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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김영옥인가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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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8-09-08 20:04 조회 9,367 댓글 0
 

왜 김영옥인가

 

 

지난 83, 미국 서부를 남북으로 잇는 5번 고속도로의 캘리포니아주 오렌지카운티 북서쪽 도시 부에나파크 진입로에서 고() ‘김영옥 대령 기념 고속도로표지판 기공식이 열렸다. 미국 연방 고속도로에 한국인 이름을 딴 구간이 처음으로 생긴 것이다.

 

김영옥(金永玉, 1919-2005)이 누구인가. 그는 한국계 미국 군인이다. 그는 미군에서 아시아계 출신으로서 최초로 대대장을 역임하였다. 미군은 그를 전쟁 영웅으로 부른다. 그의 마지막 계급은 대령이었으나 미군 내에서의 인종 차별이 아니었으면 충분히 별을 달만한 인물로 회자(膾炙)되어 오고 있다.

 

그는 191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6남매 중에 위로 누나를 둔 4형제 가운데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김순권은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 하와이에서 출범시킨 대한인동지회의 북미총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나중에 L. A에서 세탁소를 경영하며 최소한의 수입으로 가족을 돌보고 나머지 모든 수입을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 자금으로 보내는 일에 앞장섰던 독립운동가였다.

 

김영옥은 대학 1학년을 중퇴하고 갖가지 직업을 경험하였다. 그 당시에는 미국 내에 인종 차별이 극심하여 아시아인으로서 무슨 일자리를 갖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는 중에 제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그는 미군 육군 모병소를 찾아갔으나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입대 거절을 당하였다. 1941년에 백인 이외의 소수인종도 징집 대상으로 포함시키는 법이 제정되었다. 입대 영장을 받은 김영옥은 22살에 미국 육군 병사로 입대하였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은 하와이에 거주하던 일본계 2세들로‘100대대를 창설하였다. ‘100대대는 하와이의 젊은 일본계 이민자들이 일본의 침략에 협조하여 사보타주 등을 행할까봐 두려워 인질화하기 위한 수용소 감금 정책이었다. 당시 장교후보생 학교를 나와 장교가 되어 있던 그는 한국계가 아닌 일본계로 분류되어 ‘100대대에 배치되었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사이가 좋지 않음을 알고 있던 대대장은 그의 신변 보호를 위하여 전출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곳에 머무르기로 결정하고 100대대의 2소대장직을 맡았다.

 

이후 미 5군에 배속되어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된다. 김영옥 소대장은 이탈리아 볼투르노 강 전투에서 무공을 세웠다. 특히 엄폐물이 전혀 없는 평지에 새벽에 단둘이 침투하여 독일군을 잡아 정보를 빼내어 로마를 함락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후에도 뛰어난 전략으로 독일의 방어선이었던 구스타프 라인과 고딕 라인을 붕괴시키는데 돋보이는 공을 세웠다.

 

그의 부대는 이탈리아 전선 참전 후에 남프랑스에 투입되었고 브뤼에르와 비퐁텐느란 두 마을의 해방에 앞장섰다. 나중에 남프랑스의 비퐁텐느의 교회 벽에는 그의 이름을 새겨 놓았고 그 마을 노인들은 김영옥을 김대위(까피텐 김)라고 부른다. 그는 비퐁텐느의 전투에서 큰 부상을 당하였다. 1944년 말에 L. A로 돌아가서 부상 후유증 치료 기간을 가졌다. 이후 유럽으로 돌아가려는 때에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났다.

그 후 L. A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던 그는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에 다시 입대하여 대위 계급으로 미군에 복귀했다. 그는 한국인 유격대인 배내대 유격대를 지휘하며 전쟁 중의 정보 수집 임무를 수행했다. 배내대 유격대는 흥남 철수 때 남쪽으로 내려온 피난민 중에서 선발한 유격대였다. 이 임무를 마친 후 김영옥 대위는 7보병사단 31연대의 정보참모가 되었다.

