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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랴의 찬가讚歌(눅1:67-79) 2024. 12. 8. 성서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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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4-12-08 21:00 조회 303 댓글 0
 

                      사가랴의 찬가讚歌(눅1:67-79)           2024. 12. 8. 성서주일

 

 

오늘은 강림절 두 번째 주일이며 또한 성서 주일이기도 하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말씀 안에는 생명이 있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다. 그 빛이 어둠 속에 갇혀 사는 인생에게 비치었다. 그러나 어둠의 지배를 받는 인생들이 그 빛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빛을 영접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깨닫고 믿게 되었다. 저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덧입게 되었다. 사람들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입은 분이었다. 그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육 개월 먼저 세례 요한을 이 땅에 보내셨다. 사가랴는 세례 요한의 아버지이다. 그 당시 유대 지역을 헤롯 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유대 땅은 이미 로마에 점령되어 있었다. 아비야 제사장 반열에 사가랴라 이름하는 제사장이 있었다. 그의 부인, 엘리사벳은 아론의 자손이었다. 저들 부부는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고 의롭게 살았다.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는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부인 엘리사벳은 자녀를 낳지 못했다. 저들 부부는 나이가 많았다. 

 

마침 사가랴는 반열의 차례를 따라서 그 해에 제사장의 직임을 맡아 하도록 제비 뽑혔다. 사가랴는 성전에 들어가서 분향하고 모든 백성들은 성전의 뜰에서 기도 하고 있었다. 그 때에 천사 가브리엘이 그에게 나타났다. 천사는 저들 부부에게 내년에 아들이 태어나게 될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으라고 했다. 그 아들은 주 앞에서 큰 자가 될 것이며 포도주나 술을 마시지 않고 어머니의 태에서 부터 성령 충만한 아이로 태어날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세상의 많은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선지자가 될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아들 요한이 태어나기 까지 제사장 사가랴는 말을 못하게 될 것이라고도 전해 주었다. 그 날 이후로 아들 세례 요한이 태어나기 까지 아버지 사가랴는 말을 못하게 되었다. 

사가랴는 그 해의 제사장의 직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서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그렇게 다섯 달이 훌쩍 지나갔다. 엘리사벳이 아들 요한을 잉태한지 여섯 째 달이 되었을 때에 천사 가브리엘은 나사렛 마을의 마리아에게 나타났다. 그리고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되었다고 알려 주었다. 무섭고 두려워진 마리아는 산골 마을에 사는 친척인 엘리사벳의 집으로 피신해서 지내게 되었다. 때가 되어 아들 세례 요한이 탄생하였다. 

 

아버지 사가랴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는 찬송을 불렀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내용이다. 그래서 이 분량을 ‘사가랴의 찬가’라고 제목 붙이는 것이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아들의 탄생과 더불어 아내 엘리사벳의 친척인 마리아의 태에 하나님의 아들이 잉태되어 자라나고 있는 것을 기뻐하고 감격해 하면서 이 찬송을 고백한 것이다. 

 

 

돌보시고 속량(贖良)하시는 하나님.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돌보시는 주님이시다. 정상적인 가장은 가정을 돌보고, 가족을 돌보고, 자녀들을 돌본다. 요즘 학대받는 어린이, 버림을 받는 어린이가 없지 않다. 적지 않다. 심지어는 엄마나 아빠의 잘못된 판단이나 결정으로 인해서 가족이 모두 함께 생명을 끊는 등 참담한 사건도 벌어지기는 한다. 그러나 정상적인 생각과 판단력을 가진 부모라면 끊임이 없이 자녀들을 돌아 보고 보살피며 사랑과 정성을 담아서 양육하려 한다. 그렇다.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풍성한 사랑과 긍휼과 자비를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쏟아부어 주시길 원하신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하나님은 아브람을 택하여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 연세 많던 아브람과 사래에게 아들 이삭을 허락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고, 사래를 사라라고 이름도 개명해 주셨다. 존귀한 아비, 존귀한 어미라는 뜻의 이름에서 열국의 아버지, 열국의 어머니라는 새 이름을 지어 주셨다. 오늘 묵상하는 본문에 등장하는 사가랴, 엘리사벳, 세례 요한,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 모두 다 아브라함의 혈통을 따라서 이 땅에 태어난 그의 후손들이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천하 만민을 모두 다 사랑하신다. 그러나 특별히 선택하신 민족 이스라엘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간섭하시고 임재하셨다. 우리는 선택받은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고 어떻게 섭리하시고 어떻게 기사와 이적을 나타내 보여 주셨는지를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고는 한다.

