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기독교대한감리회 예수사랑교회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사2:1-5) 20251130

본문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사2:1-5)      2025. 11. 30



이사야 2장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룩하신 그 놀라운 영광과 크신 권세에 대하여 예언하는 말씀을 담고 있다. 2절에서 말씀하는 ‘말일’이란 한 시대를 마감하는 종말적 개념을 담고 있는 표현이다. 이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초림으로부터 부활 후 승천하시며 약속하신 재림의 때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 이는 사도행전 2장의 베드로의 성령 받은 후의 설교 중에 인용했던 요엘서 2장 28절 이하에 나오는 표현 중의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라는 내용에 인용된 ‘말세’라는 그 표현과 같은 의미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때가 바로 그런 기간 중의 한 때이다. 히브리서 1장 2절에서는 “이 모든 날 마지막에”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 아버지는 시간과 때의 주인이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 주셨다. 하나님은 이 땅에 많고 많은 산들 중에서 예루살렘성이 있는 그 산을 구별하셨다.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의 본문 내용은 1절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전한 남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이다. 하나님은 여호와의 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서게 하실 것이며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 나게 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다. 사해 동편 28km 정도 거리에 위치한 예루살렘성이 위치한 예루살렘 산은 유대아 산맥 줄기의 한 부분으로 해발 780m 정도이다. 동쪽의 기드론 골짜기와 서쪽의 기혼 골짜기 그리고 남쪽의 힌놈 골짜기 사이에 우뚝 솟은 예루살렘 산 정상에 성곽을 쌓고 사람이 살기 시작한 역사는 오늘날로부터 약 5,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의 성곽은 주후 1538년 오토만 제국이 다스리던 때에 슐레이만에 의해서 건축되었다. 전체 성곽의 둘레가 4.5km에 이른다. 예수님 때에는 6만에서 8만명 정도의 인구가 살았다. 다윗 왕 때에는 불과 2,000명 정도가 성 안에 살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서게 하실 것이고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 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게 무슨 말씀일까. 산이 높기로 하면 히말라야 산맥의 8844m인 에베레스트와 비교하겠는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예루살렘 산이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이룩하실 말씀의 역사를 언급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만방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말씀하는 여호와의 전이 있는 산 즉 예루살렘이란 오늘 날로 하면 교회를 의미한다. 우리는 2,000년 기독교의 역사를 지닌 나라와 도시를 방문하면 500년 전, 혹은 1,000년 전에 찬란했던 기독교 역사의 흔적인 예배당을 방문한다. 물론 종교 개혁 이전의 예배당들은 대개가 가톨릭의 성당 건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시대마다 교회의 예배당을 중심으로 예배하는 성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시려는 일을 이루어 오셨다. 


왜 여호와의 산에 올라야 하는가. 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러야 하는가. 하나님은 만방 중에 우뚝 서게 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만방에 선포되게 하실 것을 예언해 주신 것이다. 



그가 가르쳐 주시는 그 길로 행하라.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루실 여호와의 말씀이 시온에서 나오게 하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오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다. 여기 3절에서 말씀하는 ‘율법’이란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에 제한되는 말씀이 아니다. 이는 장차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의 말씀을 가리킨 것이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지만 광야의 성막에서 백성들을 만나주셨다. 예루살렘의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 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시온에서부터 나오고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하나님은 광야의 성막을 회막이라고 하셨다. 그 곳에서 광야 백성들을 만나 주시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에나 계시지만 솔로몬의 성전에서 각양 임재의 역사를 펼쳐 보여 주셨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백성들에게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성전을 재건하게 하셨다. 왜일까. 하나님은 성막과 성전에서 백성들을 만나주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12살 때에 부모를 따라서 마을 사람들과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방문한 적이 있다. 절기를 마치고 고향을 향하여 하룻길을 내려 가던 중에 요셉과 마리아는 아들 예수가 일행 중에 없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향으로 향하는 수많은 인파를 헤치며 다시 예루살렘을 향하여 아들을 찾아 나섰다. 사흘을 헤매며 고생하던 중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들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 12살 된 아들 예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사이에 함께 앉아 있었다. 그들과 대화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듣기고 하고 묻기도 하였다.  듣는 자들이 예수의 지혜로운 대답을 듣고 놀라워 하였다. 아머니 마리아는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눅2:48)라고 하였다. 그 때 예수는“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대답하였다. 그 부모는 12살 된 아들 예수의 하는 말을 깨닫지 못했다. 그날 이후의 예수의 성장기를 성경은“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나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2:52)라는 기록으로 축약해서 전하고 있다. 누가복음 2장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중심으로 지내시기를 기뻐하셨다. 십자가에 돌 가시기 전에 이 땅에 남아 계시던 예수는 장사꾼의 소굴로 변해 버린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다. 채찍질하시며 비둘기를 팔고 동전을 바꾸는 상을 뒤 엎으셨다. 성전의 본래의 기능을 회복하길 원하신 것이다. “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라고 말씀하셨다. 어제 밤 10시까지 24시간 기도회가 있었다. 시작하는 시간에 이건희 목사는 “목사님 우리 교회가 축제하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40일간 릴레이 기도문으로 우리의 마음을 모았다. 삼일간의 부흥회가 이어졌다. 부흥회가 끝나자 마자 24시간 연속 기도회를 하느라 여러 성도들이 밤 잠을 설쳤다. 새벽 2시까지 기도 방에서 기도하며 함께 하였다. 새벽 4시까지 당번을 맡아 보려 했으니 체력이 허락하질 않았다. 낮에도 저녁에도 밤중에도 마치는 시간에도 계속하여 기도 현장에 들락날락하였다. 마음과 생각을 기도하는 이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전을 중심으로 살아갈 자를 찾으신다. 하나님의 성전에 오르고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오를 자를 찾으신다. 오늘 날 하나님은 예배당 중심의 삶을 살아가려는 자를 찾고 계신다. 그 곳에서 흘러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아갈 자를 찾으신다.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사2:3)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그 말씀의 길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믿음이다.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가 길이다. 예수가 진리이다. 예수가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시다. 그러므로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각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의 힘을 얻고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깨달아 보라. 그러고 나면 하나님의 말씀이면 족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부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존귀하게 하신다. 아름답게 하신다. 시온에서부터 나오고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오는 율법 즉 여호와의 말씀이 개인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시대를 살리고 민족을 살리는 것이다. 


