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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고 찬송하라(사12:1-6) 202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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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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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1-12-12 22:03 조회 6,047 댓글 0
 

                   감사하고 찬송하라(사12:1-6)               2021. 12. 12

 

 

사람들은 누구나 ‘그 날’에 대한 기대와 바램을 가지고 산다. 우리가 서로 생각하는 ‘그 날’이란 지금보다 더 나은 그 날, 현재보다 더 행복한 그날, 평소에 우리 각 사람이 마음에 품고 소원하는 그 무엇인가가 시원하게 응답되는 그 날을 말한다. 그렇지 않나. 우리는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그 누구나 장래의 ‘그 날’에 대한 소원을 각자가 다 품고 살아간다. 

 

과거에 미국 벤살렘교회에서 목회하던 당시에 예배당 설계를 마쳤으나 5,000평이나 되는 광활한 땅의 토목설계 허가가 몇 년 동안 지연되면서 ‘인내’를 배워야 했던 때가 있었다. 한 달 한 달이 쌓여서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가고 하던 답답한 날들이 지냈다. 예배당 건축은 건축대로 늦어지고 기도는 기도대로 하고 생각은 생각대로 복잡하던 때가 있었다. 그 때 예배당을 건축할 그 넓은 잔디밭 한 쪽 귀퉁이에 있는 목사관의 차고에 모여서 특별 기도회를 참 자주 하였다. 새벽에 직장이나 가게로 출근하는 한인들의 생활 패턴으로 인해서 저녁 시간에 특별 기도회를 하고 또 하고는 하였다. 그 때 부르던 찬양 중에 하나가 <보라 그날이>라는 찬양이었다. 

 

보라 그 날이 곧 다가오리라

생명의 주 예수 영광 중에 오실 날

네가 그것을 곧 보게 되리니 

영원한 집으로 인도하시리라

 

오늘 읽은 이사야 12장은 여섯 절 분량의 짧은 내용이다. 1절과 4절에 ‘그 날에’라는 표현이 반복된다. 이사야서를 읽다 보면 1장부터 ‘그 날에’ 혹은 ‘그 때에’라는 시제에 관한 표현이 자주 반복되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그 날’과 ‘그 때’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이나 앗수르나 바벨론으로부터 건지시는 날이다.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장차 메시아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인간을 죄와 허물와 흑암으로부터 온전히 구원하실 대속의 날을 일컫는 것이다. 가령 이사야 10장 20절, 11장 10절과 11절 등에 보면 ‘그 날에’(In that day) 라는 시제가 반복된다. 이사야 11장 10절을 보라.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하는 말씀이 분명하지 않나.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그 날이란 이스라엘이 앗수르나 바벨론의 침략과 지배로부터 해방되는 자유의 날에 대한 예언이기도 하지만 장차 열방의 구주로 오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의 탄생에 대한 예언이 계속되고 있다. 

 

생각하여 보라. 오늘날이 우리는 이천 년 전에 이 땅에 다녀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린다. 그러나 이사야 시대에는 장차 이 땅에 보냄을 받으실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예언이 시작되던 때이다. 이 같은 예언이 주어진지 800여년의 긴 세월이 지난 후에 예수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 탄생하셨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를 전하는 기쁜 소식이었다. 물론 헤롯 왕은 예수의 탄생 소식에 대하여 두려움과 불안감을 갖고 베들레헴 근동에서 태어난 두 살 미만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다 죽이라는 유아살해 명령을 내리는 광기를 부리기도 하였지만 말이다. 

 

1절에 보면 ‘전에는’ 그리고 ‘이제는’이라는 또 다른 시제의 비교를 보게 된다. 전에 노하시던 여호와께서 이제는 그 진노를 돌이키셨고 진노하시던 백성들을 안위하시니 주께 감사한다고 했다.