 

본문에 보면 제사장 사가랴는 하나님을 ‘돌보시는 하나님, 속량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찬양하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이 돌보아 주시지 않았다면 나이 많이 늙어 가던 저들 부부,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어찌 아들 세례 요한의 탄생이 가능했겠는가. 생각하여 보라. 하나님의 돌보심이 아니라면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있는가. 큰일이든 작은 이든 다 마찬가지이다. 개인의 일이든 국가적인 일이든 다 그렇다. 평민의 일이든 임금의 일이든 하나님이 돌보아 주시지 않으면 잘 될 수 있는 일이 있는가. 하나님은 인간의 흥망성쇠와 길흉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이걸 깨달아 알고 믿고 따르지 않으면 밤낮  무당에서 가서 물어 보고 무속인에게 사로잡혀 지내게 되고 만다. 세상에는 오늘 날과 같은 최 첨단 21세기 문명 사회 속에 살면서도 무속인에게 사로 잡혀 살아 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요즘처럼 나라가 시끌시끌 하니까 별의별 유언비어가 다 돌아다닌다. 2024년 10월 3일 오후 10시 30분에 발표된 비상 계엄의 그 시간, 10월 3일 오후 10시 30분을 한자로 합성하면 임금 왕자 세 글씨가 나란히 반복된다고 한다. 인터넷 신문 기사에 떠돌아 다니는 기사이다.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세상은 무속적인 말들로 혼란하다. 어느 족집게 무속인이 요즘의 시끄러운 정국을 이미 몇 달 전에 예언했노라고 떠들기도 한다. 그래서 어쨌다는 말인가. 

 

세상은 박수와 무당이 돌보는게 아니다. 세상은 무속인들의 말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개인과 가정과 나라와 열방 가운데 그 시대의 범사를 주관하고 다스리고 돌보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이 가능하게 하신 분이 누구신가. 광야 사십 년 동안 만나를 공급해 주시고 반석에서 생수가 콸콸 터져 나오게 해 주신 분이 누구신가. 모세가 죽은 후에도 여호수아를 앞장 세워서 요단 강을 육지처럼 건너게 하신 분이 누구신가.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을 칼과 창과 활을 사용하지 않고 함락하게 하신 분이 누구신가. 베들레헴 시골 마을의 양 치던 어린 소년 다윗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에 세움 받는 임금 다윗이 되게 하신 분이 누구신가. 

본문에 돌아와서 보면, 아들 세례 요한을 낳아 양육하도록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의 가정에 아들을 주신 분이 누구신가. 마리아의 태 중에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잉태되어 자라나게 하신 분이 누구신가 말이다. 

 

그래서 사가랴는 이렇게 고백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라고 말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택한 개인과 민족을 돌보실 뿐만 아니라 속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속량’(贖良)이란 몸값을 받고 노예를 풀어놓아 자유인이 되게 하는 것을 뜻한다. 43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자유를 주시고 해방을 주시고 광야로 이끌어 내신 분이 누구신가. 가나안의 철기 문명을 점령하고 넘쳐 나는 포도나무, 감람나무, 무화과 나무의 열매를 배 불리 먹게 하신 분이 누구신가. 짓지 않은 집에 살게 하시고 파지 않은 우물의 물을 마시도록 인도해 주신 분이 누구신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셔서 그가 누구인지 깨달아 알고 믿고 따르고 섬기는 개인과 가정과 나라와 민족마다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리고 아들딸의 권세를 누리도록 속량의 은혜를 선물해 주신 분이 누구신가 말이다. 성탄절은 그래서 기쁘고 그래서 즐겁고 그래서 감사하고 그래서 사랑과 소망이 넘치는 절기인 것이다. 

 

 

다윗의 집에 구원(救援)의 뿔을 일으키신 하나님.