강림절기는 그런 절기여야 한다. 성탄절은 성탄 장식만 하는 절기로 끝나서는 절대로 안된다. 성탄의 주인공은 산타가 아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주변에 말하고 주변 사람에게 증거하는 절기여야 한다. 성탄절 선물이나 주고받는 것으로 끝나서는 절대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는 무의미하다. 전에 미국의 어느 지역에서 우체국을 개원하는데 정작은 우체통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원식을 했다고 한다. 우체국의 중심은 우편업무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는 예수를 말하는 곳이다.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께 집중하는 곳이다. 예수가 모든 것의 중심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모든 것의 중심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 땅의 교회들과 성도들이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게 하는 시대의 중심이 되기를 원하신다. 



열방을 판단하고 판결하시는 그를 주목하라.

4절에서 만나게 되는 두 단어 ‘판단과 판결’은 ‘다스린다, 왕 노릇 한다’라는 뜻이다.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와 소망은 분명하시다. 물고 뜯고 찢고 죽이는 것을 절대로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평화의 날이 오기를 원하신다. 이 나라와 저 나라가 서로 칼을 들고 서로를 치는 전쟁을 결코 원하지 않으신다.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않는 평화의 세상이 오길 원하신다. 지금도 지구 저편에는 전쟁이 멈추지 않고 있다. 세상에는 전쟁과 테러를 비롯한 각종 다툼과 싸움이 끊임이 없다. 모든 것이 전쟁이고 모든 것이 다툼이고 모든 것이 싸움이다. 내 안에서는 하나님의 법과 육체의 법이 싸운다. 서로가 상대방과 싸워 이기려고 무한 경쟁을 계속한다. 공부도 경쟁, 취업도 경쟁, 사업도 경쟁, 장사도 경쟁, 무역도 경쟁, 외교 등등 이 세상에 경쟁과 다툼과 싸움과 씨름이 아닌 것이 단 하나도 없다. 심지어 “천국도 침노하는 자의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맞다. 천국은 선한 마음을 갖고 선한 경쟁심을 갖고 침노하는 마음 가짐을 가진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이다. 선물이다. 


이처럼 죄와 악이 가득하고 병든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를 열방 사이에서 판단하시고 판결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일까. 하나님은 우리가 결코 전쟁에 휘말리는 그런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서로 화해하고 화목하며 평화롭게 더불어 사랑하고 돌보고 섬기고 베풀고 나누며 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지으신 에덴 동산이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스스로 그런 완전하고 아름다운 에덴에서 범죄하고 말았다. 하나님을 속이고 하나님 앞에서도 거짓말을 했다. 서로 핑계하고 서로 책임을 떠넘기려고 하였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서 벗어나면 누구나 다 그렇게 되고 만다. 하나님의 판단과 판결에서 벗어나면 누구라도 불행해 지고 만다.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르리심, 하나님이 나의 왕되심을 매 순간 시인해야 한다. 세상 왕이 나의 왕이 아니다. 세상 권력자가 나의 권력자가 아니다. 나를 다스리과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 뿐이시다. 이런 기대와 이런 마음가짐을 갖고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사울 왕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뽑아 세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지만 그렇지 못했다. 나중에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선지자 사무엘을 무시했다.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결국 사울 왕은 불행해지고 말았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역한 사울 왕의 나중을 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교만하면 않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교만은 어리석은 것이다.


다윗왕과 사울 왕의 차이가 뭔가. 다윗도 비열하고 악날한 범죄의 주인공이었다. 그런 다윗이 어떻게 다시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었는가. 다윗은 겸손하게 죄를 시인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렸다. 그런 다윗을 하나님은 용서하셨다. 나중에 하나님은 다윗을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13:22)라고 하셨다. 


