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신30:15-20) 2022. 9. 4
나라나 부모는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남녀의 성별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게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이 없는 수 많은 것들을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된다. 학교, 전공, 직업, 배우자 등은 나의 선택이다. 사소하게는 중국 식당에 가서 짜장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하는 고민은 누구나 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중국 식당에서는 그릇을 남북으로 나누어서 절반은 짜장, 절반은 짬뽕을 담는 짬짜라는 메뉴도 개발하였다. 어떻게 보면 짜짱과 짬뽕을 한 그릇에 절반씩 주문해서 먹는 것도 또 하나의 선택일 뿐이다.
아파트에서 살까 개인 주택에서 살까도 선택이다. 내 나라에서 살까 이민을 가서 살까도 선택이다. 남자라면 육해공군과 해병대 중에서 선택하여 군에 입대할 수도 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갈 때에 비행기로 갈까 기차로 갈까 고속버스로 갈까 아니면 직접 운전해서 갈까 하는 것도 선택에 의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이 없이 수 많은 것들을 날마다 결정하며 살아가게 된다.
신명기의 거의 끝 부분인 신명기 30장에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선택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생명과 사망, 복과 화 중에서 생명을 택하고 복을 택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온전한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사망 대신에 생명을 화와 저주 대신에 복을 택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모세 시대의 출애굽한 후에 광야 생활을 이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상을 보면 꼭 그렇지는 못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화와 저주를 자초하고 재앙과 책망과 심판을 자초한 사건들이 끊임이 없었다.
우리는 최근에 창세기의 말씀 묵상을 새롭게 해 나가면서 노아 홍수 시대의 물 심판으로 죽어간 인류의 역사를 다시 보았다. 소돔과 고모라 성의 유황불 심판에 대하여 안다. 설마 하늘의 문이 열리고 사십주야로 비가 내리는 그런 물 심판의 날이 있으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하늘에서 내린 유황불로 소돔과 고모라 성이 역사에서 사라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신명기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동안 모세를 통해서 누누이 말씀하신 법도와 규례와 계명의 말씀들을 다시 반복해서 강조하신 내용을 담고 있다. 신명기 30장 1절에 보면 모세는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라고 말하였다. 운전자들이나 보행자들이 교통법규를 잘 지킬 때에 서로 안전한 일상이 가능한 것과 같은 원리이다. 음주 운전이나 졸음 운전은 자신만 불행해 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나 주변 사람에게 큰 상해를 입게 하거나 죽음에 이르게 하는 큰 불행을 불러올 수 있다.
신앙 생활이란 것이 그렇지 않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누가 사망이나 화나 저주를 택하겠는가. 당연히 생명과 복을 택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생명과 복을 택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구체적으로 생활 중에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나.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그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게 한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생명과 복을 택한 자의 신앙생활이란 어떠하여야 할까.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하나님이 가장 못 마땅하게 여기시고 금지하신 것이 우상 숭배이다. 우상 숭배란 하나님 대신에 피조물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말한다. 십계명의 제 일 계명이 무엇인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이다. 제 이는 “우상을 만들거나, 절하거나, 섬기지 말라”라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이 절대로 하나님만 섬기고 경배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길 원하신다.
본문인 신명기 30장 17-18절에 보면 “우상에게 절하고 섬기면....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라고 엄중하게 경고하셨다. 18절에 후반절에 보면 지금은 광야 생활 중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지 않으면 앞으로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라고 경고하셨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무엇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일까. 신명기 30장 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너와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셔서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라고 말씀하셨다. 마음에 할례를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99세 된 아브라함과 13살된 이스마엘과 집안의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셨다. 할례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겠다는 성별 의식이다. 몸에 남기는 증거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로 마음에 할례를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누이지 않는 마음이다. 그렇지 않나.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 마음과 뜻과 생각이 눈에 보이는 세상 물질 세계에 빼앗겨져 버리면 안된단 말이다. 이것이 쉽나. 어렵다. 쉽지 않다. 그렇지 않나. 우리는 모세 시대와 그 이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서 역사의 교훈을 깨닫게 된다. 오늘 날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등 따뜻하고 배 부르면 하나님 멀리하고 우상 숭배할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다.