지난 주일에 묵상한 예레미야 33장의 말씀 묵상처럼,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그 종 다윗의 집에서 구원의 뿔로 태어나게 하셨다. 뿔이란 힘이 세고 강한 것을 상징한다. 소의 뿔처럼 강한 것은 없다. 사자 같은 맹수라도 물소의 뿔에 치이면 옆구리의 창자가 터지고 만다. 성경이 말하는 ‘뿔’이란 하나님의 전능하심,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다윗이 집안에 후손으로 이 땅에 보내신 구원의 뿔이시다. 인간을 죄와 사망과 어둠에서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 세상에는 수 많은 종교가 있다. 별의 별 종교가 다 많다. 그러나 진리는 하나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를 믿고 따르고 섬기는 인생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전능자이시다. 하나님은 개인의 구원, 가족의 구원 뿐만 아니라 민족이라고 일순간에 구원하시다. 단숨에 구원하시다. 그것이 출애굽의 기적이다.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에 정탐꾼 두 사람을 보낸 적이 있다. 저들 두 사람은 기생 라합의 집에서 며칠을 지내게 되었다. 여호수아 2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리고 성의 성곽 곁에는 주막을 경영하며 부모와 형제 자매들과 집안을 돌보는 비천한 여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라합이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기생 라합’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 기생 라합은 광야에서 여리고 성을 정탐하려고 왔던 정탐꾼들이 누구인지를 알아 보았다. 그래서 저들의 안전을 돌보아 주었다. 저들에게 숨을 곳을 마련해 주었다. 피하여 안전하게 여리고 성을 떠나는 길도 안내해 주었다. 그러면서 저들과 약조하였다. 때가 되어 당신들의 군대와 세력이 이 곳, 여리고 성에 오게 된다면 나와 내 가족의 운명을 책임져 달라고 청원하였다.

 

정탐꾼의 동선을 파악한 어떤 사람들이 여리고 성의 왕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기생 라합의 집에 들이 닥친 왕의 군대가 저들 정탐꾼을 색출하려고 했다. 기생 라합은 지혜롭게 말하였고 저들의 목숨을 보호해 주었다. 기생 라합은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라고 저들 정탐꾼들이 믿는 하나님께 대한 관심을 표하였다. 붉은 줄 약조를 징표로 하고 세월이 흘러갔다. 때가 되어 여호수아의 군대는 여리고 성을 점령하게 되었다. 기생 라합은 성벽 창가에 붉은 줄을 내려뜨렸다. 여호수아서 6장에 보면, 여호수아가 앞장선 이스라엘 군대의 여리고성 함락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칼과 창을 사용하지 않고 여리고 성을 함락하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승리였다. 여호수아는 정탐꾼 두 사람에게 미리 확인시켰다. 그리고 여리고 성을 불태우기 전에 기생 라합과 그의 부모 형제 모든 가족을 성 밖의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도록 도왔다. 그 두 사람의 정탐꾼 중의 한 사람의 이름은 ‘살몬’이다. 마태복음 1장 5절에 보면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라는 내용이 나온다. 맞다. 여리고 성의 원주민 기생 라합은 이스라엘의 정탐꾼 살몬의 아내가 되었다. 그가 낳은 아들 보아스는 다윗 왕의 증조 할아버지이다. 이것이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안에서 일으켜 세워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인 것이다. 

 

나라가 어수선하고 세상이 시끄러우나 올해도 어김 없이 성탄절이 다가 오고 있다. 오늘 묵상하는 말씀과 더불어 ‘구원의 뿔’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각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한 구원의 은총을 받아 누리는 주인공들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우리의 발을 평강(平康)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오늘 읽은 본문인 누가복음 1장 79절에 보면,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를 믿는 성도의 삶을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이시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이시다. 

