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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일을 창조하시는 여호와(렘31:21-30) 2020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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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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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9-18 23:10 조회 8,390 댓글 0
 
                새 일을 창조하시는 여호와(렘31:21-30)     2020. 9. 13


엄청난 홍수, 긴 장마, 강한 태풍, 허리케인, 큰 불, 가뭄, 전염병, 황사, 미세 먼지 등이 일상이 되어 있다. 국제 항공 산업, 관광 산업, 여행업, 숙박업, 레저 산업, 요식업, 카페, 유흥업, 대형 스포츠 경기, 영세 상인, 중소 기업, 자영업 등등 나라 경제가 엉망이 되어 가고 있다. 대기업도 이에서 예외일 수 없다. 

최근 세 차례의 지나간 태풍은 바닷가에 설치한 50톤 무게의 인공 방파제인 ‘테트라포드’를 육지 위로 옮겨다 놓을 정도의 거센 파도와 강력한 바람이었다고 한다. 울릉도에도 큰 피해를 입히고 지나갔다고 한다.  

요즘 미국 서부의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한 그 주변 3개 주에서는 동시 다발적으로 80여건 이상의 산불이 났다고 한다. 이미 불에 탄 면적만도 서울의 20배가 넘는다고 한다. 한낮에도 하늘이 붉은 색으로 뒤 덮혀서 낮인지 밤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작은 불이 번져서 대 재앙이 된 것이다. 사망자도 늘어나고 있고 이재민의 수가 50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올해 안에 캘리포니아 주에서만도 산불로 불에 탄 면적은 대한민국의 절반에 가까운 면적이라고 하니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재난이 아닐 수 없다. 금문교라고 부르는 샌프란시스코의 골든게이트브리지 사진이 지난 수요일 오전 11시 장면으로 인터넷 뉴스에 실렸다. 오전 11시면 한창 화창해야 할 낮 시간인데 사진에서 보는 이런 장면이다. 누군가의 작은 부주의가 이처럼 어마어마한 재앙을 부르는 것이다. 

상상해 보라. 그런 날들이 계속된다면 사람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어떤 일이든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그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그러하다. 때가 되면 지나간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솔로몬의 명언이라고 하지 않나.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재앙도 언젠가는 잦아들고 평온해질 날이 분명히 찾아올 것이다. 

오늘 말씀인 예레미야 31장 22절에 보면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라고 말씀하셨다. 요즘 우리는 예레미야서를 날마다 묵상하고 있다. 70년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을 예언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으로부터 이와 같은 예언의 말씀을 받아 전한 예레미야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질책과 저항을 받게 되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거짓 선지자들이 득세하던 그 당시에 예레미야의 이와 같은 예언을 그 어느 누구인들 환영할 리가 없었다.

과거에 우리나라가 일본에 의해서 겪은 식민지 생활은 36년 동안 이어졌다. 그 당시에 그 어떤 누구도 감히 해방의 날이 그렇게 쉽게 찾아올 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일본의 히로히토 천황이 항복 선언을 하고 우리나라에 해방의 날이 찾아 왔다.

주전 722년에 북 왕국 이스라엘이 망했다. 앗수를 침략을 받은 것이다. 남 유다의 백성들이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망한 것은 주전 586년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서 장차 겪을 포로 생활에 대하여 경고하고 또 경고하셨다. 그런 중에서도 오늘 말씀은 70년간의 포로 생활 이후에 회복될 은혜와 안식의 날에 대한 약속이시다. 

오늘 읽은 본문 중에서 21절에서는 ‘처녀 이스라엘’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이 22절에서는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예전에 대하던 <개역한글성경>에서는 “패역한 딸아”라고 말씀하셨다. ‘처녀 이스라엘아’ 라고 사랑스럽게 부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갑자기 ‘패역한 딸아, 반역한 딸아’라고 정 반대의 표현으로 책망조로 말씀하셨다.  

딸처럼 사랑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의 포로 생활 가운데로 몰아내셔서 극심한 고난을 겪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세월이 지나고 말씀하신 날이 차서 끌려간지 70년만에 다시 예루살렘과 유다 땅으로 되돌아오게 해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의심하고 불신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 대하여 하나님은 ‘반역한 딸아’라고 책망하며 말씀하신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힘이 센 남자가 힘이 연약한 여자를 둘러싸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반대의 상황으로 말씀하셨다. 22절 끝에 “여자가 남자를 둘러 싸리라.”이것이 무슨 의미를 말씀하신 것일까에 대한 해석은 의견이 분분하다. 분명한 것은 상식을 벗어나서 연약한 자가 강한 자를 이기는 날이 오리라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하신 하나님이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상에 창조하신 새 일이란 무엇인가.


