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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욥과 하나님(욥1:1, 20-22; 2:1-3) 2019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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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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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9-07-16 15:12 조회 10,111 댓글 0
 
                         욥과 하나님(욥1:1, 20-22;  2:1-3)        2019. 6. 3
 

전주 예수 병원은 1907년에 토마스 다니엘 선교사에 의해 개원되었다. 그 곳에서 동역하던 선교사 한 분이 본국인 미국에 돌아가서 안식년을 지내고 있었다. 미국이 한 작은 시골 마을의 조그마한 교회에서 몇십명 정도 모이는 성도들과 함께 지내며 사역을 하던 중에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남편 없이 두 아들을 키우던 한 가정의 큰 아들이 마을 앞 물가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익사하고 말았다. 그 같은 날 그 집에 불이 나서 집안에 있던 아들이 연기에 질식되고 불에 타 죽고 말았다. 한 날 두 아들을 모두 다 잃은 어머니는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 교회에서 슬픈 장례식을 행하고 있었다. 선교사는 겨우 몸을 가누며 힘겹게 장례식에 서서 슬퍼하는 그 가정의 어머니에게 물었다. “당신은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명의 공급자이시고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할 수도 있습니다.” 그 어머니는 떨리는 작은 소리를 대답하였다. “저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두 아들의 생명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두 아들의 생명을 불러 가신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교회에 모인 온 마을 사람들은 이 슬픈 장례식을 정성을 다하여 진행하며 홀로 남은 어머니를 위로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난주일 이후 우리 각 사람의 생애에 가장 슬프고, 가장 안타깝고, 가장 마음 무겁고, 가장 착잡한 시간을 지내며 다시 주일날을 맞았다. 믿어지지 않는 현실 앞에 우리 각 사람은 참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 생명의 죽음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하루라는 시간의 가치와 지금 나에게 주어져 있는 이 생명의 존귀함과 영혼 사랑의 사명에 대하여 큰 목소리로 교훈해 주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성경의 선언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하나님 안에서 의롭게, 하나님 안에서 선하게 살아가려는 믿음의 사람들도 적지 않다. 우리는 그 선하게 살아가려 하는 이들이 당하는 고난과 시련에 대하여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왜 의롭게 살아가려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고난이 있는가 말이다. 

우리는 성경의 인물들 중에서 욥을 기억한다. 그의 신앙, 그가 겪은 고난과 시련, 그의 고난 극복 과정 등등이 예사롭지 않다. 욥은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이었지만 그의 삶은 남달랐다. 욥이 누구인가. 욥의 이름 뜻은 “핍박 받는 자, 증오 받는 자, 돌이키다, 뉘우치다”라는 다양한 뜻이 있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질문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지 않나. “하나님 아버지가 과연 살아계시고, 하나님 아버지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라면 욥과 같은 인물에게 그런 고난이 겹겹이 닥치도록 하나님은 과연 어디에서 무얼 하고 계셨단 말인가.” 욥기의 내용을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런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욥처럼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을 경건하게 섬기던 사람에게 왜 그런 참담한 고난이 닥치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욥이 그런 어려움을 겪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은 과연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 그런 질문을 누구나 갖게 된다.

올 4월 21일, 부활절 오전에 스리랑카 수도인 콜롬보에서는 교회에서 부활절 예배를 드리던 신자들을 포함해서 교회, 호텔 등지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벌어진 폭탄 테러로 인해서 258명이 순식간에 죽었다. 우리는 그런 죽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것도 다른 날이 아닌 부활주일 예배를 드리던 예배당 안에서 일어난 테러로 죽었으니 말이다. 스리랑카의 시리세나 대통령은 국가적으로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스리랑카 정부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이라고 범인들을 추정하여 발표하였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별의 별 충격적인 일들과 슬픈 일들과 고통스러운 일들의 소식을 접한다. 그러나 대개는 바다 건너 먼 나라의 일, 혹은 강 건너 남의 동네의 일로 여기는 경우가 없지 않다. 

우리 모두는 큰 슬픔 가운데 한 주간을 지냈다. “왜 하필 우리입니까. 왜 하필 우리 가정입니까. 왜 하필 우리에게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하고 밤이 깊도록 하나님께 질문하고 또 질문하여도 하나님은 침묵하실 뿐이다. 