 

그렇다. 하나님은 때로는 진노하시기도 하시고 때로는 그 진노를 푸시기도 하시는 전능자이시다. 오늘 본문인 이사야 12장에는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너희가 여호와께 감사하라, 너희가 그의 이름을 부르라, 너희가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여호와를 찬송하라, 이스라엘 중에 거룩하고 크신 여호와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르라”고 하였다. 자, 그러면 무엇을 감사하고 무엇을 찬송하라는 내용인가.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도 전쟁을 많이 겪은 나라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전쟁과 침략의 위협 속에 살아가야만 했다. 우리가 아는 모세 시대의 출애굽이란 430년 동안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을 겪어야 했다. 그 외에도 앗수르, 바벨론, 헬라, 로마 시대를 거치며 끊임이 없는 침략의 두려움 가운데 지내야 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며 살아 남을 길이 없었다.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는 고백의 의미가 무엇인가. 사람이 평온한 일상을 살아갈 때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별로 실감하지 못한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난다든지, 큰 사고를 당한다든지, 지진이나 쓰나미와 같은 엄청난 재난을 겪는다든지, 요즘같은 바이러스의 두려움이나 아니면 예기치 않은 질병으로 대 수술을 하게 된다든지 하여 보라. 내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다. 아니 전혀 없다. 그런 면에서 보면 하루 하루 순간 순간 이 세상을 이렇게 살아가는 그 자체가 엄청난 기적이요 은혜요 큰 복이 아닐 수 없다. 1918년 세계 인구는 18억이었다. 그 중에 스페인 독감으로 죽은 이가 1억명에 이른다. 그 당시 세계 제 1차 대전에 참전해야 했던 미국 군대가 참전하러 실려 가는 배 안에서 1분 간격으로 피를 토하며 죽어 갔다. 함선의 바닥에는 여기 저니 시뻘건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대서양에 시신을 던지는 길 밖에는 시신을 수습하는 방법이 없었다. 모든 군대는 장교이든 사병이든 모두가 다 공포에 휩싸였다. 청해 부대원의 코로나 감염 장면처럼 말이다. 죽음의 사자가 온 지구를 휩쓸고 지나갔다. 

 

어제 지방의 어느 교회 담임 목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아들과 내외 간에 세 가족이 모두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고 했다. 교회 안에도 여러 명의 확진지가 발생해서 오늘 예배를 전면 비대면 예배로 전환하게 되었다고 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코로나에 확진 되어 보면 그 어려움이 얼마나 큰가. 그 두려움이 얼마나 대단한다. 그 답답함이 얼마나 계속되는가. 

 

지금 이사야 선지자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God is my salvation)라는 고백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고백일 뿐만 아니라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 한 사람의 신앙의 선언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끌려가서 70년을 포로 생활을 해야 했던 원인이 무엇인가. 바벨론이 강성해서인가. 아니다. 성경은 철저히 이스라엘의 죄 즉 우상 숭배 때문임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바벨론 포로 시대의 고난을 겪어야 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마음가짐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하나. 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생활해야 하나. 1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언제 노하시며 어떤 경우에 진노하시는가. 왜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셨는가. 인애와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신 하나님이 사랑으로 저들을 대하시지 않고 진노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떠난 우상 숭배의 죄 값을 물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한다. 즉 진실한 마음을 회개하고 주께로 향하여야 한다. 그래야 구원의 은총을 누리며 살게 된다. 이사야 11장 마지막 절은 16절이다. 그 끝에 보면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게 하시리라.”고 하였다. 우리 중에 1945년 8월 15일의 광복절을 경험한 분들은 이게 무슨 말씀인지 실감나게 기억할 것이다. 

 

구원이란 그런 것이다. 시편 126편 1절은 바벨론 포로에서 되 돌아 올 때의 감격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러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 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시126:2)라고 노래하였다. 

 

이와 같은 감격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감격으로 이어지는 주인공으로 살아가길 축원한다. 이 구원의 은총을 나만 누리지 말고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이 각각 모두 다 누릴 수 있기를 간구하자.

 

그렇지 않나. 천국을 믿는가. 하나님의 나라를 믿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예수의 비유처럼 부자라도 지옥에 가고 거지 나사로라도 천국에 가는 것에 천국의 상급과 지옥의 심판으로 분명히 구별되는데 어떻게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다가오는 성탄절에 사랑하는 가족들과 성탄 선물만 주고 받지 말고 성탄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진리가 선물되는 인생 최고의 성탄맞이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그렇다.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이룩하신 구원의 은총은 하나님이 하신 일 중에 가장 큰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하고 찬송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시편 126편 2절 끝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고 하였다. 맞다. 바벨론 70년 포로의 땅에서 살아남아 되돌아 갈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큰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베들레헴에 보내신 아기 예수를 통한 인류 구원의 은총은 그것과 비교 할 수 없는 감사의 제목이요 찬송의 제목인 것이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과 노래시라.

