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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시43:1-5) 2022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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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2-06-20 07:30 조회 2,660 댓글 0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시43:1-5)      2022. 6. 19

 

 

 

태어나는 순간부터 눈을 감기까지 평생을 행복하게만 살다가 돌아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누구나 다 이러저러한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아간다. 기쁠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다. 즐거울 때도 있고 속이 몹시 상할 때도 있다. 평안할 때도 있고 마음이 불안해서 견딜 수 없을 때도 있다. 우리가 성경에서 만나는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도 대개 다 그랬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기드온, 다윗,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엘리야, 엘리사, 느헤미야 등등 그 모든 삶이 늘 순탄하고 늘 좋기만 했던 인생이 누가 있나. 요즘 날마다 묵상하는 에스더서의 에스더나 모르드개를 보라. 세례 요한, 12제자, 사도 바울을 보라. 

 

그야말로 “불 같은 시험 많으나 이기고 삽니다.”라는 찬송처럼 견디며 살고 이겨 내며 살아가는 것이지 만사형통한 인생살이가 어디에 있느냐 말이다. 

 

전쟁으로 인한 죽음, 난민, 사별, 기근, 가난, 질병, 전염병, 지진, 쓰나미, 태풍, 토네이도, 홍수, 산불, 금융 위기, 물가 폭등, 주가 폭락, 직장해고, 사업 실패와 파산신청, 교통사고, 산업안전사고, 살인, 강간, 간통, 가정 파괴, 방화, 이혼, 가출, 자녀 학대, 영유아 유기 방치, 선천적 장애, 후천적 장애, 치매, 암과 같은 난치병, 동성애, 기상 이변, 환경 공해, 우울증, 무기력증, 시기, 증오, 사기, 직장 해고, 사업 실패, 투옥 등등 생의 고난과 어려움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성경에 보면 이와 같은 고난과 시련과 환난과 역경을 극복하지 않고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이는 오늘날 우리 각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중에 300장 <내 맘이 낙심되며>의 가사가 그런 인생살이를 대변한다. 

 

내 맘이 낙심되며 근심에 눌릴 때/ 가는 길 캄캄하고 괴로움 많으나

희망이 사라지고 친구 날 버릴 때/ 싸움이 맹렬하여 두려워 떨 때에

번민이 가득하고 눈물이 흐를 때/ 환난이 닥쳐와서 어려움 당할 때

 

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살이의 전부라면 어떻게 살아가겠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손길을 의지하는 것이다. 

 

찬송가 300장의 작시자인 부르스 에반스(J. Bruce Evans)는 이렇게 고백한다.

 

주께서 내게 오사 위로해 주시네/ 주께서 함께하며 내 짐을 지시네

주 내게 속삭이며 새 희망 주시네/ 승리의 왕이 되신 주 음성 들리네

주 나의 곁에 오사 위로해 주시네/ 주님의 능력입어 원수를 이기네

 

그 은혜가 내게 족하네 그 은혜가 족하네

이 괴로운 세상 지날 때 그 은혜가 족하네

 

시편 42편과 43편을 연이어 읽어 보면 마치도 한편을 둘로 나누어 놓은 듯하다. 시편 42편은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다. ‘마스길’이란 ‘교훈시’라는 뜻이다. “고라자손의 시라기 보다는 다윗이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하여 왕궁을 벗어나 피신 다닐때에 고백한 시를 고라 자손 중의 그 누군가가 수집해 두었던 것이 아닐까”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주전 979년이니까 다윗이 왕이 된지 31년째 되던 해이다. 다윗이 30세에 왕이 되었으니 61세 때에 겪었던 아들 압살롬으로 인한 반역 사건으로 장래를 예측할 수 없이 왕궁을 벗어나 피신다니던 처철한 때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42편과 43편에 보면 3번 반복되는 똑같은 내용의 구절을 만나게 된다. 42편 5절과 11절 그리고 43편 5절이 그러하다. 이 세 구절에서 눈에 띄는 반복되는 단어들이 무엇인가. ‘영혼, 낙심, 불안, 소망, 도우심, 찬송’이란 단어들이다.

