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예수(마4:1-11) 2025. 3. 9
마태복음 3장에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4장에는 성령의 이끌림을 받으신 예수께서 광야로 나가셔서 사십일을 금식하신 후에 마귀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시는 내용이 담겨 있다. 우리는 이 두가지 내용을 접할 때에 거의 누구나 다 질문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신데 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까”라는 질문이다. 또 하나의 질문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신 예수께서 왜 금식하셔야 했으며 감히 마귀가 예수를 시험하려고 했다는 것이 무슨 일인가”라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세상에 마귀는 실존한다. 마귀의 시험은 누구에게나 있고 언제나 있다. 마귀란 “ 천사장이 타락하여 된 초자연적 존재이다. 여러 악귀를 거느리는 악의 세계의 지배자이다. 사탄, 악마, 귀신, 참소하는 자, 수군수군하게 하는 자, 거짓말 하는자, 살인하는 자, 음란의 영, 속이는 영, 빼앗는 영, 무너지게 하는 영, 망하게 하는 영”등 다양한 영적 세계를 일컫는 용어이다. 성경은 창세기에서는 뱀으로 시편, 욥기, 이사야서, 요한 계시록 등에서는 리워야단 혹은 용으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영어로는 레비아탄(Leviathan)이라고 한다. 이사야 27장 1절에 보면,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라고 하였다.
사자나 호랑이나 곰과 같은 맹수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만 마귀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영적 세계인 것이다. 성령에 반대되는 영적 세계가 마귀의 세계이다. 마귀는 시간과 장소와 환경을 초월하고 인간 세계에 접근해서 인간을 영적으로 무너지게 한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말씀하는‘도둑’이란 실제 도둑을 일컫는 말씀일 수도 있으나 성령의 세계를 대적하는 악한 영 즉 마귀의 도전을 비유로 드신 것이라 할 것이다.
예수를 이끄는 영은 성령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는 언제나 성령의 임재 안에 계셨다. 마태복음 3장에 소개된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에도 보면 3가지 기적의 장면이 나온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 오실 때에 첫째, 하늘이 열렸다. 둘째,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서 예수 위에 임했다. 셋째,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언제나 성령의 충만한 임재 가운데 출입하셨다. 그런데 감히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성령이 충만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시험하려고 마귀가 달려들었다. 본문인 마태복음 4장 1, 5, 8, 11절에서는‘마귀’라고 했고 3절에서는‘시험하는 자’라고 하였다. 10절에서 예수는 마귀를‘사탄’이라고 하셨다. 예수는 마귀의 시험에 넘어지는 분이 아니시다. 예수는 마귀의 시험을 언제나 이겼고 어디서나 이기셨다. 예수께서 마귀의 세 가지 시험을 이기자 마귀는 예수를 떠났다. 그리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예수를 수종들었다. 그 마귀가 예수의 곁에 수시로 다시 찾아 와서 예수를 괴롭혔다. 예수를 시험하려고 하였다. 충성된 제자였던 베드로조차 예수의 가는 길을 막아서려 하였다. 그 때 예수께서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책망하시기도 하였다. 마귀는 결국 예수께서 가야바의 뜰에서 마지막 운명의 날 새벽 시간에 심문을 받으실 때에 베드로의 마음을 다시 시험하였다. 그래서는 여자 아이의 질문 앞에서 “나는 예수를 모른다”라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배반하고 도망가 숨어 버렸다. 마귀는 예수를 넘어뜨리려고 계속해서 집요하게 따라 붙었다. 결국은 예수의 신뢰받던 수 제자 베드로의 마음을 들쑤셔 버렸다. 그러자 결국은 베드로조차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배반하고 도망가 버리게 만들고 말았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 공동체를 이루고 주님을 섬겨 간다. 우리가 말씀을 붙들어야 하고 계속하여 주님의 뜻을 찾는 기도 생활과 성령 충만한 삶을 지속해 나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마귀가 다가와서 나의 영혼을 낚아채 가버린다. 마치도 우는 사자가 두루 다니며 삼길 자를 찾는 것처럼 달려들어서 누군가를 낚아채서 마귀의 밥을 만들어 버리려고 한다. 넘어뜨리려고 한다. 개인을 무너트리고 가정을 무너트리고 교회를 무너 트리고 국가를 무너트리려고 한다. 예수가 마귀의 시험을 이겨내자 아주 떠난 것이 아니라 결국은 예수 곁에서 살림살이를 도맡아 충성하던 가롯 유다의 마음에 들어갔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보면, “사탄이 가롯 유다의 마음 속에 들어 갔다”라고 했다. 그 시간은 예수와 함께 모든 제자들이 유월절 전날 밤에 만찬 식탁에 둘러 앉아서 음식을 함께 먹고 있던 때였다.
