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사람 느헤미야(느1:1-11) 2024. 9. 1
오늘부터 9월 한 달 내내 느헤미야서를 날마다 묵상할 것이다. 구약 성경의 인물들 중에 모세나 다윗이 중요하고 창세기의 요셉이나 다니엘을 빼어 놓을 수 없다. 느헤미야 또한 구약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 매우 소중한 인물이다.
남 유다가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멸망한 것은 주전 586년이다. 그러나 제 15대 요시야 왕을 끝으로 여호아하스는 왕이 된지 삼개월 만에 애굽으로 끌려 가서 죽임 당했다. 여호야김이 왕위에 올랐으나 바벨론의 침략으로 어수선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결국 11년을 버티던 중에 그도 죽었다. 대를 이어 열 여덟살에 왕위를 이은 여호야긴 왕은 즉위 삼개월 만에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에게 끌려 가고 말았다. 바벨론은 숙부인 맛다니야를 대신하여 왕위에 앉혔다. 그리고 그 이름을 시드기야라고 고쳐서 불렀다. ‘여호와의 공의’라는 뜻이다. 그의 나이 22살때의 일이다. 우리가 열왕기 하의 마지막 장면에서 잘 아는대로 시드기야는 11년 만에 설명하기도 비참하고 불행한 상태에서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남 유다는 망하고 말았다. 성경은 므낫세의 55년 통치의 악이 불러온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다. ‘여호와의 공의’라는 이름으로 개명된 시드기야의 이름이 뜻하듯 공의의 하나님은 포로 생활의 풀무 불 속에 언약 백성들을 집어 넣으셔서 연단하고 연단하셨던 것이다.
예루살렘은 불바다가 되고 수 많은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 가야만 했다. 긴긴 포로 생활을 뒤로 하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와 개입으로 선조들의 땅 유다와 예루살렘에 다시 돌아가서 살게 된 것은 꿈만 같은 일이었다. 이것을 우리는 포로 귀환이라고 말한다. 3차례로 나누어져서 이어졌다. 그 첫 포로 생활에서의 귀환이 주전 537년, 스룹바벨을 앞장 세운 제 1차 포로 귀환이다. 스룹바벨이 앞장 서서 무너진 솔로몬의 성전 터에 제 2 성전 건축의 꿈을 이루었다. 그리고 다시 80여년 세월이 흐른 후인 주전 458년에 에스라를 중심으로 제 2차 귀환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14년 후인 주전 445년에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한 제 3차 귀환의 길이 열렸다.
원래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한 권의 책이었다. 에스라 1서, 에스라 2서로 불리다가 나중에 두 책으로 나누어졌다. 저들은 거의 동시대의 인물들이다. 에스라서의 저자는 에스라, 느헤미야서의 저자는 느헤미야로 알려져 있다.
느헤미야 8장에 보면 학사 에스라가 앞장 서서 예루살렘 성의 수문 앞 광장에 온 백성들이 모인 자리에서 모세의 율법책을 낭송하는 장면이 소개된다. 백성들 앞에 나선 에스라가 서서 모세의 율법책을 펼쳐 들었다. 모든 백성들은 손을 높이 들고 ‘아멘 아멘’하였다. 그리고 몸을 굽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다. 그 장엄한 장면을 상상하여 보라.
에스라는 큰 소리를 모세의 율법책을 읽어 줄 뿐만 아니라 일일이 풀어서 해석해 주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일제히 울기 시작하였다. 말씀 회복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슬피 우는 백성 백성들을 느헤미야와 에스라와 레위 사람들이 나서서 “오늘은 여호와의 성일인데 울지 말고 살진 고기를 먹고 단 것을 마시자”라고 위로하였다. 음식을 준비하지 못한 이들이 있으면 서로 나누어서 먹도록 하라고 권하였다.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8:10)라고 권면하고 위로하였다.
느헤미야서는 “하나님이 포로 생활 중이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떻게 선조들의 땅에 돌아가게 하셨는지. 하나님은 하나님이 선택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게 하셨는지.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과 기도의 회복 운동이 일어나게 하셨는지. 스룹바벨 성전의 재건이 역사적으로 감격스러운 일이듯이 하나님은 어떻게 하여 느헤미야를 앞장 세우셔서 52일만에 예루살렘 성벽 중건 공사를 끝내게 하셨는지. 예루살렘 중심의 삶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등등을 교훈하고 있다.
아닥사스다왕의 술 관원 느헤미야.
