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심
이 세상에 시기심(猜忌心)이 전혀 없는 사람은 아마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국어사전에는 “시기심이란 남이 잘되는 것을 샘내고 미워하는 마음”이라고 풀이하였다. 마가복음 15장 10절에 보면 대제사장들은 예수를 시기하여 죽여 없애려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넘겨서 사형 언도를 받게 하였다. 맞다. 예수는 대제사장들의 시기심에 의해서 희생되었다. 대제사장들은 무리를 충동해서 강도인 바라바를 놓아 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선동하였다.
인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태어난 형제인 가인과 아벨의 사건에서 시기심의 뿌리를 찾아볼 수 있다. 형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고 동생 아벨은 양을 치는 자였다. 저들 형제는 나란히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드렸다. 세월이 지난 후에 형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제사하였다. 동생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 이 사건 후에 형 가인은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됨이냐”(창4:6)고 물으셨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는 교훈의 말씀까지도 해 주셨다. 그러나 그 일 후에 형 가인은 들에서 만난 동생 아벨을 쳐 죽였다. 이 사건은 한 아버지의 피를 받고 한 어머니의 태 중에서 탄생한 형제자매간에도 시기심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내용이다.
야곱의 총애를 받던 아들 요셉이 배다른 열 명의 형들에 의해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게 된 것도 저들 형제들의 시기심 때문이었다. 젊고 유능하고 용감하고 총명하며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을 갖고 있던 다윗에게 임금 사울이 창을 던져 살해하려던 것 또한 그의 마음에 다스려지지 않는 시기심이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롤프 하우블(Rolf Haubl)은 독일의 심리학자이며 집단심리분석가이다. 아우크스부르크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를 지냈다. 현재 지그문트 프로이트 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그는 <시기심>이란 책에서 “한 번도 남을 시기하지 않을 만큼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있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까지 자신도 그런 적이 있다고 솔직하게 시인하는 사람은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이런 성향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을 수치스러워하는 이유는 온갖 형태의 자기애를 감추려는 태생적 위선 때문이다.”
그의 책을 읽다 보면 이런 재미있는 예가 나온다. 두 사람이 지나가다가 기가 막히게 비싸고 좋은 차를 몰고 가는 젊은 청년을 발견하였다. 한 사람이 환희에 차서 말했다. “우아, 멋진걸. 나도 언젠가는 저런 차를 몰 날이 있겠지?” 그러자 곁에 있던 다른 사람이 뇌까리듯 말했다. “저 인간도 걸어다닐 때가 있을걸?”
저자는 전자는 미국인이고 후자는 독일인들의 시각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민족적이거나 국가적인 모습을 뛰어넘어서 우리 모두에게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모습이다. 우리는 흔히 후자만이 시기심을 가진 모습으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 모두 시기심의 다른 표현을 한 것뿐이다. 앞의 사람은 건설적이고 자기개발적인 면에서 상황을 본 것이고 후자는 부정적인 면에서 상황을 인식한 것뿐이다.
버나드 맨더빌(1670-1733)의 책<꿀벌의 우화>의 한 대목은 ‘시기심’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정리해준다. 그는 “사람들은 욕심이나 사치를 악덕이라 하는데 바로 그 악덕이 나라를 잘 살게 하고 악덕을 없애고 미덕만을 갖게 된다면 나라는 점점 더 가난해지고 만다. 미덕이라는 것은 이기심에 허울을 씌운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를 비판하면서 돈을 벌어 보려고 남의 눈에 피눈물이 흐르게 하는 짓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는 것이 아담 스미스의 도덕 감정이고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도덕 원칙이다. 이런 내용은 딱딱하고 어려우니 좀 더 쉬운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
시기심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 시기심을 건강하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불붙여 가면 자기 발전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시기심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감정의 현상이다. 모든 사람은 시기심을 느낀다. 하지만 국가나 민족에 따라서 시기심에도 차이가 있다. 한 국가 내에서도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고 각 국가에는 다양한 사회적 그룹들이 공존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기심은 성별, 연령, 인종, 교육과 종교, 경제적인 상태 등에 따라 다양하게 나뉠 수 있다.
롤프 하우블의 주장에 따르면 미국인은 그다지 시기심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뉴욕시의 롱 아일랜드에 자리 잡고 사는 상류층 거부들의 생활과 디트로이트의 빈민 지역에 사는 가난한 이민자들의 사이에도 이런 주장이 통할까 의문이다. 롤프 하우블은 우크라이나 지방을 여행하면서 경험한 일화를 소개한다. 그가 주로 대화를 나눈 사람은 의사나 심리학자였다. 이 지역 사람들이 얼마나 서로를 시기하는지를 묻자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정말 시기심이 많은 민족이지요. 예를 들어 우크라이나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한 농부가 풍작을 이루면 그들은 먼저 먹을 몫으로 일정량을 남겨두고 나머지를 팔려고 내놓습니다. 그래도 남는 사과가 있으면 남한테 주기보다 그 자리에서 먹어치우지요”
롤프 하우블은 사회 심리적으로 시기심을 극복하는 형태를 “우울, 야심, 분노” 의 세 가지로 구분한다. 우울하게 하는 시기심은 갈망하는 재산을 포기해야만 하는 경우에 생긴다. 이런 형태의 시기심을 느끼는 자는 시기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 자신이 갈망하는 재산을 정당하게 소유하고 있다고 인정한다. 자신은 그런 재산을 획득할 만한 능력이 없다고 여긴다. 그런 이들은 이런 상황에서 그 재산을 가진 상대를 적대적으로 대하는 것은 사회적 규범이 금하고 있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이 때문에 그는 스스로에게 격분하게 된다. 반면에 야심에 찬 시기심은 상대방이 성취한 업적에 대하여 감탄하고 그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며 그와 경쟁할 때 생긴다. 그런 이들은 그 자신도 갈망하는 그 재산을 획득할 만한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는 분노의 감정을 노력으로 대체한다. 분노에 찬 시기심은 상대가 재산을 불법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믿을 만한 정당한 근거가 있을 때 생긴다. 정당성을 내세우며 그는 자신의 분노를 재산의 공평한 분배를 위한 투쟁의 수단으로 삼는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다른 사람들이 올라오는 동안 정지해 있는 사람은 시기심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말했다. 유대인은 탈무드에서 “시기심은 천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도 올바르게 보지 못한다.”고 교훈한다. 미국의 영성가였던 조나단 에드워드는 “시기심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여 남의 소유나 행복에 대하여 불만을 표시하는 감정이다. 남이 자기와 똑같은 명예나 행복을 누리는 것을 싫어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서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라고 교훈하였다. 그렇다. 진정으로 서로를 사랑한다면 시기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나. 정상적이라면 아들딸을 시기하는 엄마가 있을까.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시기심을 비롯한 우리의 모든 감정에 대한 질문에 온전한 대답을 주는 열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