세상 사람들은 각 사람이 다 제 나름대로 자기를 자랑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기 시작하면 자랑할 것이 없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 말고는 자랑할 것이 없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나의 힘의 근원이시고 나의 힘의 전부이시기 때문이다. 

 

지난 화요일에 우리 지방 교역자 회의로 모였다. 설교하는 이가 몇 가지 예를 들었다. 한 가지는 옷걸이 예화였다. 세탁소에 새로 들어온 옷걸이에게 낡은 옷걸이가 반복해서 하는 말이 있었다. “야 너는 옷걸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라.” 이 말을 수도 없이 반복하는 것이었다. 새 옷걸이는 그 말이 너무 듣기 싫었다. 그러나 자꾸 반복해서 듣다 보니 그 말이 맞았다. 세탁소 옷걸이에는 쌈직한 티셔츠 한 벌이 걸릴 때도 있지만 조심스럽게 다루는 몇 백만원짜로 혹은 천만원이 넘는 고급 밍크 모피 코트도 걸릴 수 있다. 싸구려 양복도 걸릴 때가 있지만 정말 귀하고 값비싼 양복도 걸릴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옷걸이가 그 옷은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라고 낡고 오래된 옷걸이가 새 옷걸이에게 계속해서 잔소리처럼 반복해서 하는 말이 그것이었다. “야 너는 옷걸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라.”

 

마치도 예수를 태운 어린 나귀 새끼의 착각에 빠지면 안 된다. 사람들이 자기 잔 등에 겉옷을 덥고 종려나무 가지를 깔고 흔들 때 착각한 것처럼 그런 착각에 빠지면 안 된다. 우리 가운데 젊은이이든 연세가 지긋하게 드신 누구이시든 이걸 인정하지 않을 이가 누가 있나. 나의 힘은 여호와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내가 그분을 노래할 이유가 되신다. 

 

그렇지 않나. 출애굽을 모세가 가능하게 하였나. 아니지 않나. 출애굽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룩하신 역사적인 기적 사건이다. 광야의 만나와 메추라기를 누가 공급하였다. 광야의 반석에서 물이 넘쳐 나오게 하신 분이 누구인가. 요단강은 누가 건너게 하였는가. 여리고 성은 누가 무너지게 하였는가. 

 

이삭을 아브라함이 낳았나. 사라가 낳았나. 요셉이 스스로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나. 사무엘을 한나가 나았나. 다윗이 스스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나. 아니다. 하나님의 그렇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힘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판단으로, 하나님의 결정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이루어진 일들이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수능시험 만점자가 발표되었다. 누구는 만점을 맞고 누구는 형편없는 점수를 받는다. 물론 노력한 만큼 성적표를 받아 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청년기를 맞은 저들의 앞으로 10년, 20년, 30년 아니 그 이후의 인생의 성적표와 인생 노정은 아무도 모른다. 자신도 모르고 부모도 모른다. 우리 각 사람의 생은 그분의 손안에 있는 것이다. 물론 수고하고 애쓰고 땀 흘리고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는 열심히 필요하다. 그러나 심고 물 주는 것 말고 자라게 하고 열매를 거두게 하는 것은 그분의 손길이다. 그분에게 힘이 있으시다. 그분의 능력으로 인생과 우주 삼라만상의 범사가 다스려지고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앞으로 한 주 동안 욥기 33장 이후의 엘리후를 통해서 말하는 수 많은 말들을 묵상하게 될 것이다. 거기 4절에 보면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나. 엘리후를 통한 이와 같은 말에 누가 아니라고 말하겠는가. 

