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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주를 본 받은 자(살전1:1-10) 2020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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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0-11-13 20:05 조회 212 댓글 0
 
                    주를 본 받은 자(살전1:1-10)             2020. 11. 1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주를 본 받은 신앙으로 주변 지역에 좋은 소문이 난 교회였다. 그들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사도 바울이나 실루아노와 디모데의 신앙을 본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고저하는 신앙이 분명하였다. 그래서 그 좋은 소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런 좋은 소식을 전해 듣고 감사하고 기도하며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이다. 

사도 바울과 실라에 의한 데살로니가 지역 전도의 역사는 사도행전 17장에 담겨 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지역 전도 중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매 맞고 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감옥에서 풀려 나긴 했지만 더 이상 빌립보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할 수가 없었다. 그 때에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경위해서 이동해 간 도시가 데살로니가이다.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의 아가야 지역의 수도였다. 회당에서 세 안식일을 맞기까지 성경을 갖고 강론하며 날마다 복음을 전하였다. 그 때에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가 복음을 받아 들였다. 적지 않은 귀부인들도 복음을 받아 들였다. 그러나 불량배까지 동원하는 유대인들의 시기와 방해와 협박으로 인해서 더 이상 데살로니가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할 수 없었다. 바울과 실라는 밤 중에 그의 탈출을 돕는 믿음의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서 뵈뢰아로 이동해 갔다. 

세 안식일 즉 삼 주의 짧은 기간 동안 머물려 복음을 전한 곳이 데살로니가인데 그 때에 복음을 받아 들인 이들에 의해서 교회가 탄생하였다. 부흥을 이루었다. 그 소식을 듣게 된 사도 바울은 감사와 칭찬의 마음을 가득 담아서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이다. 

데살로니가 전서는 사도 바울이 쓴 13편의 서신서들 중에서 가장 먼저 쓴 편지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뵈뢰아로, 뵈뢰아에서 바다로, 바다에서 아덴으로, 아덴에서 고린도로 이동하며 쉬임이 없이 계속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한 바울 사도의 마음에는 언제나 데살로니가에서 만났고 복음을 받아 들인 형제자매들에 대한 궁금증이 가득하였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고는 하였다. 

2장 17절에 보면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고 하였다. 그래서 디모데를 데살로니가에 보내서 그 곳의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의 신앙 생활에 대하여 전해 듣기를 원하였다. 3장 2-3절에 그런 내용이 담겨 있다. 디모데를 저들에게 보내려는 목적은 저들의 신앙을 굳건하게 하고 믿음 생활에 대하여 위로하며 어떤 환난을 당하더라도 흔들리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후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 고린도로 옮겨 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에 데살로니가를 방문했던 디모데가 그 곳의 소식을 갖고 돌아 왔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통해서 전해 들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신앙 생활 모습에 대하여 구구 절절이 칭찬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오늘 본문인 데살로니가 1장은 그런 감사와 칭찬의 내용을 가득하게 담고 있다. 

그래서 편지의 시작에 보면 바울은 자신의 이름 곁에 실로아노와 디모데의 이름을 나란히 기록하면서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문안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기도의 내용이 분명하였다. 횡설 수설하는 기도가 아니었다. 2절에 보면 바울 사도는 기도할 때마다 감사하는 기도를 드릴 뿐만 아니라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기억하며 기도한다고 하였다. 2절 끝과 3절 끝에 ‘기억한다’는 표현을 두 번이나 강조하고 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은 기도 시간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항상 기억하며 기도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고백이 담긴 표현이다. 

자, 그러면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통해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어떤 신앙 생활의 모습을 전해 들었기에 이처럼 감사하고 칭찬하며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일까. 3절 말씀을 함께 읽자.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주보에 실은 현대인의 성경으로 3절을 다시 읽자.

“우리는 여러분이 믿음으로 행한 일과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인내한 것을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늘 기억합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통해서 전해 듣고 기억하며 늘 감사하며 기도하는 내용은 세 가지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행하였다. 바울도 늘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감사하며 기도하였다. 신전의식(Coram Deo)을 말씀한다. 부산 고신대학교 교훈이 그것이다. 차례로 묵상하자. 