살던 성읍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
21절의 ‘이정표를 세우고 푯말을 만들라’는 말씀은 바벨론으로 끌려 갈 때에 그렇게 하라는 가르침이시다. 그러면 끌려가는 비참한 상황에 왜 처처에 ‘이정표’를 세우고, ‘푯말’을 만들라고 하셨을까. 지금은 비록 끌려 가고 있지만 때가 되면 그 울며 끌려 갔던 그 길로 다시 되돌아 올 날이 분명히 있으리라는 분명한 약속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되돌아 올 때에 필요하니 이정표도 세우고 푯말도 만들어 두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가 아는대로 애굽의 노예 생활 430년을 겪은 일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에게도 고통스런 세월이었지만 하나님 아버지께 있어서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요 언약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의 포로로 내어 모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심정 또한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이셨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지난 주일 본문으로 묵상했던 예레미야 29장 11절에 보면 하나님은 무어라고 말씀하셨나.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려는 것이니라.”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하나님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언약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처럼 우상 숭배에 빠지고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해서 멸망 받는 백성이 되길 원하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기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돌아온 백성들이 하나님 안에서 장래의 소망을 품고 재앙을 딛고 평안과 안식의 날로 새롭게 나아 가는 것이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여호와께서 세상에서 창조하시는 새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적의 시골집은 참 열악하였다. 부엌 살림살이. 주방의 여건, 화장실 상황, 냉난방 문제, 밤의 어둠을 밝히는 호롱불의 침침한 조명 등 그 어느 것 하나 변변한 것이 없었다. 신발은 어른이나 아이나 검정색 혹은 흰색의 말표 고무신이 전부였다. 우리 집은 시골 집 치고는 그렇게 못 사는 형편이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요즘처럼 수도꼭지만 틀면 냉수와 온수가 콸콸 나오는 상황이 아니었다. 50-60년 전의 그 당시야 어쩌면 시골이나 서울이나 비슷했을지도 모른다. 가마솥을 건 아궁이에 일일이 장작불을 지펴야 밥도 짓고 국도 끓일 수 있었다. 한 겨울에 따뜻한 물을 쓰려면 가마 솥 하나는 물을 끓여 퍼 쓰는데 사용해야 했다. 추운 겨울 한 밤중에 집 밖에 따로 있는 화장실에 가려면 참으로 귀찮키가 그지 없었다. 그래서 개발해 쓴 것이 윗목이나 마루에 요강이란 것을 들여 놓았다. 

사실 요즘 세상에도 집안에서 상하수도를 해결하고 냉온수가 콸콸 쏟아져 나오고 여름이면 에어컨에 겨울이면 따뜻한 난방을 버튼 하나 누르는 것으로 손쉽게 해결하며 살아가는 인구는 78억의 세계 인구 중에서 비율로 하면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다. 세계의 다른 나라 사람들이 모두 다 우리나라처럼 잘 사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된다. 

더군다나 2,600여년 전의 삶이란 것이 오죽했을까. 그런 여건에서 더군다나 남의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서 지내는 그 형편이 얼마나 고통과 고난과 슬픔과 처절한 비극의 날이었겠는가. 포로 생활이란 것이 자유를 빼앗긴 채 살아가는 여건이니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약속하셨다. 너희들이 예루살렘과 너희들이 살던 성읍으로 되돌아 오는 날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예레미야 31장을 지난 금요일부터 내일 월요일까지 나흘에 나누어 묵상하게 된다. 사실은 좀 긴 분량이지만 단숨에 전체를 다 읽고 한꺼번에 묵상해야 앞뒤 문맥이 한눈에 들어오고 더 크게 은혜가 되는 말씀이 예레미야 31장이다. 예레미야 31장은 ‘새 언약장’이라고 제목 붙이는 예레미야 전체 52장 분량 중에서 핵심이 되는 말씀이 담긴 내용이다. 

