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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요셉(창47:27-31)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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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1-05-08 00:00 조회 18,667 댓글 0
 
우리나라의 어느 역대 대통령을 지낸 이들 중에서 그의 아들들이나 자손의 대에 가서 다시 대통령이 되는 이가 탄생한다면 역사적인 의미평가가 많이 달라질 것이다. 미국의 경우에는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 부자간에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이어 대통령을 지낸 경우가 단 두 번 있었다. 그 첫 가문에 미국의 제 2대 대통령을 지낸 존 애덤스(John Adams, 재위 1797~1801)이고 그의 아들인 존 퀸시 애덤스(John Quincy Adams, 재위 1825~1829)가 나중에 제 6대 대통령을 지내는 신기원을 이루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조지 부시(George Bush, 재위 1989~1992)대통령과 그의 아들 조지 W. 부시(George Walker Bush, 1946-)대통령이 미국의 역사상 부자간에 대통령을 지내는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사실 성경 역대기의 남북 왕조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대 임금에 관한 기록에 보면 임금이 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이 역사의 평가요 하나님의 평가가 아닌가 싶다. 성경은 적지 않은 임금들에 관한 기록을 두서너 줄로 압축해서 기록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였더라.”하는 정도의 단 문장으로 평가하고 마는 경우가 적지 않다. 

<미국대통령가의 가훈>이란 책에 보면 역대 대통령의 가정 이야기, 가문과 가훈에 관한 주옥같은 글들로 가득하다. 미화한 내용이 아니라면 참으로 교훈적이고 결과론적인 내용들이 적지 않다. 그 중에 한 사람인 미국의 제 6대 대통령인 존 퀸시 애덤스에 관한 내용은 이렇다. 그의 아버지인 제 2대 대통령 존 애덤스와 그는 부자간에 지금의 하버드의 전신인 하버드 칼리지를 졸업한 수재였다. 1788년에 대학을 졸업한 그는 스무 살에 외교관이 되었다. 일찍이 유럽 생활을 무대로 외교관 생활을 하게 된 그는 유럽에 관한 정세에 밝았다. 제 5대 대통령이었던 제임스 먼로는 그를 국무 장관에 임명하였다.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 공부한 ‘먼로 선언’이란 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한 장본인이기도 하였다.  영국과 계속되던 분쟁을 해결해 나갔고 스페인으로부터 지금 미국 남부의 주요한 지역인 플로리다를 되찾은 장본인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미 대통령이기 이전에 한 나라의 국무장관으로서 역사적인 업적들을 성취한 지도자로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그의 아버지 대통령은 장남인 존 퀸시 애덤스에게  청교도적인 도덕규범을 강조하고는 했다.

“아들아 너의 인생 목표가 도덕에 어긋나서는 안 된다. 
도덕적인 삶이야말로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옳은 일을 위해서라면 위험한 일이라도 뛰어들어라, 매사에 생각하고 행동하여라, 정직을 기반으로 행복을 만들어 가라. 독립심을 키워가라. 그래야 점점 발전할 수 있는 법이다.”

이런 생활 철학을 강조하고 또 강조해 나갔다. 무슨 말인가. 지도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고 준비되는 것이다. 효자도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효자 인생 효녀 인생으로 점점 다듬어져 가는 것이다.

무엇이 효라고 생각하는가. 성경은 부모에게 공경하고 순종하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게 된다고 가르쳐 준다.(엡6:1-3)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부모에게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인가 말이다. 

창세기의 4분의 1 분량에 가까운 내용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의 일대기를 담고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는 야곱의 열두 아들들 가운데 열 한 번 째 아들로 태어난 요셉에 관한 이야기로 집중된다. 요셉이 누구인가.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라헬이란 부인을 통해서 뒤 늦게 얻은 아들이요 끔찍이 총애하던 아들이었다.야곱에게는 요셉이란 이름의 열 한 번 째 아들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세 부인을 통해서 열 명의 아들들이 장성해 가고 있었다. 그러한 야곱의 가정에 요셉이 태어나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가정사의 모든 이야기는 거의가 다 요셉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물론 배다른 열 명의 형제들에 관한 사연이 없는 것은 아니었겠으나 성경은 오직 요셉에 관한 이야기만을 주로 기록해 주고 있다. 요셉은 야곱의 가정사에 없어서는 안 되는 주인공과 같은 인물이 되어 가고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창세기의 모든 내용은 가정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도 결국은 그 모든 창조의 마지막 날인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 아담을 통해서 그 돕는 아내인 배필 하와까지를 창조해 주시므로 부부 즉 가정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으로 천지창조의 웅장한 이야기가 마무리 된다. 해와 달과 그 많은 별들을 비롯한 우주의 한 가운데 있는 이 땅의 온갖 창조와 더불어 그 모든 것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권세가 인간에게 주어졌고 가족 즉 아담과 하와인 부부에게 주어졌다. 거기서 출발해서 자손이 번성하고 가정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창세기 11장까지의 모든 내용들도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들이 만나서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아들딸을 낳아서 번성해 가던 인간 문명의 변천사에 관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그 중에 하나님이 불러내신 한 사람 아브람과 그의 아내 사라를 중심으로 한 선택 받은 가정사의 이야기가 창세기의 주류를 이룬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요셉은 아브라함의 4대 손인 증손자이다. 요셉은 야곱이 낳은 열두 명의 아들들 가운데서 아버지 야곱에게 가장 효도한 아들 중의 대표적인 아들이 되었다. 자 그러면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무엇이 효인가 하는 교훈을 묵상해 보도록 하자.

