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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비옵는 것은(요17:20-26) 2022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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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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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2-05-30 22:25 조회 3,199 댓글 0
 

                       내가 비옵는 것은(요17:20-26)          2022. 5. 29

 

 

E. M. 바운즈(Edward M. Bounds, 1835-1913)의 <기도의 심장>이란 책을 읽다 보면 마가복음 11장 24절에 있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인용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라는 말씀이다. 어떤가. 여러분은 주님의 이와 같은 기도에 대한 가르침의 성경 말씀을 들을 때에 그렇게 믿어지고, 그렇게 받아들여지는가. 아니면 ‘설마’라고 의심이 먼저 드는가. 당연히 의심이 먼저 들 것을 너무나도 잘 아신 예수께서는 그 바로 앞 절에서 이렇게 교훈해 주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어떤가. 의심하지 않는 기도 생활을 해야 기도가 응답된다고 가르쳐 주셨다. 

 

여러분은 요즘 무슨 기도를 하며 생활하는가.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가. 기도의 주제가 무엇인가. 왜 기도하는가. 아니면 왜 기도하지 않는가. “나에게 있어서 기도란 무엇인가.”

 

예수는 기도하는 생을 사셨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에 예수는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며 기도하셨다. 그 후로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도 밤새도록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다. 예수의 생애는 시작이 기도요 삶의 과정이 기도요 생을 마치는 마지막이 기도였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과 다르게 요한복음 17장은 예수의 마지막 기도 내용을 훨씬 소상하게 전해 주고 있다. 요한복음 17장은 1절부터 26절 분량의 전체가 예수의 마지막 기도이다. 어떠한가. 만약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운 것을 알고 내 생애의 마지막 기도를 드린다면 무슨 내용의 기도를 드릴 것 같은가.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어떤 상황으로 죽음을 맞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유언을 남기듯이 내 생애의 마지막을 생각하는 기도문을 미리 쓰는 습관을 갖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나. 가족 중에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면 이 땅에 남아 있는 가족들이 내 손때가 뭍어 있는 모든 것들을 정리할 순간이 올 것이다. 그런데 그 유품들 중에서 내가 평소에 이 땅을 떠날 날을 준비하며 마음을 담아 적어 놓은 기도문이 나온다면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남기지 않겠는가.

 

우리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88세에 주님 품에 안겼다. 그는 목회하던 영국 런던의 교회 옆 목사관의 자기 침대에 누워 생을 마쳤다. 그가 남긴 마지막 기도요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다.

 

“모든 것 중에서 최고의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우리는 오늘 요한복음 17장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말씀 중에서 예수의 마지막 기도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20절의 ‘내가 비옵는 것은’이란 예수께서 기도하신 기도의 표현이다. 9절에 보면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16절에도 보면 ‘내가 비옵는 것은’이란 표현을 만나게 된다. 자, 그러면 과연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무슨 기도를 드리셨을까.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오늘 읽은 본문에 반복되는 표현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라는 내용이다. 더 자세히 묵상해 보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일치와 연합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예수 안에 그를 믿는 자가, 그를 믿는 자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계시는 ‘연합, 일치, 내재, 내주, 하나’등을 강조하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접하게 된다. 그렇지 않나. 21-23절에 보면 ‘하나’라는 표현이 계속하여 나온다.

 

맞다. 예수께서 이 땅에 보냄을 받으신 목적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던 인생들 중에서 구원 받을 백성들을 한 사람씩 부르셔서 하나님 안에 하나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예수는 이를 위해서 이 땅에 보냄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아들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관심 밖이다. 더군다나 믿으려 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실 수 있다는 말이냐” 하고 항변한다. 그 뿐만 아니라 그걸 믿는 우리를 조롱한다. 그처럼 세상 사람의 예수께 대한 반응을 너무나도 잘 아시던 예수께서 이 땅을 떠나시기 전에 이렇게 기도하신 것이다. 21절 후반부를 보라.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여기 ‘세상’이란 표현이 나온다. 세상이 무엇인가. 요한복음 3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하였다. 거기에서 인용된 세상이란 ‘세상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사는 인생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보내 주신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예수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였다. 심지어 헤롯을 동방박사들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 근방의 두 살 미만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다 죽여 버리라고 하였다.