 

사람이 어떤 때에 낙심이 되고 어떤 경우에 불안이 찾아오는가. 사람은 누구나 다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 낙심이 되고 불안해지는 경우는 임금이라도 마찬가지이다.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낙심되는 경우가 없고 불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는 부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국가적이고 세계적인 큰 부자라고 해서 마음에 낙심이나 불안이 찾아 오지 말란 법이 없다. 남들이 나를 알아 주고 인기가 높은 직업이나 자리에 있는 이들의 경우에는 이런 불안과 낙심이 더 쉽게 찾아 올 수 있다.

 

오늘 본문에 보면 1절에,

 

하나님이 자신을 판단해 달라고 하소연한다.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자신이 주장하는 송사를 변호해 달라고 호소한다. 여기서 표현하는 ‘나라’라는 것은 한 국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로운 하나님 편에 서서 살아가고자 하는 시편 기자의 반대편에 서서 자신을 미워하고 핍박하고 대적하는 상대편의 세력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가령 다윗의 경우로 하면 아들이지만 왕자의 신분을 가지고 자기 추종 세력을 규합해서 아버지 다윗 왕을 예루살렘 왕궁에서 몰아내고 왕권을 찬탈하려고 했던 때를 연상하게 한다. 

 

그렇지 않나. 요즘 미국과 같은 4년 연임이 가능한 대통령제가 아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5년 단임제가 아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왕권은 종신제였다. 사울 왕은 40살에 왕이 된 후에 불레셋과의 전쟁 중에 전쟁터에 나갔던 사울 왕이 80세에 중상을 입고 자결하면서 사울 왕 시대가 막을 내렸다. 물론 80세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울 왕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하나님의 심판이 사실이다. 그러나 다윗은 30살에 왕이 되어 40년 동안 왕이었다. 70세에 눈을 감을 때까지 왕이었다. 그런 다윗인데 왕으로 있던 31년차인 그의 나이 61세 때에 아들 압살롬과 그를 따르는 반역 세력에 의해서 왕궁에서 피신해야만 했다.

 

생각해 보라. 그런 정도 지경이면 낙심도 되고 불안할만도 하지 않겠나. 그런데 다윗은 화려하고 웅장한 왕궁을 벗어나서 이곳저곳으로 피신해야 하는 처량한 나날 중에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있나. 

 

 

건지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1절에 보면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라고 하였다. <현대인의성경> 으로 보니까 “악하고 거짓된 자에게서 나를 구하소서.”라고 하였다. 우리는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서 왕궁을 벗어나서 피신 다니던 다윗의 모습을 성경에서 접해서 안다. 만약 다윗의 왕정이 그 피신 길을 끝으로 그렇게 무기력하고 초라하게 끝나 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데 피신 길의 다윗의 고백을 보면 하나님의 회복에 대한 분명한 믿음과 확신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1절에서 다윗은 ‘나를 변호하소서, 나를 건지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 이것은 간구요 절규가 아닐까. 이 처절하고 비참하고 참담한 역사의 현장에서 일순간에 왕궁을 비우고 왕이 신발도 제대로 챙겨 신지 못한채 맨말로 울면서 기드론 시냇가를 지나서 감람산으로 피신을 떠났을 때의 심정을 상상하여 보라. 

 

성경 그대로 읽어 보자. 사무엘상 15장 30절,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

 

상상하여 보라.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해서 왕궁을 벗어나 얼굴을 가리고 울면서 맨발로 감람산 자락으로 피신하고 있는 다윗과 그의 신하들과 그 곁의 고관들을 보라. 다윗이라고 해서 왕궁을 지키는 군대가 없었겠나. 왕을 호위하는 정예화된 용사들이 없었겠나. 그런데 어찌된 연고인지 다윗은 왕궁을 내어 주고 피신길에 올랐다. 얼마나 황급하게 피신했는지 신도 신지 못한 맨말로 말이다. 