 

오늘 이만한 힘을 얻어 숨을 쉬고 맥박이 뛰고 있고 활동할 수 있는가. 그 모든 힘의 근원이 내 스스로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신앙 고백 속에 살기를 원했던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하였다. 다윗은 시편 18편 1절에서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I love you, O LORD, my strength.)라고 고백하였다. 그렇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를 지탱하고 나를 유지하고 나를 나되게 하는 그 모든 힘의 원천이 주 여호와께로부터 공급되는 생명력이다. 그러므로 나의 힘과 노래의 이유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찬송하여야 하는 것이다. 

 

여호와가 나의 힘이시고 나의 노래할 이유인 것이 깨달아지고 나면 우리 각 사람의 마음 속에 헤아릴 수 없는 기쁨이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는 12장 3절에서 이렇게 고백한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우물이 무엇인가. 끊임이 없이 샘물이 솟아오르는 곳이 우물이다. 실로 깨다고 체험하고 나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성도들에게 끊임이 없이 샘 솟는 생수의 근원이시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수의 근원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7-38)라고 하셨다. 이런 기쁨을 감사와 찬송으로 이어가는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그의 아름다운 일을 만국 중에 선포하라.

하나님이 하신 일은 지극히 아름다운 일이며 크신 일이다. 5절의 ‘아름다운 일’이란 ‘게우트’인데 이는 ‘장엄한 일, 영광스러운 일’이란 뜻이다. 생각하여 보라. 성경에는 하나님이 행하신 장엄한 일, 영광스러운 일, 아름다운 일들이 넘쳐 난다. 국가적으로 가정적으로 개인적으로 그런 기사와 이적들로 가득하다. 맞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에게 아름다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이시다. 

 

한나에게 아들 사무엘을 주신 일이 하나님이 행하신 아름다운 일이다. 모압 여인 룻이 베들레헴의 대지주 보아스의 아내가 되어 아들 오벳을 낳은 일이 아름다운 일이다. 그 오벳이 이새를 낳고 이새를 통해서 다윗이 태어난 일이 하나님이 행하신 아름다운 일이다. 

 

성경이 소개하는 하나님이 행하신 아름다운 일 중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선물로 보내주신 일이다. 생각하여 보라.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보내주지 않으셨다면 하고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신 이 아름다운 일을 천하만국의 천하 만민들에게 선포하여여 한다. 

 

지난 주에 멕시코 유카탄 지역에서 선교하는 조남환 선교사의 선교 보고 영상물을 받았다. 그는 나의 신학교 일 년 후배이다. 충남 홍성 시골 출신이다. 신학교 때에 까무잡잡한 얼굴에 늘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옆구리에 두꺼운 성경책을 끼고 기숙사에서 강의실로로 채플로 드나들던 그의 40년 전의 모습을 기억한다. 신학교 때에는 그가 장차 멕시코에서 평생을 사역할 선교사 후보인 것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학장도 교수도 동료들도 선후 배들 중에 그 누구도 몰랐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셨다. 하나님은 그를 연단하고 준비시키셔서 평생토록 멕시코를 떠나지 않는 선교의 사람으로 붙들어 쓰고 계신다. 그의 두 아들 중에서 큰 아들은 미국에서 목회하는 미 연합감리교회의 목사이다. 작은 아들은 현지인 여성과 결혼하고 아버지의 대를 이어서 멕시코 선교 현장에서 충성을 다하는 복음 전파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지난 주에 디모데 후서를 묵상하였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고 하였다. 

 

115장 찬송 <기쁘다 구주 오셨네>의 가사를 보라.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 백성 맞으라 온 교회여 다 일어나 

다 찬양하여라 다 찬양하여라 다 찬양 찬양 하여라

Joy to the world! the Lord has come;

Let earth receive her King;

Let every heart prepare Him room,

And heaven and nature sing,

And heaven and nature sing,

And heaven, and heaven and nature sing.

 

온 세상 죄를 사하려 주 예수 오셨네 죄와 슬픔 몰아내고

다 구원하시네 다 구원하시네 다 구원 구원 하시네

No more let sins and sorrows grow,

Nor thorns infest the ground;

He comes to make His blessings flow

Far as the curse is found,

Far as the curse is found,

Far as, far as the curse is found.

 

할 수만 있으면 날 구원하신 하나님이 은총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만방에 전하고 또 전하는 복음 전파자의 삶을 계속하여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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