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새의 줄기에서 나신 이(사11:1-10) 20251221 본문 이새의 줄기에서 나신 이(사11:1-10) 2025. 12. 21 성탄절이 나흘 앞으로 다가 왔다. 성탄의 주제는 기다림이다.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탄생하신 날을 기념하는 날이 성탄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궁에서 왕자로 태어난 분이 아니시다. 그는 왕족도 아니요, 장군의 아들도 아니요, 재벌의 아들도 아니다. 그는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났다. 결혼을 준비하던 나사렛 마을의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태어났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남편 될 요셉은 아들 예수의 태어날 곳 조차 준비하지 못했었다. 호적 하기 위해서 방문했던 요셉의 조상의 마을이 베들레헴이다. 아기 낳을 방을 마련하지 못하게 되자 서둘러서 찾아 들어간 곳이 마구간이었다. 양과 염소와 소를 가두는 곳이었다. 낳은 아기를 강보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이사야 11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하고 있다. 그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으로 날 것이고, 이새의 뿌리에서 한 가지로 나서 결실할 것이라”라고 하였다. 왜 다윗의 줄기라고 하지 않고 이새의 줄기라고 하였을까. 이새가 누구인가. 다윗의 아버지이다. 다윗은 유명하지만 이새는 유명하지 못했다. 이새가 누구인가. 오벳의 아들이다. 오벳이 누구인가. 다문화 가정을 이루었던 모압의 홀로 된 여인 룻이 시댁 마을인 베들레헴에서 만난 보아스를 통해서 낳은 아들이다. 다윗의 증조할머니 룻은 다문화 가정에서 오벳을 낳아 키웠다. 오늘 날도 다문화 가정을 꾸려 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3,000년 전, 유대 민족 한 중심에서 이방 여인인 모압 여자가 그것도 남편을 사별한 적이 있는 이방 여인이 유대인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룬 것이다. 기적이다. 놀라운 일이다. 얼마나 동네 사람들이 말이 많았겠나. 얼마나 일가 친척들의 반대가 심했겠나. 얼마나 주변에서 수근거렸겠나. 그러나 보아스는 모압 여인 룻을 아내로 맞아 오벳을 낳았다. 보아스는 누구인가. 보아스의 아버지 살몬은 광야의 정탐꾼이었다. 때가 되어 여호수아 때에 요단 강을 육지처럼 건넜다. 여리고 성 함락 전쟁이 시작되었다. 살몬은 지난번 정탐꾼으로 여리고성을 둘러 볼때에 만났던 기생 사합과 그의 가족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 그리고 나중에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말이 기생이지 몸을 팔던 주막집 여인이었다. 그러고 보니 보아스도 다문화 가정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런 보아스조차도 다문화 가정을 이루고 아들 오벳을 낳았다.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가정이다. 그런 보잘 것 없는 줄기에서 싹이 났다. 그런 초라한 뿌리에서 결실하였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으로 태어나고, 이새의 뿌리에서 한 가지로 태어난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렇게 태어나셨다. 보잘것이 없고 초라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 이사야 53장 2절에 보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하였다. 과거나 오늘 날이나 우리는 얼마나 외모에 치중하나. 그래서 예수님의 성화도 한결같이 멋있게 생긴 서양 남성의 모습으로 그리고는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2,000년 전의 유대 남자들의 모습은 그렇게 주변 사람들로부터 시선을 끌만한 외모가 아니었다. 실로 예수님의 외모는 마른 땅에서 나온 보잘 것 없는 뿌리와 같았다. 그에게는 고운 모양이 없었다. 그는 풍채도 우람하지 못했다. 누가 봐도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외모가 아니었다. 그러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여호와의 영이 강림하신 이. 우리는 성탄절을 기다리는 4주간을 강림절로 지킨다. 강림이란 뜻이 무엇인가. 내려 왔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 오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몸만 내려 오신 것이 아니다. 