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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엡5:15-21) 2024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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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4-08-18 23:22 조회 469 댓글 0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엡5:15-21)        2024. 8. 18

 

 

지난 몇 주 동안 우리는 에베소서를 통해서 겉 사람과 속 사람, 옛사람과 새 사람에 관한 주제의 말씀을 나누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다시금 반복해서 그리스도인의 생활 강령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라.”“지혜로운 자로 살아가라”라고 권면하였다. 그러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일까.

 

사도 바울이 말하는 ‘주의 하라’는 강조는 “어떤 인생길을 걸어가야 할 지를 주의 깊게 살피라”는 말씀이다. 그렇지 않나. 어른은 어른대로,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자신의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주의 깊게 살피며 살아가지 아니하면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을 겪을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지혜 없는 자’와 ‘지혜 있는 자’의 대조는 에베소서 5장의 앞 부분에 나오는 내용의 강조이다. 에베소서 5장 8절에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라고 분부하였다. 즉 ‘지혜 없는 자’란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자이다. 반대로 ‘지혜 있는 자’란 빛 가운데서 살아가는 자이다. 어둠의 일이란 겉사람의 모습이며 옛사람의 모습이다. 반대로 빛의 자녀의 지혜로운 모습이란 그 열매를 보면 안다. 에베소서 5장 9절은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라고 하였다. 자, 그러면 빛의 자녀답게 살아서 빛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으려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

 

 

지혜롭게 세월을 아끼라.

“세월을 아끼라”라는 말씀은 대단히 심오한 교훈이다. KJV에 보니까 “Redeeming the time”이라고 하였다. NIV성경에서는 “making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세월’은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달력에 표시된 시간이다. 그러나 카이로스의 시간이란 하나님이 부여 하신 특별한 의미의 시간, 특별한 기회의 시간을 뜻한다. 역사적인 순간의 시간이다. 

 

개인에게도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는 그 어떤 시간이 있다. 큰 실패의 순간 혹은 큰 성공의 순간이 그러하다. 부끄러웠던 큰 실수의 순간이나 자랑스럽고 떳떳했던 그 어떤 순간도 그러하다. 큰 의미와 교훈으로 기억되는 순간이 그러하다. 이는 공동체와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로 하면 3. 1절, 광복절, 6. 25, 1953년 7월 27일의 전쟁이 멈추고 휴전된 날 등은 모두 다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사도 바울은 때가 악하기 때문에 세월을 아껴야 한다고 하였다. 인생이 일장춘몽(一場春夢) 같이 지나가 버리니 세월을 아끼라는 말이 아니다.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이다. 악한 세상에서 어둠의 지배를 받으며 악을 행하며 죄를 범하며 살아가는 것은 지혜롭게 세월을 아끼며 살아가는 자의 모습이 아니다. ‘아끼라’는 원어인 ‘엑사고라조’라는 단어의 뜻은 ‘그에게서 사들이다. 모두 다 사들이다’라는 의미이다. 세월을 최대한 잘 사용하라는 뜻이다. 

 

세월을 아끼며 살아가지 못하는 자의 실상이란 에베소서 5장 11절의 교훈으로 하면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는 자이다.”이다. 12절에 보면 “말하기도 부끄러운 은밀한 일을 행하며 살아가는 자들이다.”이다. 14절에 보면 “죽은 자들이다.”에베소서 5장 3-5절에는 세월을 아끼지 않고 세상을 지혜롭지 못하게 살아가는 자들의 세태를 자세하게 고발하고 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지혜롭게 세월을 아끼며 살아가는 자는 어떻게 살아가는 자인가.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엡5:1)

서로 사랑 가운데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엡5:2)

감사하는 말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엡5:4)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을 자답게 살아가야 한다(엡5:5)

 

라고 하였다. 우리가 다 노아나 모세나 여호수아나 갈렙처럼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사사들 중의 그 유명한 기드온이나 드보라처럼 살 수는 없을 수 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과 같은 선지자들처럼 살기는 쉽지 않다. 누구나 다 에스더처럼, 느헤미야처럼 살 수 있는게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 각 사람은 최소한 내게 주어진 시간과 세월 앞에서 악에게 지고 죄에 빠져 버리는 어리석은 삶을 살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어둠에 갇혀서 지혜 없는 자로 살아서는 안 될 것이다. 6절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이 진노하실 불순종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될 것이다. 거듭난 하나님의 아들딸답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빛의 사자들이여>라는 502장 찬송에서 찬송하지 않나. 

 

“빛의 사자들이여 어서 가서 어둠을 물리치고

 주의 진리 모르는 백성에게 복음의 빛 비춰라

빛의 사자들이여 복음의 빛 비춰라

죄로 어둔 밤 밝게 비춰라 빛의 사자들이여”

 

우리는 누구나 다 이 땅에서 한평생을 살다가 주님 앞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세월을 아끼는 지혜로운 삶일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권면하였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하나님 안에서 하루 하루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가꾸어 가길 축원한다. 

 

 

주의 뜻을 이해하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나를 향하신 주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다. 여기서 ‘이해한다’는 말은 ‘깨닫는다’, ‘같은 위치에 놓는다’라는 뜻이다. 신앙으로 살아가는 증거는 끊임이 없이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분별해 나가는 나날이어야만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주의 뜻을 이해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의 모습에 대하여 명쾌하게 선포하였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그렇다. 신앙으로 살아가는 증거는 매 순간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을 분별해 나가는 과정이어야만 한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일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일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이 온전하신 뜻이 무엇일까

 

를 일마다 때마다 분별하며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 악한 세대를 본 받지 말아야 한다.

