 믿을 자가 없다. 마음이 불안하다. 금방 인생이 끝날 것만 같다.  한치 앞도 예측할 수가 없다. 안개 정국이다. 신하도, 아들조차도, 그 어느 누구도 자기의 편이 아니다. 지난 주일의 본문처럼 “하나님이 나의 편이 되어 주시지 않는다면” 살아 남을 수가 없는 형편이다. 그런 불안하고 초조하고 두렵고 떨리는 상황에서 절박하게 기도하는 중에 그의 마음에 찾아 든 평온함이 있었다. 그래서 12절에서 이런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라고 말이다. 여기서 고백하는 ‘평탄한 데’란 다윗의 희망사항이다. 다윗의 원하는 장래의 환경이다. 다윗은 지금 쫓기도 있다. 다윗은 지금 불안하다. 압살롬의 반역으로 왕궁을 비워주고 도망하고 있는 다윗의 맞다면 지금 다윗왕은 신도 못 신은채 맨발로 울면서 기드론 시냇가를 건넌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사는게 사는게 아니다. 어찌하다가 이런 지경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다시 평탄한데에 세워 주셨다. 시간이 흐르자. 반역자들은 더 이상 그의 눈에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다윗은 울고 또 울었다. 인간의 정을 가지고 아버지의 부정을 끌어 앉고 아들 압살롬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울고 또 울었다.

 

“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삼하18:33)

 

그렇게 세월은 다시 흘러갔다. 슬픔과 허망함 속에 다윗의 마음 속에는 다시 평탄한 데 서 있는 자와 같은 믿어지지 않는 고요가 찾아왔다. 다윗은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라면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다는 것을. 다윗은 깨달았다. 내 삶을 평탄하게 하는 것이 나의 힘과 의지가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지금 다윗은 기도하고 있다.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소서. 여호와여 나를 시험하소서. 여호와여 나의 뜻과 양심을 단련하소서. 여호와여 나의 죄를 사해 주소서.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로 하여금 악한 무리들 가운데서 다시금 주를 송축하게 하소서”라고 말이다. 시작된 새달, 9월, 가을의 문턱에서 믿음의 열매를 두 손에 가득히 거두는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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