그 위에 비둘기와 같은 성령이 임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요 기뻐하시는 아들로서 하나님의 영의 충만함을 입고 내려 오신 것이다. 하나님의 영의 임재가 아니라면 예수님은 그냥 나사렛 마리아가 낳은 유대인 가정의 평범한 아기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잉태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로 태었났다. 하나님의 아들로 보호 받으며 자라났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천하 만민이 알게 되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받아 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신성 모독이라고 비난했다.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예수님 안에는 항상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였다. 빌립보서 2장 6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라”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권능이 예수님 안에 충만하셨다. 예수님께 임한 여호와의 영은 지혜와 총명의 영이었다. 모략과 재능의 영이었다.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었다. 하나님의 영에 충만하신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가난한 자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이 되었다. 마음이 상한 자의 마음에 회복과 치유와 평안이 임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가 임했다. 갇힌 자가 풀려 났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곳마다에서 모든 슬픈 자를 위로 하셨다. 예수님은 슬퍼하는 자의 슬픔을 거두어 주시고 화관을 그 머리에 쓰게 해 주셨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해 주셨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이사야 35장을 묵상하였다. 보지 못하는 사람이 보게 되고 못 듣던 사람이 듣게 되고 못 걷던 사람이 걷게 되고 말 못하던 사람이 노래하고 찬양하게 된다고 하였다. 주일 오후부터 일 주일 내내 생각하였다. 예수 믿는 다고 못 보던 사람의 눈이 다 떠지나. 못 듣던 사람, 못 말하던 사람이 듣게 되고 말하게 되나. 못 걷던 사람이 걷 뛰게 된다는 말인가. 라고 계속하여 질문하며 지냈다. 물론 예수님 때에 그런 기적들이 있었다. 지난 2000년 교회 역사에 그런 기적들이 없지 않다. 많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장애를 가진 이들이 다 고침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사야 35장의 이 말씀은 무슨 약속일까. 하고 고민하며 한 주긴을 지냈다. 그런던 중에 우연히 두 사람의 삶을 접하게 되었다. 한 사람은 미국 버클리 음악대학교의 교수인 김치국 교수다. 1982년 생이다. 올해 43살이다. 태어 날 때부터 심장 질환이 있었다. 엄마는 아들이 숨을 헐떡거리고 숨이 넘어갈 때마다 병원으로 업고 달렸다. 3살 때에 심장 수술 중에 산소 과다 공급으로 각막에 심각한 손상이 왔다. 양쪽 눈을 실명하게 되었다. 심장 병을 고쳐서 목숨은 건졌는데 알을 못보게 되었다. 의사와 하나님께 원망이 쏟아졌다. 기도원에 가서 울며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이런 마음을 주셨다. “언제는 아들이 심장병으로 죽을 것 같아서 걱정하고 불안해 하더니 심장 병 낳은 후에 앞을 못 보는 것 때문에 원망하느냐” 이런 깨달음 후에 원망이 사라졌다. 지극 정성으로 아들을 돌보았다. 어려서부터 음악의 재능이 남 달랐다. 피아노도 너무 잘쳤다. 이미 초등학교 때에 예배 찬송가 반주를 할 정도였다. 초등학교 때 전국 피아노 대회에 나가서 우승하였다. 하루는 엄마와 기도원에 갔는데 밤 집회 시간에 정전이 되었다. 찬송가 반주자가 반주를 멈추었다. 그런데 어린 치국이가 대신 피아노 앞에 앉더니 악보도 보이지 않는데 너무나도 은혜롭게 찬송을 반주하였다. 깜깜한 기도원에 피아노 소리가 가득하였다. 기도원 참석자들이 은혜의 찬양을 불렀다. “그날 밤 기도원에서 난생 처음으로 황홀함을 경험하였다. 어둠이 나에게는 빛이었다.”라고 고백하였다. 가난한 형편이지만 고등학교 때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영어 테이프를 들으며 피나는 열심을 다하여 공부하였다. 보스턴 버클리 음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점자 타자기를 사용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어려운 작곡, 편곡에 매진하였다. 실용 음악을 전공하였다. 건강한 남들보다 숙제를 해 가려면 몇 배 시간이 더 걸렸다. 