믿음의 역사.
믿음의 역사를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믿음으로 행한 일”이라고 하였다. 맞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구원 받은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믿음으로 선을 행하여야 한다.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니지만 죄 사함과 구원의 감격을 가진 성도라면 믿음으로 일하고, 믿음으로 섬길 줄 알아야 한다. 믿음으로 충성하고, 믿음으로 헌신하고, 믿음으로 희생하여야 한다. 

가롯 유다는 예수의 제자였지만 3년 동안 한 번도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와 마르다의 여동생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 나드 옥합을 깨트려 예수의 발에 부어 드리리 만큼 예수를 향한 믿음의 섬김이 있었다.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서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의 발에 부은 향유를 닦아 드릴 때에 온 집안에 향유 향기가 가득하였다.

주를 섬기는 일은 믿음으로 하는 일이어야 한다. 예수께서 붙잡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 날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다 도망가 버렸다. 예수는 아침 아홉시에 십자가에 달리셨다. 정오에는 해가 빛을 잃었다. 온 땅에 어둠이 덮혔다. 예수는 오후 세시경에 운명하셨다.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 졌다. 땅이 진동하였다. 바위가 터졌다. 무덤이 열렸다.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 저들은 삼일 후 예수의 부활 후에 더불어 거룩한 성 예루살렘 안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에게 보였다.

예수의 죽음과 무덤과 부활의 과정을 지켜 본 백부장과 그 곁의 무리들은 그 일어난 일들을 목격하고 심히 두려워 하였다. 그 백부장이 말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27:54)

신앙 생활은 믿음 생활이다. 믿음을 가진 성도라면 생각이 다르고 입의 말이 다르고 생활이 다르고 하는 일이 달라야 한다. 믿음의 역사란 ‘역사’ 즉 ‘에르곤’( εργον)이란 말은 “일, 행동, 임무”등의 뜻을 가진 단어이다.“이미 이루어진 행동”을 말한다. 그렇지 않나. 업무와 일은 결과로 말한다. 대강 대강 했는데 잘되는 일이 있나. 건성 건성 강건너 불 보듯했는데 보람된 결과를 가져온 일이 있나. 그러므로 “믿음의 역사”란 믿음으로 충성되고 지혜롭게 열심을 다하여 일한 결과를 말씀하는 것이다. 즉 할까 말까 망설이는 행동이 아니라 믿음을 갖고 행동한 그 열매, 그 결실, 그 결과를 말한다. 올 한해가 기울어 가고 있다. 오늘이 11월 1일이다. 이제 올 해도 두달밖에 남지 않았다. 금방 지나갈 것이다. 

코로나, 코로나 하는 동안에 10달이 지나갔다. 봄과 여름이 다 지나갔다. 가을도 이렇게 지나갈 것이다. 얼마나 세월이 빠른가. 지금쯤 자신에게 질문해 보아라. “과연 나는 올해 주님을 위하여 믿음으로 어떤 일을 하며 지내 왔는가”전염병인 코로나에 걸릴까봐 주저 주저하고 두려워하고 염려하다 보니 한해가 다 지나간 것은 아닌가. 정부가 나서고 질병관리 본부가 나서서 교회 가지 마라, 교회에서 모임 갖지 마라, 교회에서 음식 먹지 마라, 교회에서는 둘러 앉아서 커피도 마시지 마라 이러면서 교회를 옥죄는 동안에 핸드폰만 만지작 만지작 하면서 예배 답지 않은 예배를 예배드린답시고 망설이는 동안에 한해가 다 지나가 버린 것은 아닌가.

이제는 모여야 한다. 이제는 교회에 나와서 예배하고 교회에 나와서 기도드려야 한다. 언라인 예배드리고 댓글 다는 정도로 만족하지 말고 새벽에도, 밤에도 교회에 와서 예배하여야 한다. 코로나 이전의 예배생활을 회복해야 한다. 예배가 믿음으로 행하는 일 중의 제일이다. 그리고 가정과 직장과 일터와 세상의 일상 중에서 믿음으로 매사를 행해야 한다. 