 

우리는 살다 보면 이런 충격적인 사건을 겪을 때가 없지 않다. 때론 충격적인 슬픔을 겪기도 한다. 신앙적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고난을 겪기도 한다. 억울한 일을 겪기도 한다. 속이 상해서 몸이 초췌해져 가는 심각한 어려움을 만나기도 한다. 기도하려 해도 한 마디의 기도도 할 수 없고 목을 짓누르듯이 답답하고 힘겨운 날들을 버티며 안간힘을 써야 하는 그런 순간이 있을 수 있다. 

 

이건 국가적으로는 72년 전인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에 일어난 6. 25 전쟁의 시작이 그런 날들이었다. 요즘 러시아의 침공을 받아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가 그런 지경에 빠져 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하여 보라. 전쟁과 재앙과 재난과 질병과 사고와 사건을 비롯한 별의 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누가 나를 구원할 수 있는가. 

 

물론 이웃 나라의 도움이 필요하다. 우방의 도움, 유엔의 도움이 필요하다. 친구의 도움, 친척의 도움이 절실하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누가 나를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구원해 줄 수 있단 말인가.

 

누가 태어난 지 석달 된 아기 모세를 나일강에 떠내려 가던 갈대 상자에서 건져 냈는가. 

누가 이스라엘 민족을 430년 동안의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에서 구원하였는가. 

누가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하였는가. 

누가 반석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게 하였는가. 

누가 광야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년을 날마다 한결같이 만나로 먹이셨는가. 

누가 마라의 쓴 물이 단물로 변하게 하였는가. 

누가 이스라엘 민족을 아멜렉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하였는가.

누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포로 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후손들을 예루살렘에 돌아갈 수 있게 하였는가. 

 

우리를 질병에서 건지고, 사고에서 건지고, 위험에서 건지고, 위협에서 건지고, 두려움에서 건지고, 절망에서 건지고, 우울에서 건지고, 악한 습관과 중독에서 건지고 가난에서 건지고 미움에서 건지실 수 있는 분이 누구신가.

 

설령 우리 가운데 그 누군가가 전쟁으로 목숨을 잃고, 질병으로 무너지고, 사고와 사건으로 불행한 일을 겪었다고 한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부인할 자가 누구인가. 

 

누가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그 오랜 질병에서 건졌는가.

누가 12해 혈루병 여인을 그의 안타까운 질병에서 건져 냈는가.

누가 10명의 한센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였는가.

누가 지붕을 뚫고 침상 위에 누운채로 집 안에 달아 내린 중풍병자를 깨끗하게 고쳐 주었는가. 

누가 죽은 나사로를 장례가 끝난 무덤 밖으로 불러내었는가.

누가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려냈는가

누가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냈는가.

누가 벳세다 광야의 저녁나절에 그렇게 배가 고파 하던 그 많은 무리에게

배가 부르도록 먹을 것을 해결해 주었는가. 

 

누가 왕궁을 버리고 도망치듯 피신했던 다윗을 다시 왕궁으로 되돌아 갈 수 있게 하였는가. 누가 다윗의 잃어버릴 뻔한 왕권을 회복되게 하였는가. 다윗 자신인가. 요압 장군인가. 다윗의 친구 후새인가. 다윗에게 후한 것들로 섬긴 소비, 마길, 바르실래 덕분인가. 건지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다윗이 다시 왕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근심과 불안과 위기에서 우리 각 사람의 형편을 돌아보시고 건져 주시는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믿음의 사람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힘이 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2절에 보면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이라고 고백한다. 살다 보면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과 같은 외로움과 고독을 처절하게 느낄 때가 없지 않을 것이다. 시편 기자는 43편 2절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탄원하고 있다. 이는 결코 절망적인 탄식이 아니다. 이는 구원의 확신과 소망을 갖고 영원한 힘의 근원이신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의지하는 철저한 신앙의 고백인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최고급 자동차라도 타이어에 적당량의 공기가 주입되지 않으면 이동할 수가 없다. 달려갈 수가 없다. 자동차의 기능을 다 할 수 없다. 물론 자동차를 만드는 것은 사람이다. 자동차의 타이어를 만들고, 타이어 내부의 튜브를 만드는 것도 사람이다. 요즘은 타이어와 튜브 일체형으로 제작한다고 한다. 여하튼 타이어와 튜브를 완벽하게 만들지라도 공기의 도움이 없이는 타이어가 제 기능을 다 할 수 있도록 일정한 압력을 유지할 수가 없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공기는 누가 만든 것인가.