예레미야 31장 8-9절을 다시 보자. “보라 나는 그들을 북쪽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라 그들 중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있으며 큰 무리를 이루어 이 곳으로 돌아오리라 그들이 울며 돌아오리니 나의 인도함을 받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넘어지지 아니하고 물 있는 계곡의 곧은 길로 가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여기서 말씀하는 ‘북쪽 땅’이란 바벨론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은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신세이지만 때가 되어 하나님의 용서가 선포되는 그 날이 되면 이리 이리하게 해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북쪽 땅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땅 끝에서부터 모을 것이다.
-아무리 연약한 자들이라도 큰 무리를 이루게 하여 되돌아 오게 할 것이다.
-돌아오는 그들이 울며 감격하며 돌아 올 것이다. 
-나의 인도함을 받고 간구하게 될 것이다. 
-그 날에 내가 그들을 넘어지지 않게 할 것이다. 
-메마른 땅이 아닌 물이 있는 계곡으로 인도할 것이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다.
-에브라임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의 장자다.

올 2020년은 농사로 하면 흉년이다. 때가 되어 월급 받는 직장인이 아니라면 자영업자나 대기업이나 중소기업가나 영세한 상인들의 경우에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울상이다. 나오는게 한숨 뿐이다. 앞이 보이질 않는다. 경제 상황이 안개 속이다. 언제까지 이러한 형편이 계속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조차 없다. 세계의 그 어느 나라를 보나 별 차이가 없다. 

그런 나날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오늘 묵상하는 예레미야서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23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때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장차 유다 땅과 자신들이 살던 성읍들로 돌아가서 그 곳을,

의로운 처소여
거룩한 산이여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고 말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다. 

요즘 저는 빈 예배당에서 빈 의자를 앞에 놓고 매일 새벽 마다 영상 설교를 하고 있다. 요즘 이렇게 한 달 가까이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지 못하는 성도들의 심정이 어떤 심정일까를 상상해 보지만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뇨 전혀 그렇지 않은데요 지금이 좋은데요 길에서 시간 쓰지 않고 TV나 컴퓨터나 핸드폰의 화면 앞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훨씬 편하고 좋은데요” 라고 생각하는 분이 단 한 분도 없기를 바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끌려가서 지내 보니까 절기를 따라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제사하던 날이 얼마나 귀한 날이었는지를 실감하게 되었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우상숭배와 죄악으로 인하여 책망하고 벌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은혜를 입게 하시며 안식을 누리게 하신다. 영원한 사랑과 인자로 이끌림을 받게 하신다. 하나님이 세우시면 세워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즐거워하게 하시면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며 함께 춤을 추며 나아오게 되는 것이다. 

그런 회복의 은총이 이 땅과 주를 믿고 경배하는 우리 각 사람에게 골고루 임하기를 축원한다. 


심령을 상쾌하고 만족하게 하시는 하나님.
요즘 너나 나나 웃을 일이 별로 없다. 쉬어도 쉬는 것 같지를 않다. 어디를 가고 싶은 마음도 없다. 여름이 다 가고 서늘한 바람이 불도록 날마다 텅 비어 있는 예배당을 지키면서 새벽 기도하며 하루 하루를 지내는 것이 일과이다. 교우들 가정을 찾아가서 예배드리는 것도 폐만 될 것 같다. 오히려 자주 안 만나고 가까이 안 만나는 것이 예의인 것만 같다. 그러는 중에 긴긴 장마가 다 지나가고 세 번의 태풍도 다 지나갔다.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요즘이 코로나19와의 전쟁인데 전쟁 중에 가긴 어길 가나 하고 꾹꾹 참고 아무데도 드나들지 않고 예배당에 붙어 앉아 ‘주여 주여’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또 구하는 기도만 계속하였다. 사업을 이어가기는커녕 아예 사업장 문을 닫은 교우들 가정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빈 가게 지키고 손님의 발길이 끊긴 가게에서 버티기를 할 교우들 생각하면 눈물이 핑 돈다. 교회도 그렇다. 한 가정 한 가정 부흥해도 시원치 않을텐데 올해는 새가족은 커녕 우리끼리 조차도 모여 예배 못드린지가 한달이 되어 가니 머리가 띵하고 앞이 깜깜해 진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 내려 가다 보니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25절을 보라.