그렇다. 마귀의 간악한 계략은 시간과 장소를 구별하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다가와서 마귀의 먹잇감을 삼으려고 달려든다.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된 가롯 유다는 결국 예수를 배반하고 팔아 버렸다. 그 다음 날 이른 새벽 시간에 베드로는 예수를 배반하고 도망가 버렸다. 마귀는 이처럼 끊임이 없이 믿음의 사람들을 시험에 빠지게 하고 주님을 믿고 따르고 순종하는데서 멀어지게 하려고 으르렁 거리며 달려들고 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마귀의 세계를 잘 알아서 마귀의 시험을 매 순간마다 이겨 내야 하는 것이다. 다음 구호를 다 같이 외쳐 보자.
시험(試驗)은 이기도
유혹(誘惑)은 피하고
미혹(迷惑)은 분별하자
창세기의 요셉은 시험과 유혹을 잘 이기고 피한 역사적인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다니엘서의 다니엘이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드 그런 영적 승리자들이었다. 우리가 찬송하지 않나“불같은 시험 많으나 겁내지 맙시다 구주의 권능 크시니 이기고 남겠네”<내 평생 소원 이것뿐>이라는 450장 찬송가의 제 3절이다. 그렇다. 믿음의 사람은 찬송가만 따라 부르지 말고 불 같은 마귀의 시험을 넉넉히 이기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이미 성령 충만함을 받은 예수이신데도 주께서는 광야로 가셨다. 그를 광야로 이끈 것은 성령이었다. 예수는 광야에 사십일 간 머물렀다. 밤낮으로 금식하였다. 춥고 배고픈 날들이 이어졌다. 예수는 금식하실 필요도 없는 분이시다. 왜 그럴까. 예수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모든 영적 세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된 삶을 사시는 주님이셨다. 그런데 예수께 왜 금식이 필요했던 것일까. 사실은 장차 그를 부르실 제자들과 후대에 주를 따를 믿음의 성도들을 위하여 모범을 보이신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먹고 마시고 취하고 향락하는데만 급급하며 살아간다면 감히 어떻게 성령의 능력이 충만하게 임하겠는가.
그렇지 않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점점 삶을 단순하게 살아가야 한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에 나가서 경제 생활을 하느라 분주하고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지만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렇게 직장과 일터와 사업의 현장에 매여서 ‘돈 돈 돈 돈’ 하며 살아가는 것만이 나를 향하신 주님의 기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론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하고 실력도 키워야 하고 사회생활도 잘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의 소유와 탐심을 쫓아가고 명예와 인기와 권력만을 평생 쫓아다니는 것으로 인생의 대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씀이다.
사십일의 금식이 끝났을 때에 예수께 다가온 마귀의 시험이 무엇인가. 사십일 금식한 이후면 그 누구라도 신령하고 은혜 충만하지 않겠나. 그런 상황이라면 마귀가 범접도 못할 거 같은데 오히려 마귀는 그런 상황일 이용해서 달려 든 것이다. 마귀가 예수께 그런 접근을 한 것을 보면 우리 같은 범인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생각해 보라. 마귀가 언제 내게 달려드나. 예배 잘 드리고 은혜 많이 받은 것 같은 그 순간에 마귀가 내 마음을 뒤집어 놓을 수 있다. 그러므로 주일 날 오후 시간, 주일 날 밤 시간이 더 위험한 시간일 수 있다. 마귀의 세 가지의 시험과 예수께서 마귀의 시험을 이겨내신 내용을 다시 묵상하는 중에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라.
마귀는 예수께 다가 와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 덩이가 되게 하라”라고 시험하였다. 예수는 마귀가 인정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런데 감히 마귀는 예수 곁에 다가와서 그처럼 깐죽거리는 말로 예수의 비위를 건드리려고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사십일을 밤낮으로 주리신 예수께 ‘돌로 떡이 되게 하라’라고 시험하였다. 우리는 나중에 예수께서 보여 주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의 기적을 안다. 예수는 필요하시면 얼마든지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실 수 있는 전능자이시다. 그런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 감히 마귀는 이런 식의 시험을 하려고 한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첫째 아담은 마귀의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에덴에서 좇겨 나고 말았다. 그러나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마귀의 모든 시험을 넉넉히 이기셨다. 그렇다. 예수는 이기는 영이시다. 우리가 주 안에서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아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를 주장하시도록 위탁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리하면 내가 나를 이기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 안에 계셔서 매 순간의 영적 도전을 분별하고 이겨 내도록 이끌어 주실 것이다.