주일을 맞았지만 예배드리기조차 힘겹고 말씀을 전하기란 더욱 더 힘겨운 이 아침에 욥기의 말씀을 조금 묵상하려고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던 욥.
욥은 온전하고 정직한 자였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다. 욥기 2장 3절에 보면 하나님도 사탄에게 욥의 신앙의 면모를 인정하셨다.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2:3)

“욥이 과연 역사의 실존인물이냐 아니냐”하는 질문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성경학자들은 욥은 족장 시대의 실존인물이라고 말한다. 아브라함 때를 전후한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여긴다. 욥은 지금으로부터 4000여 년 전의 인물이다. 욥은 가나안 가까이의 ‘우스’ 땅에서 살았다. 욥은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으로 살던 자였다.

그는 부자였다. 양과 낙타와 소와 나귀가 넘쳐났다. 엄청난 짐승을 목축하던 대 족장이었다. 그 모든 목축 일을 돌보고 집안일을 돌보는 종들도 많았다. 3절 끝에 보면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는 평을 받을 정도였다. 그는 자녀도 많았다. 아들이 일곱 명이고 딸이 세 명이었다. 자녀들은 형제자매간에 의리도 좋았다. 십남매가 서로의 생일날이면 늘 서로를 초대하고 풍성하게 잔치를 벌이고 사이좋게 지냈다. 

아버지 욥은 그렇게 살아가는 아들딸들이 생일잔치를 벌이며 혹시라도 하나님 앞에 무슨 범죄가 있을까봐 아들딸들을 일일이 불러다가 성결(聖潔)하게 하였다. 다음 날 아침이면 아들딸의 숫자를 맞추어서 번제(燔祭)를 드렸다. 

생각하여 보라. 재산 많고 아들 일곱에 딸 셋을 두었다. 자식들이 서로 간에 형제자매 우애도 깊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욥을 동방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자타가 인정할 정도였다. 게다가 하나님을 잘 경외하며 살아간다.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우리 모두의 기대와 소망이 아닌가. 재산 넉넉하고 자녀들이 십남매나 되고 아들딸들이 서로 화목하게 살아가고 욥 자신은 사회적으로 덕망이 있어서 존경받고 인정받으며 살고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는 그의 모습은 우리가 소망하는 이 시대의 꿈과 같은 모습이 아닌가. 

우린 대개가 이런 꿈을 품고 기도하고 노력하고 수고하고 열심히 살아간다. 공부도 그래서 하고 직장 생활이나 사업이나 상업이나 그 어떤 일도 그런 꿈을 갖고 한다. 부자가 되길 원하고 돈 걱정 없이 마음껏 쓰며 살고 싶어 한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게 되면 아들 딸 하나 겨우 낳아서 쩔쩔 매며 키우는 것이 아니라 욥처럼 열 명의 아들딸을 낳아 키우고 학비 걱정 없이 마음껏 후원해서 열방 가운데 국제적으로 유능하고 훌륭한 자녀들로 키워 내고 싶어 한다. 

그런데 어떤가. 지금 욥기의 주인공이 그런 성취와 업적과 응답 속에 살아가고 있지 않나. 게다가 사람이 온전하고 정직하고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잘 경외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이 얼마나 부럽고 본 받을 만한가. 


욥이 당한 재난과 시련.
그런 욥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재난에 휩싸이고 말았다. 욥기 내용을 아시는 분들은 그 내용을 아는 대로 욥의 이런 신앙적인 모습은 42장 분량의 앞부분인 욥기 1장 1-5절에서 나올 뿐이다. 1장 6절부터는 소위 천상회의(天上會議)라는 것이 열린다. 천상회의에 참석한 사탄이 하나님 앞에서 지상의 욥에 대하여 언급한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이 땅에 욥과 같은 훌륭한 인물은 욥 한 사람 밖에 없다”고 칭찬한다. 그런데 사탄이 이의를 제기한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욥1:9) 사탄은 계속하여 하나님께 말한다. “욥이 그 정도 복을 받고 살아가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것이지 그의 소유를 치면 그 때도 하나님을 그렇게 잘 경외하며 살 것 같냐”,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하고 말하며 욥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신뢰를 흔들려고 도전 하였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 날 이후 욥은 그 많던 재산을 다 잃었다. 일곱 아들과 세 딸은 큰 아들 집에서 잔치를 벌이다가 큰 바람이 불어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한 자리에서 다 죽었다. 