가족에 대한 선한 영향력을 키워가라.
야곱의 가정사는 파란만장했다. 아버지 야곱은 아들 요셉이 죽은 줄로 알고 지내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세월은 흘러갔고 애굽에 열 명의 형들에 의해 팔리어 갔던 요셉은 13년 후에 총리대신이 되었다. 그 후로 칠년의 대풍과 이어지는 칠년의 전국적인 애굽의 흉년 동안에 온 나라를 경제적으로 잘 치리하는 지혜롭고 역량이 뛰어난 총리로 임금 바로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요셉의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이 살아가던 가나안 땅에도 가뭄이 극심하여 먹고 살기가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곡물은커녕 양과 염소를 비롯한 짐승들에게 뜯기 풀 한 포기조차 구할 수 없는 한발이 계속되었다.

이때에 식량을 얻기 위하여 애굽에 내려갔던 야곱과 그의 아들들을 비롯한 칠십 여명의 가족들을 다시 만난 요셉의 감격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결국 저들 요셉의 가족이 오갈 데 없이 곤궁한 지경이 되었을 때에 저들을 다시 살아갈만한 여건으로 인도한 것은 과거에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팔려 갔던 어린 요셉이었다. 요셉은 진정한 효자 인생이 된 것이다. 소와 양과 염소 떼게 번성하고 집안이 잘 돌아 갈 때에 아버지의 재산 분가 받아 장가들고 짐승 목축하며 잘 먹고 잘 살아가던 요셉의 열 명의 형들이었지만 계속되는 가뭄과 한발 앞에서는 속수부책이었다. 그런 저들 온 집안이 애굽에까지 먹을거리를 구하려고 내려갔다가 거기서 요셉을 만난 것이다. 요셉은 이십년도 훨씬 지난 긴 세월 후에 만난 아버지 야곱과 친 동생 베냐민을 만난 감격과 기쁨 가운데 목을 어긋 맞춰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창46:29) 

마땅히 할 일이 없는 요셉의 형들이 대대로 이어 온 전문직업인 목축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은 요셉이었다. 요셉은 기울어져 가던 가업을 다시 일으켜 발전해 나가도록 배려한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다. 창세기 46장 34절에 보면 애굽 사람들이 가증하게 여기는 직업이 목축업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요셉의 형제들은 목축업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목축 전문가들이었다. 애굽의 라암셋 지역의 고센 땅은 초원이 끝없이 펼쳐진 초원지역으로 목축업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인 지역이었다. 요셉과 임금 바로의 배려로 고센 땅에 정착하게 된 연세 130살의 아버지 야곱과 요셉의 형제들과 조카 칠십여 명은 그 곳에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해 나갔다.(창47:27) 이것이 효도다 살아계신 부모님께 잘 해 드리는 것도 효도이지만 이 땅을 살아가면서 형제자매들인 혈육들이 생육하고 번성해 나갈 수 있도록 도울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욱 좋은 효가 어디에 있겠는가.

살아가면서 형제자매간에 경제적으로 기웃거리고 손 벌리고 기대 살려고만 하고 뭐든 얻어 내어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처럼 넉넉한 권력과 능력과 힘을 가지고 부모형제 일가친척 조카들까지 생업을 마련하도록 배려 해 주는 것뿐만 아니라 저들 온 가족들이 생육하고 번성해 나가는 기반을 제공한 집안이 부흥의 불을 지펴 준 장본인이 된 것이다.