 

19514, 미군 31연대가 소양강을 건너 17연대와 임무 교대하자마자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31연대는 다시 소양강을 건너 철수하였다. 그 당시에 김영옥 대위에게는 미군과 한국군의 후퇴를 위하여 강원도 인제군 남면 개운동 계곡의 다리를 사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전차 소대를 다리 남쪽에 세워 놓고 김영옥 대위는 후퇴하던 중대급 한국군 보병과 함께 임시 방어선을 구축하여 후퇴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지원했다.

 

195110, 김영옥 대위는 소령으로 진급하고 1대대 대대장이 되었다. 이는 그 당시 미국 군대 내에서 아시아계로 백인 병사들을 지휘하는 보병대대장이 된 최초의 경우였다. 김영옥 소령은 피부색과 인종을 뛰어 넘어 그의 지휘 능력을 미국 군대 안에서 인정받은 것이다.

 

19515월경, 미군 31연대의 사기는 형편이 없었다. 미군 31연대는 6개월 전인 195012, 장진호 전투에서 해병대와 함께 흥남으로 철수하면서 연대장이 전사하는 불행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부대원들을 격려하고 사기를 진작시켜 그가 담당하였던 전투지역은 북쪽으로 불쑥 추진된 상태에서 휴전선이 자리 잡게 하는데 크게 공로를 세운 것으로도 유명하다.

 

6.25 전쟁 중에 아군에 의해 부상을 당하여 19529월에 미국으로 귀국한 그는 그 후 여러 보직을 맡았다. 포트 베닝의 미국 육군 보병학교의 교관, 독일에서 7사단 86연대 2대대장, 중령으로 진급한 후 캔자스 주의 포트 리브에서 교관으로 사역한 그는 1963년부터 3년간 주한 미군 군사 고문단(KMAG)의 일원으로 다시 대한민국에 부임하였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에 전시 방어 체제, 예비 병력 동원 체제, 청와대 방어 체제 등의 기초를 고안하였다. 영공 방어를 위한 대공미사일부대 창설을 군사고문단에 건의하여 호크 미사일부대창설의 산파 역할을 하였다. 1965년 대령으로 진급한 그는 유럽과 하와이를 돌며 근무하다가 1972년에 전역하였다.

 

김영옥이 미국에서 존경받는 이유는 군인으로서의 그의 공로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전쟁 때부터 김영옥은 여러 사회 봉사활동을 해온 사실이 세상에 알려 졌다. 보병대대장으로 근무하던 김영옥은 부대 군목이었던 샘 닐이 데려온 고아 몇 명을 돌보며 직접 고아원을 설립하여 그곳에서 고아들을 보호하며 지속적으로 지원하며 그들을 양육하였다. 그는 6. 25 이후에 L. A를 중심으로 인종 차별 철폐 운동과 미국에서 가정 폭력을 당한 아시아계 여성들을 보살피기 위한 아시안 여성 포스터 홈을 건설했다. 이런 일들이 알려 지면서 그는 후에 대한민국 정부의 국민훈장 모란장과 한국방송공사의 KBS 해외동포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나이 들어가면서 좋지 약해진 건강에도 불구하고 400여명이 희생된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조사를 위한 조사 위원회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442연대를 기념하기 위한 고 포 브로크 재단(Go For Broke)을 설립하여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에 적지 않은 관심을 보이며 활동을 계속하여 왔다.

 

마크 클라크 전() 5군 사령관은김영옥은 내 휘하에 있던 500만 군인 중에서 최고의 군인이었다.”고 극찬하였다. 채명신 전() 파월 한국군 총사령관은 미 보병학교 시절 한국계인 김영옥 대령 덕에 어깨가 으쓱하였다.”고 회고하였다. LA에는 그의 이름을 딴 초등학교와 중학교도 있다. 그는 MSN이 선정한 조지 워싱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더글러스 맥아더 등과 함께 미국 역사상 최고의 군인 16명 중의 한 사람으로 등재되는 영광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는 명예롭게 죽어 승리하는 것이 겁쟁이로 살다가 나라를 잃고 모든 것을 잃은 것보다 낫다.”는 말을 남겼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다. “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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