날마다 순간마다 마음을 새롭게 하고 주님 안에서 변화를 추구해 나가야 한다. 

 

사도 베드로는“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벧전 5:8-9)라고 권면하였다. 

 

에서와 야곱은 이삭의 아내 리브가에게 태어난 쌍둥이 형제였다. 그러나 에서는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부모에게 큰 근심거리가 되고 말았다. 창세기 26장 34절 이하에 보면 에서는 나이 사십 살이 되었을 때에 가나안 원주민인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엘론의 딸 바스맛을 동시에 아내로 맞아 들었다. 에서와 저들 두 며느리는 부모인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다. 말라기 1장 2-3절에 보면 하나님은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라고 하였다. 

 

상급과 책망이 하나님께 있다. 영생과 영벌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축복과 저주가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말1:4) 무슨 말씀인가. 이는 하나님이 에돔 족속에게 하신 경고의 말씀이다. 에돔 족속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였다. 하나님의 뜻을 겸허하게 구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말1:4)라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증거는 무엇인가. 일마다 때마다 언제 어디에서나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깨달아 알고 이해하려는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라.

김수환 추기경은 “술에 취하면 정신을 잃고 마약에 취하면 이성을 잃고 TV에 취하면 모든 게 마비된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취하는 것이 문제다. 취한다는 것은 중독을 말한다. 술에 중독되어서 잘 된 인생이 있는가. 단 한 사람도 없다. 알콜에 중독되면 자신도 불행해지고 가족도 불행해지고 주변 사람을 모두 불행하게 만든다. 에베소는 우상 숭배가 심한 도시였다. 에베소 사람들은 이방 신전에서 제사하면서 술에 취한 채로 춤을 추었다. 술에 취하는 것이 자랑거리로 여겨졌다. 그러한 우상 숭배와 술에 취하는 타락과 방종한 삶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바울이 강력하게 권면한 것이다.

 

술 취하지 마십시오. 

이는 방탕한 것입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라고 말이다. 성령의 충만함이란 일회적인 것이 아니다. 지속적인 것이다. 성령의 인치심은 일회적이지만 성령의 충만함이란 지속적이고 연속적인 것이다. 에베소서 1장 13절에 보면 “성령의 인(印)치심을 받았으니”라고 하였다. 성도란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자들이다.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성도는 계속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유지하여야 한다. 사도행전 4장 8절에 보면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라고 하였다. 예루살렘 성전 미문 앞에 걸인이 있었다. 못 걷는 상태로 사십년을 지내며 구걸하던 걸인을 걷게 한 기적의 사도 베드로가 요한과 함께 옥에 갇혔다.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들과 사두개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사도들의 복음 전파를 싫어하였다. 예수의 부활을 전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래서는 사도들을 붙잡아서 옥에 가두었다. 다음 날 아침에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다 모였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의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였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고 다그쳐 물었다. 베드로 사도가 성령에 충만하여 대답하였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 

 

어쩔 수 없이 유대 교권주의자들은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을 풀어 주었다. 기도하던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기쁜 마음으로 사도들이 풀려 난 소식을 듣고는 계속하여 기도하였다. 계속하여 기도할 때에 모인 곳이 진동하였다. 무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성령의 역사가 점점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 충만을 사모해야 한다. 교회는 성령 충만을 열망하는 곳이어야 한다. 속장은 속장대로 속도원은 속도원대로 성령의 충만함을 열망해야 한다. 교사와 학생이 각각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어른 아이 노인 젊은이 누구나 다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섬기고 봉사하여야 한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여야 한다.

마음을 다하여 주께 찬송하여야 한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여야 한다.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여야 한다. 

예수 안에서 피차에 서로 순종하며 살아가야 한다. 

 

시로 화답한다는 것은 시편을 중심으로 한 시 형태의 노래로 주를 예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찬송이란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찬미하기 위해 부르는 찬미를 말한다. 신령한 노래란 성령의 영감으로 지어진 거룩한 노래 즉 성가를 말한다. 이처럼 초대 교회의 공 예배는 서로 돌려가며 찬양하는 교창을 하고는 하였다. 찬송은 목소리로 부르는 것이 아니다. 찬송은 마음을 담아서 마음을 다해서 주께 경배하는 곡조가 있는 기도이며 예배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범사에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 찬송을 올려 드려야 한다. 그렇지 않나. 생각하면 감사하는 찬송을 하게 되고 뒤돌아 보면 감사 하는 찬송을 하게 되지 않나. 왜 그러한가. <은혜>라는 손경민의 찬양처럼 모든 것이 은혜 아닌 것이 어디 있으며 감사하지 않을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은 나의 능동이 아니다. 현재 수동 명령형이다. 철저히 하나님 중심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 주셔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간구하고 갈망하여야 한다. 

술에 취하는 자들은 시시때때로 술을 찾는다. “사람이 술을 마시고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마신다”라는 인디언 속담이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에서 살아가야 하는 성도는 지속적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여야 한다. 술 취하는 사람은 술의 힘에 자신을 맡긴다. 반대로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하는 성도는 지속적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의지하고 사모해야 한다. 술 취함이 무절제와 방탕이라면 성령의 충만함은 착하고 의롭고 진실하고 거룩한 행실을 열매로 맺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의 삶에 점점 더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고 의지하는 성령의 사람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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