나의 피곤한 심령을 상쾌하게 해 주시는 분이 누구신가.
나의 모든 연약한 심령을 만족하게 해 주시는 분이 누구신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실 수 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24절을 보라. 목가적(牧歌的)이지 않나. 그 모든 성읍마다 농부가 평화롭게 농사를 짓는다. 양 떼를 모는 목동과 목자들이 평화롭게 농부들과 더불어 들판과 산허리를 덮는 양떼를 인도한다. 이러한 장면을 상상하면 그림같은 평화로움이 전해진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 피곤한 심령을 상쾌하게 하였다. 
내가 너희 모든 연약한 심령을 만족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생생한 음성을 듣고 깨어 보니 꿈이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분명한 회복의 약속을 예레미야의 꿈을 통해 말씀하셨고 때가 되어 이룩하신 것이다. 

깨어서 세우고 심으시는 하나님.
예레미야가 깨어 보니 꿈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셨고 그 꿈에 말씀하신 약속의 말씀들을 때가 되어 일일이 다 이루셨다. 하나님은 언약하시고 때가 되면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신앙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다. 믿고 따르는 것이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다고 해서 나도 물 위를 걸어 보려고하면 않된다. 베드로는 그 상황에서 물 위로 걸어 오시는 예수께 “주여 나도 물 위로 걷게 하옵소서”하고 요청하였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물 위로 뛰어 내려 걸으라’고 하고 명령하셨다. 예수의 그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주의 말씀대로 배에서 물 위로 뛰어 내렸을때에 걸을 수 있었다. 순간 바람과 파도를 바라고 보고 두려워 하게 되자 물에 빠져들어 가고 말았다. 베드로는 그날 그 순간 그를 향하신 예수의 명령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명대로 순종할 때에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 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나를 향하신 주의 말씀이 없는데 주의 말씀을 시험하려 하면 안된다. 주의 말씀을 따라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야게 무슨 말씀을 더 하셨는가. 26절, 단 꿈에서 깨어난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계속하여 임하였다. 장차 하나님께서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과 유다 집에 뿌리실 날이 이를 것이라고 하셨다. 번성하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하나님은 장차 고난 중에 버려진 자처럼 살아가던 바벨론 포로의 땅의 백성들을 세우시고 심으시리라고 약속해 주셨다. 조상들의 죄로 인해서 후손들이 고난을 받는 경우란 없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우리가 오해하면 안된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아들의 이가 시게 되는 경우란 없다. 이게 무슨 뜻인가. 누구나 자기 죄로 말미암에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신 포도를 먹는다”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인간은 자기 죄의 값을 자기가 받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나. 앞 못 보는 사람이 아비의 죄 때문이 아니란 말이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려는 다른 섭리가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맞다. 하나님은 무너트리시고 뽑아 버리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 받는 백성들이 열방 백성들 가운데 우뚝 세워지길 원하신다. 예레미야 31장 4절에도 보면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라고 약속해 주셨다. 이사야 14장 3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셨으니”라는 말씀이 있다. 그렇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멸망되게 하신 분도 여호와시고 다시금 시온 성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재건하실 분도 여호와이시다. 하나님이 세우시면 무너트릴 세력이란 이 땅 그 어디에도 없다. 여호와께서 심으시고 번성하게 하시면 뽑아 낼 대적이란 없다.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 하나님이 세워 주셔야 한다. 하나님이 심어 주셔야 한다. 그래야 견고하고 그래야 강성하고 그래야 번성하고 그래야 왕성할 수 있다. 힘으로도 능으로도 못하나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되는 것이다.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요즘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이들이 많다. 층간소음으로 치고 박고 싸우고 구타하고 구타를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 하다.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니까 자꾸만 디저트를 찾게 된다. 그러다 보니 단거(DANGER)를 너무 많이 먹게 되고 그러니까 그게 건강을 해치는 위험한 상황이 반복된다. 

어느 정신신경과 교수의 강의 중에 영어 조크를 보았다. 인류가 설탕을 정제해서 먹기 시작한 지는 500년 전이다. 그 당시 초기에는 설탕이 금값처럼 비쌌다.
       
STRESSED 스트레스
DESSERTS   디저트
DANGER     단거
DANGER     댄저

스트레스를 단거로 풀려 하지말고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와야 한다. 주께 직고하여야 한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때가 되어 이루신 하나님이 우리들의 범사를 다르려 소원의 항구로 인도해 주실 줄로 믿는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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