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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2019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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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9-07-16 15:20 조회 5,806 댓글 0
 

동행

 

저 지난 주 중에 아리랑 고래를 넘어서서 성신여대 사거리를 지나 서울대학교 병원을 향하여 운전해 가고 있었다. 자그마한 체구의 남편이 키가 크고 퉁퉁한 아내를 부축하며 지나가는 노부부의 모습이 차 창 밖으로 보였다. 잠시 후 그 반대 방향으로 걷고 있는 커다란 체격의 남편이 연약해 보이는 아내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또 다른 노부부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순간 . 저게 사람 살아가는 일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더불어 살아가게 마련이다. 인간의 생명은 이미 모태에서부터 동행이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갓 태어난 어린 아기는 그를 양육하는 유모의 품에서 자라난다. 고아라도 그 누군가의 사랑의 손길에 의해서 돌봄을 받고 자라나는 것이니 그 자체가 동행의 은총을 입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산다는 것 그 자체가 동행의 연속이다. 사람은 절대로 혼자서는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물론 로빈스 쿠르소처럼 피치 못하게 무인도에서 생명을 부지하며 생존해 가는 경우도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가족을 중심으로 살아가며 씨족과 부족을 중심으로 더불어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오늘 날은 직업이 세분화되고 전문화 되면서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아간다. 교통의 발전은 지구촌을 하루 생활권으로 좁혀 놓았다.

 

부족과 부족,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이 서로 싸우고 침략하여 점령하고 혹은 점령당하기도 하는 약육강식이 인류의 역사 가운데 계속되어 오고 있다. 요즘은 경제 전쟁, 무역 전쟁의 시대이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에는 늑대의 날카로운 이빨을 숨기고 있다. 동행은커녕 적과의 동침인 것 같은 불안의 짙은 안개가 우주를 덥고 있다.

 

사탄은 자꾸만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서 사탄의 지배를 받도록 유혹한다. 최초의 인간 아담은 하나님이 친히 창조하셔서 에덴동산에서 살아가게 하셨다. 혼자 지내는 것을 쓸쓸하게 여기신 하나님이 돕는 배필 하와를 그의 곁에 두셨다. 그리하여 부부가 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기대하셨다. 그러나 사탄의 꼬임을 받은 하와는 남편 아담까지 더불어 불행한 길을 걷도록 더불어 잘못된 길로 이끌고 말았다. 이미 분별력을 잃은 아담은 아내의 요구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었다. 이미 아내는 사탄의 꼬임에 빠져서 먼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후였다.

하나님은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기대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떠나고 말았다.

 

신앙생활이란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이다.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생활이다. 그렇지 않나. 부부라도 마음을 달리하면 동상이몽(同床異夢)이 되고 만다. 이는 부부가 같은 침대에 누워 잠을 자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서로 다른 생각에 사로 잡혀 있는 상태이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의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5:7)고 교훈해 주셨다. 맞다. 주님과 동행하는 증거는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삶의 연속이어야 한다.

 

내 생각, 내 판단, 내 경험, 내 주장, 내 기호, 내 취향, 내 요구와 필요를 따라 매사를 결정하고 살아가면서 주님과 동행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기만(欺瞞)하는 것이며 위선(僞善)이다. 그렇게 살아가며 주님과 동행할 수 있는 길이란 없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유월절 만찬 자리에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에 둘러 앉으셨다. 그 자리에는 가롯 유다도 있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잡수시고 계셨다. 음식을 잡수시다가 말고 겉옷을 벗고 허리에 수건을 동이고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는 말씀을 해 주셨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마음이 몹시 괴로워하셨다. 그리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는 말씀을 하셨다. 제자들은 서로가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자기들 중의 누군가가 예수를 팔 것이라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씀인가.”하고 궁금해 하였다. 그 때 예수께서는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고 말씀하시며 떡 한 조각을 가롯 유다에게 주셨다.

 

제자들 중에서 가롯 유다는 그 시간 그 자리에 있기는 있었으나 그의 마음이 이미 예수에게서 떠난 자였다. 마음이 떠났다는 것이 무엇인가. 동행하는 상태가 아니란 말이다. 성경은 그 원인을 마귀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한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13:2)

 

주님이 기대하시는 동행이란 어떤 삶의 모습일까. 고든 맥도날드는 그의 책 <영적성장의길>에서 사람은 평생 평균 150명 정도를 알고 지내게 된다.”고 하였다. 그 알고 지낸다는 이들은 언제 어디에서 만나도 마음 편하게 커피를 마시며 마음을 열고 대화할 수 있는 그 누군가를 말한다. 그 중에서도 공감(共感)집단은 10-15명 정도라고 하였다. 그 수는 내가 죽으면 진정으로 마음을 담아서 슬퍼해 줄 사람들을 말한다.

 

물론 사회적인 신분이나 그 삶의 영향력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임 당하시던 날,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고 믿어지지 않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날 그 시간에 일어난 사실이다. 예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려 급하게 장례한 그 현장에도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이 보이질 않았다. 공회원이었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앞장서서 예수의 시신을 수습했고 아리마대 사람요셉은 자기를 위해 마련해 두었던 묘실에 예수를 모셨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는 평소에는 예수의 곁에 없었으나 그들은 진심으로 예수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려고 씨름했던 믿음의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나. 동행이란 누구와 어느 정도 거리에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동행이란 이전에 그리스도 밖에서 살아가던 이방인과 같은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목(和睦)해 지는 것이다.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는 것이다. 주변 모든 영혼들에게 평안(平安)을 선포하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서의 성전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다. 심령의 성전을 이루고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은 놀라운 은총이며 기름 부으심이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주님은 마태복음 2820절에서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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