 

생각하여 보라. 이 세상에는 잘난 사람, 대단한 사람, 뛰어난 사람, 유능한 사람, 인기가 하늘로 치솟는 사람 등등 제 잘난 맛에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아무리 대단하고 아무리 잘 나가는 그 누구라도 그 살아가는 발걸음에 평강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며칠 전인 12월 5일, 미 최대 건강보험사 유나이티드헬스케어(UHC) 대표인 브라이언 톰슨은 맨해튼 번화가를 걷던 중에 젊은 남성 괴한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고 범인은 도주했다. 브라이언 톰슨의 나이는 50살이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별의 별 우여곡절을 다 겪는 것처럼 심판과 상급과 구원과 영생이 없다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택한 백성의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은 양떼와 같은 인생들이 이 험한 세상에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죄의 길에서 벗어나서 주님이 원하시는 의로운 자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악의 길에서 벗어나서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는 자의 편에 서길 원하신다. 거짓된 길에서 벗어나서 진리의 편에서 서고, 진실한 자의 삶을 살아가길 원하신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사랑 받는 백성들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앉아 있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아침에 돋는 해처럼 그 은혜와 사랑의 빛을 택함 받은 백성들에게 비추어 주시길 원하신다. 우리는,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주께서 항상 지키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

 

라고 찬송하지 않나.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 

 

어린 아이 같은 우리 미련하고 약하나

주의 손에 이끌리어 생명길로 가겠네

 

라는 찬송도 부른다. 그렇다. 신앙 생활이란 우리 주님이 앞서 가신 그 발자취를 따라 사는 것이다.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비록 어린아이처럼 미련하고 연약하지만 주님의 손에 이끌려서 생명길로 인도함을 받는 것이다. 

 

주님과 더불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가 각 사람에게 평강이 임하게 되는 법이다. 주님을 멀리 따나서 평강을 누린 자가 있는가. 없다. 예수의 비유 중에 집 떠난 둘째 아들의 비유를 보라. 그 많은 유산을 받아 가지고 타국에 갔다. 돈이 많으니 허랑방탕하게 살았다. 날마다 주색 잡기를 즐겼다. 결국 빈털터리가 되고 거지가 되고 말았다. 맞다. 주님 떠나서 살아가면 그렇게 되고 만다. 이는 왕이라도 마찬가지고 아무리 잘 나가는 방백이라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의 인물들을 보라.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왕이나 이세벨의 운명을 보라. 남왕국 유다의 므낫세 왕 같은 이들을 보라. 므낫세는 다윗왕의 후손이다. 그런 그가 어떻게 되었는가. 자그만치 55년동안이나 왕이었다. 열왕기하 21장에 보면 므낫세왕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게 담겨 있다. 그가 왕이 될 때의 나이가 12살이었다. 그렇게 시작해서 55년동안 왕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헵시바였다. 왜 어머니 이름을 기록할까. 다윗의 혈통의 아들 므낫세를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답게 키워내지 못했다는 고발이 아닌가. ‘헵시바’란 “나의 기쁨이 그에게 있다”라는 좋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므낫세는 그의 아버지 히스가야 선한 믿음의 길을 따르지 않았다. 성경은 므낫세에 대한 기록을 시작하자마자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라고 고발하고 있다. 므낫세는 이방 사람의 가증한 우상 숭배에 집착하였다.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산당을 다시 세웠다. 바알의 제단을 다시 쌓았다. 아세라 목상을 세웠다. 해와 달과 별들을 숭배하는데 앞장섰다. 심지어는 성전 뜰에다가 일월성신을 섬기는 제단을 따로 세웠다. 왕자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했다. 점치기를 즐겨했다.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였다. 므낫세왕은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악을 더 행했고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다. 스스로 만들고 아로새긴 아세라 목상을 성전 안에다가 세웠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당장 그를 처단하지 않으시고 길이 길이 참고 기다리셨다. 하나님은 므낫세가 회개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므낫세왕은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었다. 열왕기하 21장 16절에 보면, “므낫세는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끝에서 저끝까지 가득하게 하였더라”라고 고발하고 있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죄와 악으로부터 떠나서 우리 각 사람을 인도하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이다. 그렇게 할 때에 주님이 허락하시는 평강이 각 사람의 발 걸음마다 가득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요14:27)

 

그렇다. 주님은 평안을 주시되 근심과 두려움을 겸하여 주시지 않는다. 주님이 공급해 주시는 평안, 평강, 평화, 편안함이 각 사람에게 은혜로 임하는 복된 강림절기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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