느헤미야서는 느헤미야의 아버지 이름과 그의 아들 느헤미야의 이름이 기록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느헤미야는 하가랴의 아들이다. 느헤미야는 제사장 가문의 후손인 에스라나 다윗 혈통의 후손인 스룹바벨과는 다른 신분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평범한 가문의 후손인 느헤미야에게 탁월한 능력과 사회 생활의 역량을 주셔서 그로 하여금 페르시야 제국의 아닥사스다 왕의 곁에서 술 관원으로 출세하게 하셨다. 아버지 하가랴는 ‘여호와께서 붉게 하신다’는 이름 뜻을 갖고 있다. ‘여호와께서 풍성하게 하신다’는 의미의 이름이다. 느헤미야란 ‘여호와께서 위로하신다’는 뜻의 이름이다. 실로 하나님은 느헤미야를 택하셔서 그의 당대에 동족을 위로하며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만방에 널리 드러내도록 그를 사용하셨다.
“아닥사스다왕 제 이십년 기슬르월”이라고 하였다. 바사 즉 페르시아 제국의 아닥사스다 왕 재위 20년은 주전 445년이다. 기슬르월이란 바사의 표기법으로 11-12월경이다. 수산 궁은 왕이 겨울 궁전으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술 관원이란 왕의 음식과 마시는 술을 관리하는 요직이다. 왕이 마시기 전에 미리 시음하였다. 그러하다 보니 왕의 신복 중의 신복으로 왕의 생명과 직결되는 절대 신임을 받는 자리였다. 궁중 관리와 왕의 신변 보호와 왕의 제반 사무를 총괄하는 막강한 보직이다. 창세기의 요셉이 감옥에서 바로 왕의 떡 맡은 관원과 술 맡은 관원을 만난 적이 있다. 그러한 인연으로 나중에 술 맡은 관원이 복직되고 그의 소개로 바로 왕의 꿈을 해석 하는 자리에 불려 나가게 되었다. 그 날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요셉은 일약 바로 왕의 총애를 받는 애굽의 제 2인자가 되었다. 그처럼 술 맡은 관원의 권한과 직책은 왕의 곁에서 두터운 신임을 받고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지난 날 남 유다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갔다. 포로의 땅에서 살아가면서 후손이 태어났다. 느헤미야는 바벨론이 망하고 메대와 바사 즉 페르시아 제국이 주변 국가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시대에 성공하고 출세한 인물이었다. 생각하여 보라. 내 나라에서이든지 이민 사회에서이든지 혹은 그 어떤 형편, 그 어떤 상황, 그 어떤 처지에서이든지 성공하고 출세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느 시대에나 준비된 하나님의 사람들을 들어 사용하신다. 믿음으로 준비되고 실력으로 준비되고 능력으로 검증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구별하여 택해서 사용하신다. 물론 세상에는 실력이 뛰어나고 능력이 탁월한 인물들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을 절대로 신뢰하고 하나님을 믿는 분명한 믿음 가운데서 준비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시려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시는 것을 본다.
에스더는 부모를 일찍이 잃었다. 고아가 되었다. 그런 그를 돌본 것은 사촌 오빠 모르드개였다. 바사, 즉 페르시아 제국에 아하스에로 왕이 왕비 와스디를 폐위하고 새로운 왕비를 간택하려고 하였다. 바사 제국의 제 5대 왕인 아하스에로 왕은 느헤미야 시대의 왕이었던 제 6대 임금 아닥사스다 왕의 부친이다. 에스더는 어려서부터 곱고 아리땁게 자라났다. 사촌 오빠 모르드개는 사촌 여동생 에스더를 딸처럼 귀하게 돌보아 양육하였다. 나라 안에 얼마나 많은 새로운 왕비의 후보가 넘쳐났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에스더로 하여금 아하스에로 왕의 새로운 왕비의 지위에 오르게 하셨다. 그 시대에 왕의 총애를 받는 막강한 권력자 중에 하만이란 자가 있었다. 하만은 무릎을 꿇고 절하려 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 중심 신앙으로 살아가려던 모르드개를 못 마땅하게 였다. 하만은 모르드개가 유대인인 것을 알게 되었다. 하만은 유대인인 모르드개를 미워할 뿐만 아니라 그의 동족 유대인을 증오하게 되었다. 하만은 유대인을 말살하고 싶어하였다. 하만의 유대인 말살 음모를 알게된 모르드개는 이러한 사실을 왕비가 된 에스더에게 알렸다. 에스더는“죽으면 죽으리이다”(에4:16)라는 믿음으로 동족들과 함께 삼일 밤낮을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하나님은 모르드개를 통하여 부모 잃은 에스더를 역사적인 인물로 양육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가 된 에스더로 하여금 죽으면 죽으리이다의 절대 각오의 믿음으로 역사적인 난국을 돌파하게 하셨다.
왜 공부해야 하는가. 왜 실력을 키워야 하는가. 왜 재주와 역량을 개발해야 하는가. 왜 사회생활에 잘 적응할만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리매김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준비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그 시대에 하시려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기 때문이다.