이러한 비보(悲報)를 전해들은 욥은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렸다. 성경을 읽다가 보면 욥기 1장 20절에서 눈길이 멈추게 된다. 그 어마 어마하던 재산을 다 잃고 그 자랑스럽던 십남매가 한 자리에서 다 죽은 소식을 들은 욥이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린 것은 이해가 된다. 참담한 슬픔과 충격을 표현하는 말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 다음 표현에 보면 “욥이..... 예배하며”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우리의 눈을 의심하게 된다. 아니 이 지경, 이 형편, 이 슬픔, 이 충격, 이 엄청난 불행과 재난 앞에 어떻게 욥은 예배가 가능하였을까 하는 의심이 들게 된다.  

그 믿어지지 않는 슬픔과 충격의 비보를 접한 욥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며 이런 기도를 드렸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욥은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었다. “그런데 욥은 어떻게 재산 다 날아가 빈털털이가 되고 열 자식 다 한 날 한 자리에서 죽은 비보를 접한 자리에서도 이런 예배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단 말인가.” 하고 의심하게 된다. 

욥이 세상을 살아가며 하나님을 경외하던 이야기와 욥이 그런 극심한 재난을 겪은 이야기와 욥을 찾아 온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욥에게 건넨 말들과 욥이 대답한 말들이 사천 년 전부터 그 주변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또 전해져 왔다고 한다. 그런 욥에게 엘리후가 등장하여 한 말들과 하나님이 직접 나서셔서 욥에게 해 준 말들도 역사에 일천년 간 전해져 왔다. 그렇게 해서 욥이 이 땅을 떠나간 천 년 후인 오늘 날로부터 3000년 전에 기록된 것이 욥기이다. 

나중에는 욥이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복을 받아 이전보다 갑절이나 더 많은 육축을 거느리고 아들 일곱 딸 셋을 다시 또 낳아 키우며 140년을 이 땅에서 아들 딸 손자들이 번성하는 걸 보았다. 욥기의 끝은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욥42:17)이다. 아무리 해피 앤딩이라지만 이런 질곡 많은 인생을 원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욥의 이런 나중 생도 사실이다. 이는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별의 별 슬픔과 고난과 시련과 심지어는 재난을 겪을지라도 성도의 그 나중 상급은 하나님 안에서 복되고 영원하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하나님은 욥의 생애의 기록을 통해서 고난 많은 날들을 살아가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길 원하셨다. 우리가 욥기를 겸비한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욥기의 주인공은 결코 욥이 아니다. 욥기는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말씀하는 성경의 한 부분이다. 우리는 욥기에서 욥의 고난 많은 생이나 욥이 겪은 재난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여전한 손길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욥의 고난과 처절한 절규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숨김없이 진솔한 한 인간의 모습을 대하게 된다. 욥기 3장에 보면 욥이 자신의 삶을 저주하고 탄식하는 내용이 3장 전체의 내용이다. 욥은 자신이 “태어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차라리 나았겠다”고 탄식한다. “내가 두려워하는 그 것이 내게 임하였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나에게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욥3:25-26)라고 절규한다. 

지금 욥이 그 많던 재산 달 날아가고 열 자식 다 죽고 자기 몸도 병들어 질그릇 조각으로 긁어도 시원하지 않는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내게 되었다. 재산 잃고 열 자식 다 잃은 욥의 몸에 병까지 찾아 와서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성한 데가 없었다. 

욥의 아내는 자랑스럽던 남편의 재산이 다 사라지고 믿음직스럽던 일곱 아들과 세 딸이 한 날 한 자리에서 다 죽은 비운을 겪은 후에 하루하루 사는게 사는게 아니었다. 게다가 남편 욥은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병들어서 다 죽어 가는 신세가 되었다. 이쯤 되면 어느 부인이 제 정신으로 세상을 이기며 살 수 있겠나. 그런 참담한 몰골의 병든 남편 욥을 바라보던 욥의 아내가 남편에게 쏘아 붙였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2:9)

이 때까지만 해도 욥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그리고는 욥은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다.

요즘 우리도 마찬가지다. 이런 이해 할 수 없는 일을 겪으며 지내야 하는 우리 모두는 가능하면 입술로 범죄하지 않도록 될 수 있으면 침묵하며 지내야만 할 것이다. 

욥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와 같은 인물이다. 그렇지 않나. 이 세상 그 어디에서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되 악에서 떠난 자”를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욥은 달랐다. 그런 욥의 모습 속에서 이 땅에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떠 올리게 한다. 뿐만 아니라 이유 없이 당하는 욥의 고난은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겪으신 온갖 수모와 고통과 십자가 처형을 연상하게 한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워 기도하시던 예수께서 다음 날 새벽에 붙잡히셨고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로 끌려 가셨다. 예수께서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심문을 당하셨다. 마태복음 26장 67절에 보면,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렸다.”