예수께서는“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라고 하셨다. 여기 예수께서 말씀하신 ‘환난’이란 상황을 ‘시험’이라고 바꾸어보라. 그렇다. 우리가 세상에서 수 없는 시험, 끊임이 없는 시험을 당하나 담대하게 주를 의지하고 살아가면 주께서 우리 각 사람으로 하여금 넉넉히 세상을 이기게 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 신앙에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는 마귀의 첫 시험을 무엇으로 이기셨나.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일격에 대적하여 물리치셨다. 이것은 신명기 8장 3절을 인용하신 말씀이다. 신명기의 말씀은 모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광야 생활 말미에 남긴 하나님의 말씀이다. 광야 생활 사십 년 동안 날마다 먹은 것이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 주시는 만나였다. 날마다의 물 문제를 해결 받는 것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기적의 선물이었다. 그런 저들에게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인생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떡은 애굽에도 있었다. 떡은 광야에서도 날마다 공급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서 사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아가느냐이다. 태도가 중요하단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생활이다. <하나님의 말씀은>이라는 203장 찬송가의 가사를 보라.
(1)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라
광야같은 세상에 길 잃고 방황할 때
절망 중에 빠진 이 몸 하나님 보호하사
생명샘이 솟아나와 새 힘이 넘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은 은혜의 말씀이라
누구든지 믿고서 참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이 사해주사 구원함 베푸시고
가이없는 큰 은혜로 늘 품어 주십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라
믿음으로 지키어 자유를 얻게되면
어려운 일 힘든 일도 담대히 할 수 있어
온전하신 말씀으로 승리케 하십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은 사랑의 말씀이라
험한 세상 살동안 언제나 돌보시고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지키시어
하늘나라 이르도록 인도해주십니다
이런 신앙의 고백이 우리를 날마다 순간마다 언제 어디서나 붙들어 주고 승리하게 하시는 은혜의 말씀이 되기를 소망한다.
고단한 계절이다. 사순절 새벽 기도회가 계속되고 있다. 찬송과 기도와 말씀 묵상 가운데 영혼에 풍성한 은혜가 임해서 그 어떤 마귀의 시험이라도 넉넉히 이기며 살아가는 주의 은혜가 임하길 소원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몰아쳐도 무너지지 않는 것은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몰아치면 크게 무너지고 말 것이다.”(현대인의 성경/ 마7:24-27)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것이 육체적 욕망에 대한 시험이라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은 명예와 인기에 대한 시험이다. 마귀는 시편 91편 11절과 12절의 성경 말씀을 유창하게 인용하면서 교묘한 방법으로 예수를 시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시편의 그 본문을 찾아 읽어 보면 마귀는 하나님을 말씀을 비슷하게 바꾸어서 교묘하게 시험하려고 달려 든 것이다.
이것은 에덴동산의 마귀가 뱀으로 다가와서 하와와 아담을 시험에 빠지게 한 방법과 같다. 에덴동산의 뱀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지 말라는 금지 명령을 교묘하게 바꾸어 말하며 유혹하는 마귀로 다가왔다. 신앙생활은 이처럼 마귀의 영적 접근을 분별해 내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라는 신명기 6장 16절의 말씀으로 마귀를 대적하셨다. 그렇다. 하나님은 시험의 대상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그렇게 무기력하고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가 아니시다.
며칠 전인 3월 6일, 목요일 오전 9시 58분경에 한미 연합 군사 훈련 중이던 KF-16 전투기 두대가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노곡리 마을에 오폭을 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민간인 15명, 군인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런 사고가 없어야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은 그럴 수 있다. 조종사가 좌표를 잘못 입력하는 바람에 그런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실패하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은 완전한 영이시다. 하나님은 못 하시는 것이 없으신 전능하신 영이시다. 하나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전지하신 영이시다. 하나님은 언제나 계시고 어디나 계신 영이시다. 하나님은 무소 부재 하시고 전지전능하신 영이시다.