밤을 새워 가며 노력하였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뉴욕 대학원에서 음악 기술, 영화 음악 전공을 계속하였다. 지금은 버클리 음대의 뮤직 데라피(Music Therapy) 전임 교수이다. 여러 나라에서 모인 시각 장애를 가진 우수한 음악 인재들을 가르치는 교수이다. 버클리 음대 로져 브라운 총장은 “그는 이 시대의 헬렌 켈러를 키워 내는 셜리번과 같습니다.”라고 극찬하였다. 그는 말한다. “저는 언제나 문제를 보지 않고 해법에 주목합니다. 문제는 언제나 저를 긍정적으로 이끌어 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도움의 손길을 만나게 해 주십니다. 저는 어둠을 보지 않고 빛을 봅니다. 그러므로 저는 언제나 어둠을 이길 수 있습니다. 제 꿈은 항상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저와 여러분의 꿈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이런 멋진 말을 전하고 있다. 드라마의 대사를 접하면 천재적인 능력으로 감동적인 OST를 작곡해 낸다. 또 다른 한 사람을 접하였다. 차인홍(1958-) 교수는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음악대학의교수이다. 대전의 달동네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9살에 재활원에 맡겨졌다. 평생 제 발로 걸어 본 적이 없다 휠체어가 없이는 아무데도 갈 수가 없다. 재활원에 와서 봉사 활동을 하시는 여선생님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게 되었다. 집이 가난해서 어렵게 어렵게 부모님이 마련해 주신 그 당시 5,000원짜리 바이올린을 손에 들게 되었다. 방바닥에 악보를 펴 놓고 재활원 방 한 귀퉁이에서 날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였다. 23살 때 까지 초중고등학교를 가 본적이 없다. 중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쳤다. 그런 그에게 미국 유학길이 열렸다. 뉴욕 브르클린 음악 아카데미에서 공부하였다. 대전시립교향악단 악장으로 있었다. 다시 유학 길에 올라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 라이트 음대 교수이며 오케스트라 지휘자이다. 83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뚫고 음대 교수가 되고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하신 것처럼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는 생활이다. 주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라고 약속해 주셨다.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성령 충만한 나날이 되기를 소망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이. 예수님은 평생토록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들의 삶을 사셨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증거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기대에 순종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언제는 공의로 심판하시고 정의로 판단하셨다. 에수님을 불의와 거짓을 멀리하시고 정직으로 세상을 판단하셨다. 예수님은 겸손한 자를 주목하셨다. 교만하고 거만한 자를 멀리하셨다. 예수님은 불의와 악을 눈 감아 주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말씀의 막대기로 세상을 판단하셨다. 말씀의 기운으로 악인을 심판하셨다. “공의로 그의 허리 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11:5)라는 말씀의 무슨 뜻인가. 예수님은 공의와 성실 그 자체이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불의와 거짓과 타협하는 분이 아니셨다. 마가복음 6장 14절 이하에 보면 세례 요한이 헤롯을 옳지 않다고 책망하였다. 헤롯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아서 자기 부인 삼고 살았다. 세례 요한이 이를 옳지 않다고 비판하였다. 오히려 헤로디아가 앞장서서 세례 요한을 원수로 여기고 죽이려고 하였다. 때가 왔다. 헤롯의 생일잔치가 벌어졌다. 왕의 대신과 천부장과 귀인들이 다 모였다. 헤로디아의 딸이 하객들 사이에서 춤을 추었다. 술래 취한 헤롯은 “무엇이든 원하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라고 말했다. 헤로디아의 딸은 엄마 헤로디아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였다. 