우리가 밤낮 예배할 때마다 두 손을 높이 들고 “사랑합니다. 나의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그렇게 찬송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당의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이 세상의 수 많은 우상 숭배의 유혹 앞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니, 예배당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누가 나보다 좋은 차만 타도, 누가 나보다 좋은 옷만 입어도, 누구네 아들딸이 우리 아들 딸보다 더 나은 대학에만 들어가도 내 마음의 평화는 금이 가고 깨어지고 만다. 교회 안에서 조차 누구네 가정에 경사가 있고 좋은 일이 있으면 겉으로는 축한한다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부러워서 배가 아프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처럼 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산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간단한 명령이 아니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대단히 추상적이고 막연하다.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일까. 야고보서의 교훈에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4:8)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나. 하나님을 어쩌다 집안의 애경사에 잠깐 만나서 인사하고 헤어지는 먼 친척 대하듯 하면 되겠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매일 정오가 되면 큰 예배당의 본당에 들어가서 기도하는 짐(Jim)이란 이름을 가진 노인이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면 곧 예배당의 본당에서 나와서 돌아가고는 하였다. 하루는 예배당 관리인이 물었다. “어르신은 왜 날마다 정오에 예배당에 다녀갑니까”, “아, 네 기도하고 갑니다.”, “아니 그렇게 짧은 시간에 무슨 기도를 합니까.”, “아, 네, 저는 긴 기도를 잘 못합니다. 단지 ‘예수님 저 왔습니다. 짐(Jim) 말입니다.’하고 인사하고 갑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얼마 후에 그 노인이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런데 그 노인과 함께 지내는 병실의 모든 환자들에게 그 노인은 기쁨을 주었다. 간호사가 물었다.“주변에 기쁨을 주는 기별이 무엇인가요”, “나에게 날마다 찾아 오는 문병객 덕분이야”,“아니 어른을 찾아 오는 분이 거의 없으신데 누가 문병을 날마다 오신단 말입니까.”, “아, 나에게는 매일 정오가 되면 예수님이 찾아 오시지 ‘하이(Hi) 짐(Jim) 잘 있었나 나 예수야’그렇게 인사하고 기쁨을 한 아름 안겨 주고 가시지”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나는 늘 기쁜거야” 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믿는다면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분명한 일상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 다 같이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을 찬송하자.
이런 강 같은 평화와 바다 같은 사랑과 샘 솟는 기쁨과 반석 같은 믿음이 날마다 풍성한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주의 말씀을 청종하고 지키라.
하나님 안에서 생명과 복된 삶을 살아가는 증거 중의 또 하나는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잘 청종하고 지키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나. 법을 만들고 법을 집행하는 국회의원들이나 판검사들이 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다면 어떻게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겠는가. 학교에서 윤리와 도덕 과목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학교와 가정과 사회에서 윤리적이지 않고 도덕적이지 않게 살아간다면 누가 그를 존경하고 알아 주겠는가.
16절에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며 살아가면 “네가 생존하고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가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라고 약속해 주셨다.
15절과 19절에 보면,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이라고 하였다. “네 앞에 두었은즉”이 무엇인가. 사람은 앞에 있는 것들 중에서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 문화 중에는 돌잔치상에 이것 저것을 올려 놓고 ‘돌잡이’라는 순서를 갖는다. 옛날에는 붓, 책, 엽전, 쌀, 실타래 등을 얹었다. 붓이나 책을 잡으면 공부 잘해서 과거 급제 할려나, 엽전이나 쌀 잡으면 부자로 살려나, 실타래 잡으면 무병장수 하려나 하고 기뻐하고 축하하였다. 의미를 부여해서 좋은 것만 올려 놓았으니까 손이 닿는 것 중에서 붙잡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돌잡이 용품은 훨씬 다양하다. “청진기, 마우스, 회의 의사봉, 비행기, 축구공, 골프공, 마이크, 돈, 실, 연필, 칫솔” 등등을 올려 놓는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하여야 한다. 사람은 눈 앞에 보이는 것에 마음이 끌리고 당장 내 앞에 있는 것으로 인하여 마음이 흔들린다. 술 있으니 술 마시고 마약 있으니 마약에 손을 댄다. 그 작은 시작이 인생을 망치기도 한다. 그렇지 않나. 에덴 동산의 하와와 아담이 어떻게 하다가 마귀의 시험에 넘어 가고 말았나. 에덴 동산에 하나님이 안 계셨나. 에덴 동산에 생명 나무가 없었나. 하나님이 거니시는 동산 에덴, 생명 나무가 자라나는 아름다운 동산이 에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와와 아담은 뱀의 유혹에 넘어 가고 말았다.
사람은 가까이 하는 것과 가까이하는 사람에게서 영향을 받는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만나 본 적이 없는 아프리카 사람이나 남미 사람 때문에 시험에 빠지고 유혹에 넘어지나. 내 곁에 있는 사람, 내 가까이에 있는 물건으로 인해서 시험에 빠지고 유혹에 넘어지는 것이 아닌가.