 

예수는 그런 세상의 살해 위협 가운데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났다. 예수는 스스로 이 땅에 태어난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이 동정녀 마리아의 태를 빌려서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예수는 12제자들을 부르셨고 저들과 함께 삼년 동안 부지런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비유로 교훈하셨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계속하여 증언하셨다. 그러나 문제는 세상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는 점이다. 예수를 부인하고 배반하고 배척하는데 앞장선 이들이 서기관, 바리새인, 대 제사장 문중이었다.

 

하나님이 이사야나 미가나 스가랴 선지자 등을 통하여 얼마나 자주 반복해서 이 땅에 메시아를 보내실 것을 말씀하셨나.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자 세상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여 없애려고만 하였다.

 

생각하여 보라. 삼년을 제자로 양육했던 베드로조차도 마지막 순간에 예수를 부인하고 배반하고 저주하고 도망가 버리지 않았나. 제자인 베드로조차도  예수가 누구신지에 대하여 결정적인 순간에 의심이 가고 흔들리지 않았나. 

 

지난 주일에 사도행전 1장의 앞부분에서 대하신 대로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는 질문을 예수의 승천 직전에까지 한 것을 보면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의 제자들조차 예수께서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잘 몰랐던 것이 분명하다.

 

이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각 사람의 기도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혹시 우리의 기도 내용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사람들의 기도와 별 차이가 없지 않은가. 마태복음 6장 31-32절에 보면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나. 우상에게 빌고 미신을 믿는 이들의 기도와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기도가 뭐가 다른가. 은과 금을 녹여 부어 만든 우상과 돌과 나무를 깎아 만든 우상 앞에 비는 것과 하나님 아버지 앞에 기도하는 기도의 내용에 별 차이가 없다면 우리의 기도 생활을 점검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누구시며 이 땅에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제대로 깨달아 아는 성도라면 기도의 내용이 달라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기 ‘구하라’라는 말씀이 ‘기도하라’는 말씀이 아닌가. 그러면 뭘 기도하라고 하셨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기도하라”라고 하셨다. 맞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독생자이신 것을 아는 성도라면 기도의 내용이 바뀌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한다. 날마다의 양식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이 맞다. 모세 때에 광야 생활 40년 동안 날마다 만나를 주시고 생수를 주셔서 먹고 마시게 하신 것처럼 오늘날 우리도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여야 한다. 한 끼의 음식 앞에서 그 먹을거리를 주신 분에게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한 끼의 음식을 먹고 새 힘을 얻어 하루를 살아가게 하시는 분에게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 순간이 이어져서 주 안에서 영생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우리 각 사람의 삶의 형편이 서로 다 다르다. 건강 상태가 서로 다 다르다. 경제 수준도 다 다르다. 월수입도 다 다르다. 가정의 형편과 사정도 다 다르다. 기도 제목도 다 다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임금이든 평민이든 누구나 다 하나님 안에서 하루라는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하루 하루가 영원을 모르고, 하나님의 나라를 모르고, 천국과 지옥도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사람들처럼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흥청거리며 그렇게만 살아가면 되겠나. 노아 시대의 세상 사람들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한탄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창세기 6장 5-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라고 하였다. 

 

그러면 오늘 날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예수께서 하나님 안에 계신 것 같이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는지를 알고 믿고 전파해야 한다. 20절의 ‘그들의 말’이란 그 말이 ‘복음’이다.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널리 전하세

모두 찬양하며 주의 사랑을 전하세

모두 함께 예수님의 사랑을 세상에 널리 알리세”

 

라고 <우리는 사랑의 띠로>라는 찬양을 찬양하지 않나. 