가롯 유다도 제자였고 베드로도 제자였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예수를 버리고 떠나고 불행하게 생을 마쳤다. 그러나 그렇게 여러 번 우여곡절을 겪은 베드로이지만 베드로는 성령을 충만하게 받은 초대 교회의 중심 사도가 되었다. 차이점이 무엇인가. 날마다 말씀으로 새로워지고 날마다 주님의 판단 앞에 자신을 비워 드려야 한다. 열방 사이에서 판단하시고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를 기뻐해야 한다. 그리하면 누구라도 존귀해지고 누구라도 귀하게 쓰임 받을 것이다. 나를 주관하시고 다스리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제대로 응답하고 반응하며 살아가는 각 사람이 되기를 소원한다.  



여호와의 빛에 행하라.

세상에는 빛과 어둠이 존재한다. 밤은 어둠이 주관하고 낮은 빛이 주관한다. 사탄 마귀의 세계는 어둠의 세계이다. 그라나 하나님은 빛의 근원이시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오셨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깨닫지 못하는 것이 불행이다. 

요한복음 1장 9절에 보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하였다. 그렇다. 예수님은 이 땅을 비추는 참 빛으로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의 빛이 들어간 가정마다 복을 받았다. 예수님의 빛이 들어 간 마을마다 복을 받았다. 예수님의 빛이 들어간 나라마다 민족마다 복을 받았다. 


믿음의 사람은 누구나 다 빛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 5절에 보니까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라고 하였다. <어둠의 자식들> <꼬방 동네 사람들>처럼 살면 안된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한다. 


“빛의 사자들이여 어서 가서 어둠을 물리치고

주의 진리 모르는 백성에게 복음의 빛 비춰라 

빛의 사자들이여 복음의 빛 비춰라

죄로 어둔 밤 밝게 비춰라 빛의 사자들이여”


502장 찬송가 <빛의 사자들이여>의 가사처럼 그런 삶을 힘차게 살아가자. 


주님은 우리가 결코 가시나무와 엉겅퀴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여호와의 빛을 받아 들이니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믿음으로 살려 하니까 나오미의 며느리, 남편 잃은 젊은 모압 여인 룻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가. 예수의 구원의 빛이 임하니까 일곱 귀신에 사로 잡혀 있던 막달라 마리아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가.

예수의 빛이 들어가니까 백정의 아들인 박서양(朴瑞陽, 1887-1940)은 조선 최초의 백정 출신 서양 의사가 되었다. 선교사들의 눈에 들고 세브란스 의전에서 공부한 박서양은 1908년 조선 최초의 7명의 조선인 의사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1895년 6월 그 당시에 창궐하던 콜레라를 다스린 선교사인 의사 올리버 에이비슨(Oliver R. Avison, 1860-1956)은 고종의 마음을 설득해서 백정도 공부할 기회를 갖도록 길을 열었다. 그 첫 열매가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에이비슨 의사 곁에서 의학을 공부한 박서양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빛, 구원의 빛이 조상 대대로 백성으로 지내야 했던 백정의 가정에도 비친 것이다. 캐나다 출신의 의사요 선교사였던 올리버 에이비슨은 나중에 연희 전문학교 교장과 세브란스 병원 원장을 지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빛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빛이다. 성령의 역사가 빛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빛을 만나게 된다. 구원이 빛, 은혜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들려지고 깨달아지기 시작하면 인생은 바뀐다. 운명이 바뀌고 생애가 바뀌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만나야 한다. 예수를 공부하려 하지 말고 예수를 만나야 한다. 하나님에 대하여 공부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모세는 태어나자 마자 그의 엄마 아빠를 통해서 하나님이 모세의 목숨을 건져 주었다. 삼 개월 동안 아들 모세를 숨겨 키운 것은 엄마 아빠의 결정이 아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손길이다. 그런 모세가 갈대 상자에 담겨 떠내려갔다. 하나님이 그를 포기하셨나. 아니다. 드라마처럼 왕의 딸 공주를 통해서 건짐받게 하셨다. 애굽의 왕궁 교육이 가능하게 하셨다. 왕궁 밖에 나갔다가 애굽 사람을 쳐 죽인 것은 모세의 혈기였다. 그러나 도망자 신세가 된 모세를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미디안 광야에 피신해서 장가들고 40년 세월이 흘렀다. 나이 80된 모세를 하나님이 택하셨다. 그리고 민족의 지도자로 삼으셨다.호렙 산의 불이 붙는 듯한 떨기 나무의 환상 앞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만났다. 여호와의 빛을 만난 것이다. 강림절기는 하나님을 만나는 계절이다. 강림절기는 예수님을 만나는 계절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알고, 예수님께 대하여 아는 정도가 아니라 만나야 한다. “날 만나라 날 만나라 구룹 날개 사이에서 날 만나라”라고 하나님이 촉구하고 계신다.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만나야 삶이 바뀐다. 그래야 예배가 달라지고 기도가 달라지고 찬송이 달라지고 봉사가 달라지고 섬김이 달라지고 헌신이 달라지고 전도에 대한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것이다. 복된 강림절기와 성탄절 맞이가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예수사랑 조회 62회 2025-12-01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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