포로 생활 이후 제 1차, 제 2차 예루살렘 귀환의 길이 열렸다. 이미 스룹 바벨을 앞장 서게 하셔서 제 2 성전 건축도 가능하게 하셨다. 그러나 포로 귀환의 길이 열린지 무려 150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무너진 예루살렘 성곽이 중건되지 못하고 황폐한 채 방치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느헤미야의 동생인 하나니로 하여금 수산 성에 거하던 친형인 느헤미야를 만날 수 있도록 하셨다. 하나니란 ‘하나니야’라는 이름인데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이다. 아마도 하나니는 제 2차 포로 귀환의 때인 주전 458년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 그가 예루살렘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서 힘을 쓰던 중에 무려 14년 세월 만에 수산 성의 먼길을 찾아 와서 친형 느헤미야를 만난 것이다. 느헤미야 7장 2절에 보면 “내 아우 하나니아 영문의 관원 하나냐가 함께 예루살렘을 다르리게 하였는데”라는 내용을 보면 느헤미야의 아우 하나니도 형 못지 않게 탁월한 지도력과 행정력을 가지고 예루살렘의 안정과 포로기 이후의 재건 사업에 앞장섰던 인물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렇지 않나. 직책이나 직위라는 것이 주어지고 맡겨진다고 감당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그만한 실력과 역량을 준비하고 있는 자에게 직책이 주어질때에라야만 피차에 좋은 결과를 성취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실로 하가랴는 두 아들 느헤미야와 하나니를 포로의 땅에도 하나님 중심의 믿음을 가진 역량 있는 시대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하도록 양육한 믿음의 아버지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예루살렘의 형편을 전해 들은 느헤미야.
동생 하나니는 몇 사람의 수행원과 함께 1,200km거리의 멀고 먼 길을 예루살렘에서 수산 성을 찾아갔다. 느헤미야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물었다. 동생에게서 전해들은 소식은 참담하였다.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여전히 큰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능욕을 받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진 채 그대로 폐허로 남아 있습니다.
성문들을 불에 타고 성한 곳이 없습니다.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동족들과 포로의 땅에서 귀환했지만 손 쓸 곳이 너무 많은 참담한 환경의 소식을 접한 느헤미야는 여러 날을 주저 앉아서 울고 슬퍼하였다. 그렇지 않나. 환난은 계속되고 능욕을 당하는 이들의 고통과 아픔이 여전한 소식을 전해 들은 느헤미야의 마음이 어떠하였겠나.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의 시대의 영화가 다 어디로 가고 폐허의 상태로 방치된채 성곽은 무너지고 성문은 불타 버린 채 긴긴 세월 성벽의 무너진 돌들이 나뒹굴고 풀 숲이 우거져 버린 처참하고 황량한 폐허의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는 며칠 몇 날을 주저 앉아 울고 슬퍼 하였다.
배우 차인표는 소설을 쓰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아버지는 우성해운의 차수웅 장로이다. 2023년 7월에 별세하였다. 그는 가족을 소중히 여기며 사회 생활을 건실하게 살아가는 모범적인 연예인 중의 한 사람이다. 어느 교회의 장로이다. 그가 쓴 소설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 본다면>이 올 가을 학기부터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의 필독 도서로 선정되었다. 옥스퍼드 대학교 안에 있는 38개의 칼리지 도서관마다 그의 책이 비치된다고 한다. 그의 소설은 영어와 프랑스어와 독일어로 번역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1997년 8월 4일의 일이다. TV를 보고 있던 그는 인천 공항에서 생중계로 중계되는 장면에 시선이 멈추었다. 공항에서 입국장 문이 열리니까 어떤 자그마한 할머니 한 분이 머리는 짧고 두꺼운 안경을 쓴 눈이 동그란 할머니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분은 캄보디아 정글에서 세상에 알려 지기 두어 달 전에 발견된 훈 할머니(1926-)라는 분이셨다. 그 할머니는 16살 때였던 1942년에 위안부로 끌려가셨다가 55년 만에 고향의 품으로 돌아오는 장면이었다.
차인표는 위안부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비참한 운명을 생각하는 슬픈 감정 그리고 일본군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 시대의 젊은 여성들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 내지 못한 시대적인 착잡한 감정들이 그의 생각을 사로 잡았다. 몇 달이 지나도록 그런 생각이 그의 머릿 속에 맴돌았다. 그런 주제로 소설을 써 보려고 하였다. 문학 수업을 받아 본 적이 없는 그에게는 난감한 일이었다.
작가는 우리나라가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채 가난하고 핍박받던 시절을 맨몸으로 버텨 낸 우리 어머니의 어머니, 아버지의 아버지들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었다. 10여년의 우여곡절 끝에 한 권의 소설책의 지면이 채워졌다.