마귀는 그런 주님을 알면서도 시험하려고 다가온 것이다. 그것이 마귀의 실체이다. 마귀는 좋은 영이 아니다. 마귀는 착한 영도 아니다. 마귀는 나쁜 영이며 사악한 영이다. 그래서 마귀는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에게까지도 집요하게 다가서서 시험하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와 같은 연약한 믿음의 사람들을 마귀가 가만히 두겠는가. 마귀는 끊임이 없이 나에게 접근한다. 밤낮이 없이 나를 넘어뜨리려고 한다. 그러므로 항상 영적으로 깨어서 마귀의 시험과 유혹을 분별하고 마귀의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마귀는 탐심을 갖도록 해서 성도를 무너트리려고 한다. 마귀는 인기와 명예와 공명심을 자극해서 믿음의 사람으로 하여금 타락하게 하고 시험에 빠져 넘어지게 한다. 그러므로 “이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아니면 마귀가 좋아하는 일인지”를 분별해서 자신을 신중하게 지켜 나갈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마지막으로 마귀는 예수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마귀가 자신에게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라고 유혹하였다. 터무니 없는 일이다. 천하 우주 삼라 만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런 유혹이 예수께 통하겠나.
우리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시험에 빠지고 불명예스러워지고 수치를 당하고 불행해지는 이웃들을 본다. 저명인사들 중에는 그런 경우가 더 많다. 왜 그럴까. 사람이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더 위험한 것이다. 나무가 크면 바람을 더 많이 받는다. 올 겨울 습설(濕雪)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아까운 소나무 가지가 부러지고 꺾여 나갔나 모른다. 겨울 앙상한 가지를 가진 나무들은 피해가 없었다. 그러나 화려한 상록수인 소나무가 치명상을 입었다. 사람으로 하면 사계절, 평생 승승장구하며 실패없이 잘 나가는 사람이 이처럼 더 위험한 것이다.
사람이 높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는 일도 어렵지만 그 높은 곳에서 하산하고 집에까지 안전하고 평안하게 돌아오는 일은 더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 않나. 왕의 자리가 쉽겠는가. 별을 다는 장군의 자리가 쉽겠는가. 대기업을 경영하고, 종합 병원을 경영하고, 백화점과 같은 대형 마트를 경영하고, 국가를 경영하는 일이 쉽겠는가.
사울은 하나님이 지명하시고 택하여 기름 부어 세우신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다. 그처럼 하나님의 총애를 입은 사울 왕인데 그의 말년은 잘못되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마귀의 시험과 유혹을 이겨 내지 못한 것이다. 사울은 스스로 왕이 된 것처럼 착각과 교만에 빠진 것이다.
사울에게 기름을 부었던 사무엘은 사사시대 말기의 최고 사사요 선지자요 제사장이었다. 그의 두 아들인 요엘과 아비야도 아버지의 대를 이을 사사였다. 그러나 사무엘의 두 아들들은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않았다. 이익을 따라서 뇌물을 받았다. 판결을 굽게 하였다. 온 나라 이스라엘에 소문이 났다. 사무엘 선지자의 두 아들이 못됐다는 소문에 전국에 파다하였다. 사무엘 상 8장에 나오는 기록이다. 왜 잘 못 된 것일까. 마귀의 시험을 이기지 못하며 누구나 불행하게 되고 누구나 마귀의 밥이 되고 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분명하게 마귀를 향하여 소리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그리고 말씀하셨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라는 신명기 6장 13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대적하였다. 우리가 왜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만 섬기며 살아가야 할까. 이것이 복된 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주 안에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한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평생 주를 떠나지 않고 살면서 주의 도우심을 간구해도 수 없는 시험과 유혹과 미혹과 시련과 환난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매 순간마다 파도처럼 나에게 밀려오는 마귀의 시험을 분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 믿으며 살고 하나님 경배하며 살아간다고 해서 다 부자 되고 무병장수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 하나님 하면서 살아간다고 해서 모든 것이 만사형통해 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여곡절과 별의 별 일과 사건과 사고가 끊임이 없는 세상에서 성령의 사람답게 살아가는 그 자체가 소중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31-39절에서 분명하게 선포하였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다 같이 읽자.
“그렇다면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라면 누가 감히 우리를 대항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다른 모든 것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발하겠습니까?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누가 우리를 죄인으로 단정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항상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 그런데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는단 말입니까? 고난입니까? 의로움입니까? 핍박입니까? 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이것은 성경이 '우리가 주를 위해 하루 종일 죽음의 위험을 당하고 도살장의 양 같은 취급을 받습니다.' 라고 한 말씀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거뜬히 이깁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지옥의 권세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은 것이나 깊은 것이나 그 밖에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서 오직 주님만을 경배하며 섬기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