제자들이 다 도망가 버린 그 날, 예수는 십자가에서 운명하셨다. 이제 세 시간 쯤 후면 안식일이 시작될 것이다. 예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려  장례해야할 제자들이 한 사람도 보이질 않았다. 그 때 믿음으로 나서서 본디오 빌라도를 만나고 예수의 시체를 달라해서 니고데모와 함께 예수를 장례한 주인공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다. 그는 공회원이었다. 마태복음 27장 57절에 보면 “그도 예수의 제자라”고 하였다. 마가 복음 15장에 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당돌하리 만큼 용감한 사람이었다.(막15:43) “그는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막15:43) 누가복음 23장 50절에 보면 “그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뿐만 아니라 그는 그 시대의 주변 인물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는 일이 옳지 않은 일이라고 분명한 믿음과 분별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장차 자신의 죽음을 위해서 마련해 두었던 새 무덤에 예수의 시체를 정성스럽게 장례하였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 그는 믿음으로 역사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믿음으로 행할 일을 행한 진실한 믿음의 증인이었다.

단기 선교, 장기 선교, 모든 사역은 믿음에 바탕하여야 한다. 길거리에 나서서 전도지 한 장을 건네는 일도 믿음으로 행하여야 한다.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열심과 관심도 그 바탕은 믿음이어야 한다. 

믿음이 없이 봉사하면 탈이 난다. 믿음으로 섬기지 않으면 생색내게 된다. 믿음으로 돌보고, 믿음으로 나누고, 믿음으로 충성하지 않으면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한다. 자랑하려 한다. 믿음으로 일하는 성도는 “다만 하여야 할 것을 한 것 뿐입니다.”하고 늘 겸손하게 반응한다.

헌금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몸으로 땀 흘려 섬기는 것도 그러하다.
재주와 은사와 경험을 갖고 섬기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재물, 은사, 경험, 역량, 지위, 능력 등 그 어떤 무엇으로 주를 섬기고 성도들을 돌보고 교회를 섬기든지 믿음으로 행해야 한다. 믿음이 없이 자기 의욕으로 하면 자기가 드러나게 된다. 남이 알아 주지 않으면 섭섭해 진다. 남이 뭐라고 하면 삐진다. 믿음으로 섬기고, 믿음으로 충성하고, 믿음으로 헌신하고, 믿음으로 희생하는 성도는 뒤탈이 없다. 믿음으로 행하는 성도는 나는 죽고 주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으로 만족해 한다. 


사랑의 수고.
사랑으로 하는 수고는 수고로움이 없다. 사랑으로 섬기고 사랑으로 돌보고 사랑으로 대하면 모든 것이 기쁨이고 모든 것이 감사이고 모든 것이 만족이고 모든 것이 축복이다. 그렇지 않나. 사랑이란 감정이 저절로 생기나. 내가 꽃 한 포기를 사랑하든, 혹은 반려견 한 마리를 사랑하든 혹은 길고양이 한 마리를 사랑하든 어항 속의 작은 금붕어를 사랑하든 사랑으로 대하면 모든 것이 기쁨이고 모든 것이 기대이고 모든 것이 만족이다. 

가족을 대하는 마음, 이웃을 대하는 마음, 성도들 간에 서로를 대하는 마음 바탕에 사랑이 있다면 그 모든 수고로움은 수고라고 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사랑하니까. 그 대상이 물건이든, 사물이든, 사람이든, 일이든 사랑으로 대한다면 힘들 게 없다. 사랑으로 하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이다. 일이 힘들거나 사람이 힘든 것이 아니다. 

“여행은 어디로 가느냐 보다 누구와 가느냐이다”라는 말이 무엇인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길은 둘레길만 나서도 기쁘다. 그러나 원수와 동행하는 길이라면 세계 최고 유람선을 타도 악몽일 뿐이다. 

사랑하지 못하니 문제인 것이다. 사랑이 식었으니 문제일 뿐이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지 못하니 그런 것이다. 가족, 가정, 직장, 직업, 그 어떤 일이든, 그 어떤 사람이든 사랑으로 대하여 보라. 사랑한다면 일이 문제인가. 사람이 문제인가. 바울은 분명히 말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시간이 없고 돈이 없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사랑이 없어서이다. 주님을 사랑하는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저절로 사랑하게 될 것이다. 성도들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바탕에 주님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사랑은 식지 않는 사랑 수고로움이 없는 끊임 없는 사랑의 섬김이 될 것이다. 

최근까지 국내 최고령 현역 여의사로 활동한 한원주(1926-2020) 권사가 지난 2020년 9월 30일, 94세에 돌아가셨다. 그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경기도 남양주 매그너스요양병원의 내과 과장으로 근무하였다. 