소설의 배경은 1930년대 백두산 기슭의 호랑이 마을이라고 한다. 엄마와 동생을 해친 호랑이 백호를 잡아 복수하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호랑이 마을로 찾아온 호랑이 사냥꾼 용이와 촌장 댁 손녀 순이 그리고 미술학도 출신의 일본군 장교 가즈오가 등장 인물이다.
그저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살고 싶었던 그 시대의 순수한 젊은이들이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마주한 절망 속에서도 서로를 향한 믿음과 사랑, 헌신적 선택으로 격정의 한때를 관통해 나간다. 작가는 ‘사랑과 용서, 화해’라는 주제 의식을 진중하고 따스한 시선으로 풀어내면서도 세 주인공을 중심으로 속도감 있고 밀도 있게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또한, 치밀한 세부 장면 구성과 고증을 거친 백두산 마을의 수려한 풍경 묘사하려 하였다.
이 소설을 통해 작가 차인표는 평온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웃에게“당신이 그 시대에 살았다면 어땠을까”,“지금의 우리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똑같은 뉴스, 똑같은 사고나 똑같은 사건을 경험하거나 목격하고도 어떻게 반응하느냐의 문제는 천차만별이다. 차인표가 그랬다. 그는 어느 날 뉴스의 한 장면을 보고 그냥 스쳐 지나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슬프고 아프고 처연했던 일제 식민지 시대의 실상을 마음에 품었다. 그리고 마음 속에 치 밀어 오르는 분노, 안타까움, 연민, 실망, 상실감, 자괴감, 서운함 등의 착잡한 감정들을 가라앉혀 보려고 무척이나 씨름하였다. 차인표는 침략, 억압, 수탈, 인권 유린, 성폭력, 강제 노동으로 이어지는 식민지 백성의 울분, 억울함, 끝이 보이지 않는 고난의 세월의 이야기를 녹여 담아서‘용서, 사랑, 화해’의 숭고한 가치를 소설로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소설 책을 출간했으나 별로 팔려 나가길 않았다. 그러나 역사 속에 잊혀져 가던 그의 소설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 본다면>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TV화면에 뉴스의 한 장면으로 지나가는 훈 할머니의 이야기가 그이 마음과 생각을 사로 잡고 분노의 역사 의식을 침전 시킨 긴긴 시간 후에 ‘용서와 사랑과 화해’를 주제로 한 역사적인 작품이 탄생되게 한 것이다.
1852년에 세상에 나온 해리엇 비처 스토(Harriet Elisabeth Beecher, 1811-1896)의 장편 소설<톰 아저씨의 오두막> (Uncle Tom’s Cabin)도 그렇게 탄생된 작품이 아닌가.
1862년, 프랑스의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 1802-1885)의 소설 <레미제라블>도 그렇게 탄생되지 않았나. ‘Les Miserable’은 ‘불쌍한 사람들’‘비참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본문으로 다시 돌아와 보자. 태어나서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선조의 땅 유다와 예루살렘 성의 폐허의 소식과 그 곳에서 환난과 능욕을 당하며 생명을 부지하고 살아가는 동족들의 소식을 접한 느헤미야는 며칠 몇 날을 주저 앉아 울며 슬퍼하였다. 몇 날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않았다. 그는 크게 슬퍼하였고 울고 또 울었다. 하나님은 그런 느헤미야의 눈물을 보셨고 그의 울음 소리를 들으셨다.
기도하기 시작한 느헤미야.
느헤미야는 며칠 몇 날을 제대로 먹지 않았다. 그는 금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무엇을 기도하였나. 5-11절까지 이어지는 느헤미야의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주의 사랑 받는 백성에게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
주의 명령을 지키는 자에게 약속을 지켜 주시는 하나님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
밤낮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죄의 고백을 들으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
이라고 기도하고 있다.
느헤미야의 기도는 회개하는 기도로 이어진다.
하나님.
우리는 주 앞에서 악을 행했습니다.
주의 명령에 불순종하였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주신 법과 규정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범죄하면 세계 각처에 흩어 버리시겠다는 말씀(레26장)을 경홀히 여겼습니다.
주의 명령에 순종하면 포로로 잡혀간 땅에서라도 다시 택한 곳 예루살렘으로 불러 모으리라고 하신 약속(신30장)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주여 우리 선조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해 주시옵소서.
주의 크신 능력과 힘으로 구원하신 백성들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주여.
이 종의 기도를 들어 주옵소서.
주여.
주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어 주옵소서.
주여.
주의 종된 저희들을 도와 주옵소서.
주여.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에 은혜를 베푸셔서
그 은혜를 저희들이 입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백성들의 기도 소리를 들으신다.
하나님이 친히 약속해 주셨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게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50:15)
말씀과 기도의 힘을 의지하고 주 안에서 승리하는 올 한해의 후반기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