하나님 잘 섬기고 온전하고 정직하게 살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삶을 살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동방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란 평을 받던 욥으로 하면 어찌 그런 재난과 슬픔을 겪어야 했단 말인가. 그렇지 않나. 욥이 그런 재난을 겪어야 할 하등의 무슨 큰 잘못이라도 있단 말인가.

이것은 어려운 말로 하면 ‘신정론(神正論)’의 바탕이다. 신정론이 무엇인가. “과연 하나님은 계신가. 과연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가. 과연 하나님은 무소부재 하신가. 과연 하나님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나. 과연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신가.”라는 끝이 없는 질문 앞에 ‘그렇다.’라고 대답하게 하는 것이 신정론이다. 

우리는 아무리 42장 분량의 욥기를 읽고 또 읽어도 하나님 앞에서 아무 할 말이 없다. 욥의 고백이 맞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다.” 욥의 고백처럼 여호와는 언제라도 찬송을 받으셔야만 한다.

우리는 욥의 아내의 요구처럼 하나님을 욕하고 죽을 권한이 없다. 그 어떤 불행한 일을 겪는다고 해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 버릴 권한이 인간에게는 없다. 생명과 사망, 화와 복, 죽음과 영생이 모두 다 여호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나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오늘, 지금 나로 하여금 여전히 숨 쉬며 살아 있게 하시는 분도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생명과 죽음은 그 분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욥에게서 배우는 여호와 신앙.
욥이 당한 슬픈 소식을 듣고 그의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차례로 찾아온다. 욥기 4장부터 31장까지 엄청난 분량의 내용은 그 대화를 담고 있다. 그 내용은 대단히 산문체적이고 논리적이다. 많은 분량의 친구의 말들이 오히려 도움이 되기는커녕 욥의 마음에 더 큰 상처만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중간 중간 욥의 대답하는 말을 들여다보면 과연 욥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인물이었나를 알 수 있게 한다.

가령 욥기 6장 9절 이하에 친구 엘리바스와의 대화에에서 말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 나를 끊어 버리실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욥6:8-9)

이런 대답을 하기 전에 친구 엘리바스가 찾아 와서 욥에게 이런 말을 한다.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신다. 여섯 일곱가지 환란과 재앙에서도 너를 구원하시고 그 재앙이 미치지 않게 하실거야”

이게 슬픔 당한 친구 욥에게 할 말인가. 고작 친구랍시고 와서 하는 말이 이 정도인가. 지금 욥은 재산 다 날아가고 열 자식 다 하루에 죽고 자기 몸이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피부가 병들어 피 범벅이 되어 있는데 이런 위로의 말이 욥의 귀에 들리겠나. 그런데 그런 친구들의 말을 듣고도 욥은 대답한다. 

나중에는 엘리후가 등장한다. 엘리후란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다”란 이름 뜻을 갖고 있다. 나중에는 여호와가 폭풍우 가운데서 직접 욥에게 나타나 말씀하신다. 우주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그 가운데 모든 생명을 다루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의 장엄하고 섬세한 말씀이 이어진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 듣고 난 욥이 대답한다. “내가 주께 다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42:5) 욥은 그 후에 티끌과 재 가운데 앉아서 회개하기 시작한다. 

욥기의 끝 부분은 42장 7-17절의 내용은 이 슬프고 험한 세상을 살던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이끌려 올라가는 듯한 장면을 묘사하고 끝이 난다. 기도하는 욥, 욥을 곤경에서 돌이켜 주시는 하나님, 모여든 친척들과 음식을 먹고 욥이 겪은 재앙에 대하여 지난날을 이야기 하며 당한 슬픔을 같이 슬퍼하고 서로를 위로한다.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셨다”

140년을 더 살다가 죽어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이게 욥기의 끝이다. 

피신 다니던 다윗은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체 하다가 쫒겨 난 후에 이런 고백을 하였다. 다윗의 시편인 시34:18-19절에 보면 다윗은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슬픔 많고 사고와 사건과 질병과 죽음의 무거운 장막이 짓 눌고 있는 이 세상에서 무엇이 복인가. 그래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사는 것이 복이 아닐까. 주님의 한량없는 위로가 매 순간마다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을 붙들어 주시길 간절히 소망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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