딸은 왕에게 달려 가서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달라”고 요구하였다. 시위병들은 왕의 요구대로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서 소반에 담아 가지고 나왔다. 누가복음 13장 32절에 보면 예수님도 헤롯을 여우라고 책망하셨다. 생각하여 보라. 역사의 그 어느 누가 헤롯을 위대하다고 말하거나 훌륭하다고 말하나. 그러나 생각하여 보라. 기독교 2천년 역사 가운데 세례 요한이 누구인가. 인생은 역사가 말하고 후대가 말하는 것이다. 지금 얼마나 세상 권력과 명예를 누리며 살아가느냐가 뭐가 그렇게 대단한 문제인가. 이스라엘 역사에 42명의 왕들 중에서 가장 장기 집권한 왕은 남 왕조 유다의 제 14대 왕이었던 므낫세이다. 12살에 왕이 되어 55년 동안 왕 노릇했다. 그러나 성경은 열왕기하 21장 2절에서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라는 짧은 말씀으로 그의 긴긴 왕 노릇을 평가하고 있다. 그렇지 않나. 100년을 왕 노릇하고, 1000년을 왕노릇하면 뭘 하나.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다 하면 악한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세상 임금의 비유를 맞추고 세상 권력을 탐하는 분이 아니셨다. 예수께서는 그를 임금 삼으려고 몰려드는 벳세대 광야의 오병이어로 배 부르게 된 무리를 피하여 산에 가셔서 기도하셨다. 권력의 끝은 초라해지는 것이다. 권력의 끝은 망하는 길이다.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9:23-24)라고 말씀하셨다. 신명기 10장 12절 이하에 보면 모세는 분명하게 선포하였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10:12-13) 에수님은 평생토록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셨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시는 것이 예수님의 생의 목적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증거를 보여 주셨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증거의 열매였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라고 고백하였다. 성탄절이 다가 오고 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공의와 정직과 겸손과 성실로 띠를 띠고 살아가신 주님을 본 받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열방을 영화롭게 하는 이. 10절 말씀에 보면, 그 날이 되면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으로 나신 그 분은 만민의 기치로 우뚝 설 것이라고 하였다. 열방이 그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거하는 곳마다 영화로워질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예수님의 이름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런 일들이 계속되었다. 계속되고 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곳마다에서 이런 이들이 벌어지고 있다. 세계 처처에서 복음의 역사와 기적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이사야서 11장의 6-9절 말씀을 기억한다. 생각하여 보라. 맹수인 이리가 어떻게 어린 양과 함께 살수 있을까. 맹수인 표범이 어떻게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울 수 있을까. 송아지와 어린 사자가 어떻게 함께 지내며 어린 아이의 이끌림을 받을 수 있을까. 암소와 곰이 어떻게 함께 먹을 수 있을까. 그것들의 새끼가 어떻게 함께 엎드릴 수 있을까.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 날이 올까.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치고 독사의 굴에 손을 넣는 젖 먹는 아이, 젖 뗀 어린 아이는 과연 누구일까. 9절은 선포한다. “그 때가 되면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라고 하였다. 10절과 11절이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다. “그 날에”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이는 “나는 생명의 물이니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마다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열방에 복음의 거룩한 회복과 치유의 역사가 생명력이 넘치게 계속될 것을 예언적으로 하신 말씀이다. 신앙 생활이란 그 날과 그 때를 믿고 기다리며 준행하는 생활이다. 