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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순교자 최인규 권사 2016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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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6-10-31 04:12 조회 14,248 댓글 0
 

순국 순교자 최인규 권사

 

 

지난주에 부흥회를 인도한 동해시 천곡교회는 순국 순교자의 역사를 안고 있는 교회이다. 주일 저녁 식탁에 마주 앉은 천곡교회의 김형걸 장로는 그 교회의 순국 순교자 최인규(崔仁圭, 1881-1942)권사의 삶과 신앙에 대하여 해박한 내용들을 설명해 주었다. “난세에 영웅난다는 말이 있다. 최인규는 1881년에 강원도 삼척에서 최돈일 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오늘 날의 동해시 송정동이다. 그는 어려서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배웠고 18살에 부인 홍씨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았다. 평범한 농부로 지내며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그는 40이 되던 1921년에 기독교의 복음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오늘날 북평제일교회의 전신인 북평교회에서 목회하던 김기정 목사를 통하여 복음을 깨닫게 되었다. 4년 후인 192512월에 세례를 받았다. 그는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 철저하게 술과 담배를 멀리하고 조상 제사를 철폐하였다. 그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제사(祭祀)용 기물들을 깨트리고 불살라 버렸다. 그는 세례 받은 지 7년 후에 권사가 되었다. 그는 속장의 역할을 하며 철저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웃에 있는 천곡기도처의 권화선 속장이 예배당을 짓기를 열망하는 모습을 보고 그와 손잡고 천곡교회예배당을 건축하였다. 그 다음 해부터는 천곡교회로 이명하여 목회자가 없는 상태에서 예배를 인도하며 지냈다. 그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논과 밭을 정리하여 천곡동리에 논 539평과 밭 1369평을 마련하여 이주하였다. 그 얼마 후인 1935년에 본인 소유의 그 논과 밭 모두를 천곡교회에 헌납하였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던 당시였지만 그는 교회부흥과 복음 전파에 매진하였다. 일본제국은 내선일체라는 미명 아래 대한 제국의 국민들에게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강요하였다. 최인규 권사는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라고 반대하며 단호하게 배격하였고 성도들도 이에 호응하여 일제의 명령에 불복하였다. 그는 창씨개명도 끝까지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불경죄(不敬罪)로 검속되어 일본경찰로부터 잔혹한 고문을 받게 되었다. 19405월에 있었던 사건이다. 일본경찰은 그에게 창피를 준다고 똥지게를 지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나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은 최인규요라고 소리치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주님은 십자가도 지셨는데 이까짓 똥지게를 못질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감사하며 더욱 큰 소리로 외치며 다녔다고 한다. 그 당시에 한 교우가 삼척경찰서장을 찾아 갔다. “최인규는 정신이상자였으나 예수 믿고 나은 줄 알았는데 재발한 것 같으니 석방시켜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자 일본인 경찰서장은 당신이 정신병자요 이왕 예수를 믿으려면 최인규같이 믿으시오.”하고 호통을 쳐서 돌려보냈다고 한다. 최인규 권사는 함흥재판소의 재판정에 세워졌다. 그는 너희는 내 말을 똑똑히 듣거라.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로마는 망했다. 일본은 우리 민족을 못살게 하는 죄악을 회개하지 않고 있다. 남을 박해하면 반드시 멸망하고 말 것이다.”고 또박 또박 말하며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였다. 판사는 크게 노하면서 책상을 치며 그에게 징역형 2년을 선고하였다. 감옥에 수감된 최인규 권사는 날마다 늘 기쁘게 찬송하며 주변의 수감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의 지조와 절의는 추상과 같았다. 매일 아침마다 동방요배를 강요하는 일본 간수 앞에서 그는 당당하게 거절하였고 날마다 매를 맞아야 했다. 그는 나는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안하기 때문에 감옥에 왔는데 왜 때리느냐. 나는 재판정에서도 부당한 명령에는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한 사람이다.”하며 오히려 간수에게 호통을 쳤다. 그는 1941년 말에 사상범을 주로 수감하던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간수들은 최인규 권사를 회유해 보려고 별 고문을 다 하였으나 그는 주님을 믿는 신앙과 절개를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그와 같은 감방에 원주지방 고성교회를 섬기면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붙잡혀 온 이진구 목사가 있었다. 계속되는 고문으로 최인규 권사의 몸이 점점 쇠약해 지자 이진구 목사는 그를 측은히 여기며 권사님 신사참배를 하겠다고 한 번만 말하면 풀려 날 수 있을텐데 그냥 한번만 그렇게 말하고 이젠 그만 감옥에서 나가시죠.”라고 권면하였다. 그러자 최인규 권사는 나는 목사님인줄 알았는데......”하며 실망한 빛으로 돌아앉았고 그 후로는 재차 말도 하지 않고 지내려 했다고 한다. 점점 노쇠해진 최인규 권사는 고문에 지치고 병이 들어 더 이상 음식도 먹지 못하고 죽어 가고 있었다. 결국 병감(病監)으로 이송된 그는 19421216일 오후 2시 경에 63세를 일기로 대전형무소에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역사는 그를 순교자로만 구분하지 않고 나라를 사랑하며 살다가 숨진 순국자로 추대하였다. 그래서 그의 이름 앞에는 순국 순교자라는 칭호가 붙게 되었다. 1980년대에 계획 신도시로 발전한 동해시의 아름답고 나지막한 산자락 앞에 마련된 성전터에 1993, “순국 순교자 최인규 권사 기념 예배당이 웅장하게 건축되었다. 예배당 바깥 계단을 오르는 한 편 정원에는 그의 유해를 천장(遷葬)하고 순교 신앙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워 놓았다. 기념비의 좌측 석판에는 그의 믿음은 샘실 참 샘물로 東海에 가득 서리어 그 빛깔 靑甓一色으로 온 하늘에 펴져 나가네라고 새겨 놓았다. 그리고 우측 석판에는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는 사도행전 2024절의 말씀이 새겨져 있다. 사이비 무속 신앙에 사로잡힌 부녀(父女)에게 휘둘려 온 지도자의 무분별함으로 인하여 요즘 온 국민들이 실망과 허탈한 배신감에 우울해 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 1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하고 있다. 한 사람의 지도자가 잘못하고 있다고 국민들조차 흔들려서야 되겠는가. 진심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영원한 진리와 공의의 편에 서는 최인규 권사와 같은 이들이 점점 많아지는 건강한 나라, 순결한 믿음의 사람들로 가득 찬 땅이 되기를 소원하는 마음은 비록 나만의 기대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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