여호수아 때의 아이 성 전투를 보라. 여리고 성 전투 승리의 사기로 충천했던 이스라엘은 군대 삼천명으로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싸움이 시작되자 마자 36명 쯤이 죽임 당하고 말았다. 순식간에 이스라엘 군대의 사기는 무너지고 말았다. 여호수아의 군대는 그 마음이 물처럼 녹았다. 순간 두려움에 휩싸였다. 여호수아를 통한 하나님의 전쟁 명령은 분명하였다. 그 어떤 소유물이라고 취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간은 달랐다.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와 금 덩어리 은 덩어리를 취하여 자기 짐 장막 땅 속에 숨겼다. 그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여호수아의 군대는 아간과 그의 아들 딸을 아골 골짜기로 끌고 가서 돌로 친 후에 불태워 흔적까지 없앴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청종하지 않은 역사적인 사건의 사례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 하나님을 따른다는 것,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과거나 오늘 날이나 마찬가지이다. 모세 때나 여호수아 때나 오늘 날이나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청종하지 않을 때에 모세의 광야 생활 중에서 하나님은 때로는 전염병으로, 때로는 땅이 갈라지는 지진으로, 때로는 전쟁으로 큰 위기와 시험을 겪게 하셨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표현 중의 하나일 수 있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자녀를 낳아 키울 때에 사랑하기 때문에 잔소리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책망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훈계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벌하는 것이 아닌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라고 하였다.
맞다. 하나님 안에서 생명과 복을 누리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지켜야 한다. 신명기 30장에 보면 1절부터 마지막 절인 20절 까지에 가장 반복되는 강조가 ‘청종하면’이라는 말씀이다. 2절, 8절, 9절, 20절에 보라. 청종하고 지켜 행하라는 강조가 반복된다. 그렇지 않나.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면 무슨 소용이 있나.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복된 것이 아닌가.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라. 판검사와 변호사들로 구성된 법조계는 물론이고 국회, 정부를 보라. 법을 공부하지 않은 이들이 누가 있나. 거의 대다수가 법을 전공하고 어려운 사법 시험에 합격한 이들이다. 그런 저들이 법을 잘 안 지킨다. 교묘하게 법을 가지고 진영 논리로 끌고 가서 여와 야가 힘 겨루기만 계속한다. 중간에서 어려움을 겪고 마음이 상하고 실망하는 것은 순진한 국민들 뿐이다. 마치도 1945년에 출간된 인도 출신 작가 조지 오엘의 <동물농장>처럼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
세상이나 신앙 공동체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면 타락하고 만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는 일과 후손과 육축과 토지의 소산에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신명기 30장 10절 끝에 보니까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라고 약속하셨다. 그 앞에 9절에 보니까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이라고 조건부의 약속을 하셨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의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15:10)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이나 가족 관계나 세상의 모든 사회 생활이 다 마찬가지 아닌가. 서로 지킬 것을 지킬 때에 서로가 복되고 서로가 행복하고 서로가 평안해지지 않나. 요한일서 2장 5절에도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라고 교훈하였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아는 것으로 위안을 삼지 말고 힘써 지켜 행하는 은혜와 간증의 주인공들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그를 의지하라.
하나님 안에서 생명과 복을 택한 자의 또 하나의 모습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다 의존적인 존재이다. 절대 사람은 자기 혼자서는 못 산다. 한자의 사람 인(人)자를 보라.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하고 있는 형상이다. 신명기 30장 20절의 ‘의지하라’는 <개역한글성경>에서는 ‘부종하라’라고 번역되어 있다. 원 단어인 ‘다바크’는 ‘연합하다. 밀착하여 달라 붙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남편과 아내가 부부가 되는 것을 뜻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열왕기하 18장 6절에서 히스기아 왕의 믿음을 칭찬한 할 때 쓴 단어가 바로 이 단어‘다바크’이다.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라는 말씀이다.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포도나무 가지인 인생이 포도나무 줄기인 예수께 꼭 붙어 있는 신앙을 교훈하셨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 줄기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셨다. 맞다. 주님을 의지하는 것은 주님께 붙어서 사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계속해서 “주 안에, 주 예수 안에,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라고 강조하지 않나. 536장 <죄 짐에 눌린 사람은>의 1절 가사와 후렴을 보라.
“죄 짐에 눌린 사람은 다 주께 나오라
주 말씀 의지할 때에 곧 평안 얻으리
의지하세 의지하세 주 의지하세
구하시네 구하시네 곧 구하시네”
주님을 의지하되 주께 연합하여 주님과 하나가 되고 주 안에서 떠나가지 않는 은혜와 말씀과 순종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