 

25절에도 보면 세상 사람들은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아는 자들과 누군지 모르는 자들로 나뉜다. 그러면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요한복음 17장 3절을 보면 그 대답이 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사랑하신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의 마지막 기도 내용 중에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하나님이 평소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세상 사람들과 하나님을 아직 모르는 세상 사람들도 다 같이 하나님이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철이 드는 것은 나를 향한 부모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다. 물론 세상에는 제 자식을 학대하거나 방치하거나 버리는 패륜한 부모도 없지는 않지만 말이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제 자식을 사랑하고 위한다. 그 내릿 사랑을 깨닫는 것이 철이 드는 것이 아닌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26절을 보라. 예수께서는“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다. 아들 예수를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시란 말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그런데 23절을 자세히 공부해 보면 예수께서 기도하시며 사랑을 주제로 기도하신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이란 기도 중의 ‘그들’은 예수의 12제자를 말한다. 맞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예수를 배반하고 팔아 버린 가롯 유다까지도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런 사랑의 실천을 보이신 예수께서 하나님 앞에 기도 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17장 23절을 다 같이 읽자.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우리가 다음 주일에 성찬식을 한다. 성찬식이 뭔가. 나를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깨달은 이들이 참여하는 것이 성찬이 아닌가. 그 크신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성찬에 참여한다면 성찬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렇지 않나. 무덤덤하지 않나. 

 

신앙생활 자체가 그렇지 않나.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 대속의 은총, 죄 사함의 은혜, 구원의 감격이 없다면 예배가 무슨 의미가 있으며 찬송과 기도와 성찬과 교회 생활과 성도의 교제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라고 찬송하지 않나.“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 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라고 304장의 <그 크신 하나님 사랑>의 찬송을 찬송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나면 그 크신 사랑은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인 것이다. 그런 사랑을 깨달은 자의 찬송이 305장, < 나 같은 죄인 살리신>과 같은 찬송이 아닌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나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고 깨닫게 되고 체험하고 나면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달라지는 법이다. 찬양의 태도, 찬양의 감격, 찬양 생활의 일상이 달라지는 것이다. 

 

 

주의 영광을 보게 하옵소서.

우리는 요한복음 17장의 예수의 기도 가운데 수 없이 반복되는 ‘아버지’라는 표현을 쉽게 주목할 수 있다. 그렇다. 예수의 생각 가운데 충만하게 가득한 생각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 뿐이셨다. 24절의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라는 ‘나 있는 곳’이란 곧 천국을 일컫는 것이다. 예수는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하나님의 나라에 오르셔서 영원히 누릴 그의 영광을 주의 제자들과 주를 믿는 성도들이 다 같이 보고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다. 

 

예수께서 기도하신 이 장래의 영광, 영원한 영광,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실 영광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9-11절에서 이렇게 증거하였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24절의 예수의 기도 내용처럼 예수의 영광을 볼 자들이 있고 영원히 보지 못할 자들이 있다. 요한복음 7장 34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라고 경고하셨다. 

 

그렇다. 신랑과 함께 잔치 자리에 들어갈 자들이 있다. 반대로 잔치집 문이 닫힌 후에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고 애원해도 더 이상 혼인집 문이 열리지 않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 온다. 닫힌 문 안에서“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라는 신랑의 음성을 듣고 문 밖에서 통곡하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 비유에 나오는 내용이다. 예수께서는 그 비유의 끝에 말씀하셨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25:13)

 

그러므로 24절의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라는 기도를 드리신 것이다. 우리 각 사람이 장차 주님 곁에서 주님이 누리시는 그 영원한 영광을 보며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영생 복락을 누리는 주인공 다운 믿음의 삶을 가꾸어가야만 할 것이다. 이런 은혜와 지혜가 각 사람에게 선물로 주어지기를 축원한다. 아멘

 

우리 다 같이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를 찬양하고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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