 

은하계의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무수한 별들은 누가 만들었나. 해와 달은 누가 만들었나. 우리는 창세기 1-2장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천지 창조를 믿는다. 우리는 진화론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흑암과 혼동과 공허 가운데 운행하시던 여호와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창조의 시작인가. 생각하여 보라. 빛의 창조가 아니라면 이 세상에 그 어떤 무엇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빛은 이 우주 공간 만물의 창조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 빛이 힘의 근원인데 그 빛이 스스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다. 빛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나의 체력, 나의 지력, 나의 기억력, 나의 인지 능력, 나의 감성 능력, 나의 대인 관계 능력 등등 나의 그 모든 것들의 힘의 근원이 나 스스로에게 있는가.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발이 손더러, 귀가 눈더러, 눈이 손더러,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하지 못하리라.”라고 하였다. 다 소중하고 다 귀하고 다 필요하고 다 요긴하다. 그러나 그 모든 몸의 지체들이 서로 서로 건강하게 연합하여 한 몸의 지체로서 건강을 유지하며 생활하게 하는 힘은 그 분에게서 오는 것이다. 그 분이 힘의 근원이시다. 

우리는 그 분의 이름을 ‘여호와, 하나님, 주님’ 이라고 부른다. 

 

다윗은 시편 18편 1절에서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 그렇다. 하나님만이 나의 힘의 근원이시다. 시편 147편 10-11절에 보면 시편 기자는“여호와는 말의 힘을 즐거워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도 기뻐 아니하시고 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라고 하였다.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만을 나의 인생의 힘의 근원 삼고 주를 의지하며 겸허하게 살아가는 믿음의 주인공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찬송 받으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다윗은 말씀의 사람이요 기도의 사람이요 찬송의 사람이었다. 시편 43편이 다윗의 고백이 분명하다면 다윗은 2절에 보면“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성막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다. 주께서 빛을 비추어 주시고 주께서 진리를 보내 주셔서 자신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건지시고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그는 예배를 소중히 여기고 예배를 사모하던 예배의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4절에 보면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라는 간절한 소망을 고백하고 있다. 

 

지금은 근심 중에 쫓기고 있고 불안하게 피신하고 있지만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키고 건지고 보호하고 인도하셔서 다시 여호와의 거룩한 산에 설 날을 소망하고 있다. 다시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제사할 날을 소망하고 있다. 잃어버린 ‘큰 기쁨’을 다시 회복할 날을 꿈 꾸고 있다. 수금으로 주를 찬양할 날을 소망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라는 표현은 시편의 고백자가 얼마나 간절한 심정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고 있는가를 실감나게 느끼게 해 주는 구절이다. 

 

5절에 보면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라고 하였다. 이는 얼마나 실감나는 표현인가. 119의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는가. 119구급차가 출동하고 119 구급요원의 도움으로 응급실에 실려 간 적이 있는가. 저들의 도움을 기다리는 30초와 1분이 얼마나 길고 초조한 시간인가. 낙심과 불안 중에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간구하는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찬송할 이유에 대하여 분명하게 다시 고백하고 있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이런 고백과 은혜가 일상생활 중에 분명하게 증거되고 간증되는 담대한 믿음의 주인공들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다 같이 찬양 <예수 안에 소망있네>를 가사를 잘 생각하며 함께 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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