그는 요양 병원의 내과 과장 직분이었으나 환자나 주변 분들은 그를 원장이라고 불렀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까지도 반듯한 모습을 보였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는 지난 1월 달에 일간 신문 인터뷰에서“할 수 있는 때까지 일하다 하나님이 부르면 언제든지 ‘네, 갑니다’ 하고 달려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눈을 감기 전에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힘내”, “가을이다”, “사랑해” 등 세 마디였다고 한다.

그는 82세때부터 올해까지 12년간 매그너스요양병원에서 현역 의사로 일했다. 오전 9시 출근해 하루 20여 환자를 회진하며 처방을 내렸다. 한원주 권사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예쁘게 보이고 싶은 욕구가 살아 있어야 건강하다는 증거야”라며 눈썹을 그리고 립스틱을 바르고 출근했다고 한다. 흰 머리를 가리기 위해 늘 검은색 모자도 썼다. 고인은 또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하다”며 “살아 있는 동안 기쁘게 살며 내 할 일을 다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늘 “사랑하면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는 지론을 갖고 환자들에게 정성을 다했다.

1926년생인 한원주 권사는 23살 때인 1949년에 고려대 의대 전신인 경성의학여자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산부인과 전문의가 되었다. 남편과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는 내과 전문의 자격도 취득했다. 귀국해서 병원을 개업해 돈도 많이 벌었다. 하지만 약 40년 전에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병원을 정리하고 의료 선교 병원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거의 40여년 동안 무료 진료 봉사 활동을 펼쳤다. 그러다 82세 때에 노인 요양병원 의사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작년 가을에 <백세 현역이 어찌 꿈이랴>라는 수필집도 출판하였다. 

우리가 송구영신 예배 때 부르고 평소에 잘 부르지 않은 찬양이 두 곡 있다. 

“사랑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주님
사랑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주님
내 부르짖음 들으시고 감싸 주시는
영원히 주 찬양합니다. 내 맘을 다해..”

“주님께서 주시는 그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그 축복으로 당신을 축복합니다
형제의 삶 속에 주 영광 나타날 때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리
자매의 삶 속에 주 사랑 나타날 때에 주님의 구원이 임하리”

사실 우리는 이런 찬양을 날마다 불러야 한다. 순간마다 불러야 한다. 부르지만 말고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 각 사람을 향하신 주님의 기대이다. 

이 좋은 가을에 식은 사랑을 회복하는 은혜의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소망의 인내.
세상사람들은 세상적인 희망을 갖고 살아간다. 그러나 성도의 소망은 바울이 3절에서 교훈하는 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어야 한다. 그래야 그런 소망을 갖고 인내 하며 살아갈 때에 성도다운 삶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아파트 장만하는 소망, 명문대학 진학하는 소망, 학위 받는 소망, 부자 되는 소망, 대박나길 기다리는 소망, 권력자가 불러주길 바라는 소망, 뭐 그런 소망도 필요하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 있어야 한다. 

488장 찬송에서 <이 몸에 소망 무언가>라고 찬송하지 않나.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우리는 성도다운 소망, 믿음의 사람다운 소망을 갖고 온갖 환난과 고통과 역경과 시련과 위험을 극복하며 믿음의 분명한 푯대를 정하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믿음의 역사’가 과거 완료형이라면 ‘사랑의 수고’는 현재 진행형이다. 여기 ‘수고’(受苦)라는 ‘코포스’(κόπος)라는 단어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고생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사랑의 수고의 완성이시다. 설명으로 대신 설명할 것이 없는 사랑의 수고가 십자가에 죽으신 죽으심이다. ‘소망의 인내’는 미래 완료형이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소망은 세상적인 소망이 아니다. 10절에 그 대답이 있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는 말씀 말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3장 13절에서도 소망으로 인내하여야 하는 근거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믿음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수고하고, 소망 중에 인내하여 각 사람을 향하신 주님의 선한 뜻을 이루어 성도 간에 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사도들과 주님을 본받는 자가 되었다.”뿐만 아니라 각양 우상을 다 버리고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잘 섬김으로 칭찬받았다.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본 받아 서로에게 모본이 되는 거룩하고 성숙한 삶을 살아가는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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