허황된 것이 아니다. 허무한 것이 아니다. 맹목적인 것도 아니다. 현세 도피적인 것도 아니다. 그 날과 그 때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한 것이다. 때가 되면 봄이 오고 때가 되면 여름이 오고 때가 되면 결실하는 것처럼 주님은 시간과 역사의 주인이시다. 성탄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그 날과 그 때의 주인이신 것을 깨닫게 해 주는 절기이다. 때가 되어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 그 날이 되어 이 땅이 열방 끝까지 영화로워지는 기사와 이적이 계속되고 있다. 복음을 믿으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라. 열방의 구석 구석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일을 주목하라. 오대양 육대주 처처에서 젊은이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찬양한다. 헌신을 결단한다. 하나님은 때마다 일마다 준비된 하나님의 사람들을 동원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 고개를 들어 추수할 들판을 바라 보아야 한다. 그리고 공의의 허리 띠를 동여매고 성실로 그 몸에 띠를 견고하게 매고 추수의 현장에 나서야 한다. 1700년대는 독일에서 기독교가 탄압을 받던 시기였다. 1618년부터 1648년까지 30년 전쟁으로 800만명이 죽었다. 신구교의 기독교 종교 전쟁이었다. 유럽 전역에 번진 흑사병으로 인해서 600만명이 죽었다. 그 당시 독일 인구 1600만명 중에서 600만명이 죽은 것이다. 벤쟈민 슈몰크 목사는 36개 마을을 돌면서 교회를 돌보았다. 통나무로 예배당을 짓던 때이다. 벤쟈민 슈몰크(Benjamin Schmolck, 1672-1737) 목사님 부부가 먼 마을에 교우 가정에 심방을 간 사이에 마을에 불이 났다. 목사관도 불이 났다. 두 아들이 서로 부둥켜 안고 불에 타 죽었다. 두 아들이 시체가 숯덩이가 되어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견딜 수 없는 충격과 슬픔과 시련 앞에서 눈물을 흘리다가 이런 고백을 남겼다. 나중에 그 고백에 곡이 붙여졌고 우리 찬송가에도 실리게 되었다. 549장, <내 주여 뜻대로>라는 찬송가이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성탄절은 우리 각 사람을 향하신 주님의 뜻을 찾는 절기이다. 내 맘대로, 내 뜻대로, 내 주장대로, 내 고집대로, 내 취향대로, 내 방법대로, 내 하고 싶은대로 하려고 신앙 생활하는게 아니다. 신앙생활의 바탕은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을 깨달아 가는 여정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나. 사울의 목표대로라며 다메섹 성 안에 들어가서 예수 믿는 이들을 색출해서 끌어다 죽이는 일이 가능했어야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메섹 성 가까이 다가가는 사울에게 강한 빛을 비추셨다. 사울은 그를 태우고 가던 짐승의 잔등에서 땅에 떨어졌다. 앞이 보이질 않았다.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나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 성 안에 들어갔다. 직가의 유다라는 사람의 집에 머물렀다. 사흘 동안 앞을 못 보았다. 아나니아라는 선지자를 보내셨다. 저가 안수 할 때에 삼일 만에 눈이 보이게 되었다. 안수 받을 때에 성령이 임했다. 사울은 그 날부터 다메섹 성 안에 다니며 예수의 부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시작해서 바울은 순교하기 까지 예수의 부활 복음을 전파하는 이방의 전도자가 되었다. 이 소문을 전해 들은 다메섹 성에 살던 유대인들이 당혹스러워 했다. 며칠 후에 유대인들은 서로 모의해서 사울을 죽여 없애려고 하였다. 사울은 밤 중에 그를 도와 주는 제자들의 도움으로 다메섹 성벽에 큰 광주리를 매달아서 그것을 타고 성 밖으로 도망쳤다. 이렇게 시작된 사도 바울의 선교는 동서 사방으로 불길처럼 번져갔다. 오늘 날 오대양 육대주의 열방 선교의 시작은 사도 바울을 비롯한 12제자들의 순교적인 헌신의 열매이다. 지난 2,000년의 교회 역사가 그러하고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오늘 날도 열방 가운데 처처에서 예수의 이름이 선포되는 곳마다 주님은 그 땅을 영화로운 땅으로 변화시켜 가고 계시다. 이 성탄의 기쁜 구원의 소식이 지구촌의 구석 구석까지 임하기를 기도하자. 이러한 선교에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자. 주님이 기뻐하시고 기억하시고 영광의 면류관을 예비해 주실 것이다. 아멘 예수사랑 조회 8회 2025-12-22 17:14 목록 댓글목록 다음글 속량(贖良) 받은 자들(사35:1-10) 20251214 25.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