노년기를 복되게 봉양(奉養)하라.
우리가 어려서는 부모님이 우리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키워 주셨다. 세월이 지나고 부모님이 늙고 병이 드시면 아들딸과 사위와 며느리는 연세 들어가시는 부모님의 손과 발이 되어 드려야만 한다. 요셉은 비록 나이 17살에 서로 배가 다른 열 명의 형들이 작당한 음모에 의해서 애굽의 노예 시장에 팔려 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 거기서 성공하였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요셉은 어디를 가든지 형통한 자가 되었다. 그런 아들 요셉이 죽은 줄로 만 알고 지내던 노년기의 야곱은 연세 130살 때에 기적적으로 아들 요셉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고센 땅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출세한 아들 요셉의 덕을 톡톡히 누리며 복된 노년기를 17년간 더 살다가 147살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그런 야곱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 오자 출세한 아들 총리 요셉을 고센 땅으로 불러서 유언을 남기게 되었다. 그 첫 말이 이것이다.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창47:29)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식으로서 부모의 은혜를 입는 것도 크지만 잘 된 자식으로 인해서 입는 부모로서의 은혜도 적은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향해서 이런 말을 남길 만한 정도로만 살수 있다면 얼마나 멋있는 생이겠는가. 

아버지 야곱은 출세한 아들 요셉을 대할 때마다 일찍이 요셉의 동생 베냐민을 베들레헴 길가에 낳아 놓고 눈을 감은 아내 라헬을 얼마나 많이 생각하며 살아갔겠는가. 요셉의 입장에서 보면 엄마 일찍이 돌아가시고 핏덩어리 동생 베냐민이 어릴 때에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팔려 간 후로 아버지의 20여년 노년기의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생사의 소식조차 모른 채 노예의 신세로 지내던 보디발의 집과 억울한 감옥살이의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그런 불행한 운명의 주인공이었던 아들 요셉이 나중에는 아버지 야곱에게 있어서 최고로 효도하는 아들이요 형제들과 집안 모든 식구들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삶의 구체적인 가장이요 모든 생활의 넉넉한 공급자가 되어 있었다. 창세기 47장 11절과 12절을 보라.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비롯하여 그 많은 모든 가족들을 봉양한 가족 생계의 봉양자가 되었다. 17살 나이에 벌거벗겨진 채 애굽의 노예 시장에 팔려 갔던 소년 요셉이 20년 세월 후에 온 가족 칠십여 명을 먹여 살리는 가족 모두의 생활 필요의 공급자요 봉양자로 변신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아버지 야곱은 자신의 임박한 죽음과 그 이후의 장례 절차와 매장에 관하여 다른 아들들을 제쳐 놓고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에게 유언하였다.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들의 묘지에 장사하라.”(창47:30)

창세기 49장에 보면 아버지 야곱은 열두 아들들과 요셉의 두 아들들인 손자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차례대로 축복하는 유언의 기도를 마치고 임종하였다. 야곱의 나이 147살 때의 일이다.
아들 요셉은 앞장서서 정중한 예절로 아버지 야곱의 장례를 진행하였다. 야곱의 시신에 향을 처리 하는데 만도 40일이 걸렸다. 70일 동안 곡하는 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요셉이 앞장선 아버지 야곱의 장례는 국장급의 장엄한 장례였다. 바로 임금의 허락을 받은 장례의 행렬은 바로의 모든 신하가 나서고 왕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 전역의 원로들과 요셉의 온 집안 식구들과 그 형제들이 다 참여하여 애굽에서 선조들의 땅인 가나안의 막벨라 굴에 고조부 아브라함이 마련한 가족의 묘실에까지 정중하게 모셔졌다. 그 긴긴 장례 행렬에는 국가적으로 제공된 병가와 기병들이 떼를 이루러 줄을 지어 섰고 장엄하게 진행되었다. 요단강을 건너자 아닷의 타작마당에 이르러 다시 7일 동안을 그 곳에 머물면서 크게 울고 애통하며 애곡하며 장례의 절차가 점점 더 정중하게 진행되었다.

사람은 태어 날 때의 축복도 귀하지만 세상을 떠난 후의 장례가 그의 인물됨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닌가. 야곱의 죽음 앞에는 시대적으로 준비된 아들 요셉이 있었다. 그 잘난 아들 요셉으로 인하여 아버지 야곱의 노년기는 빛이 났다. 아버지 어머니 앞에서 이런 아들딸로 살아가자. 이런 나중을 위하여 지금의 나를 갈고 닦자.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가족을 흥왕하게 하고 부모님이 조상들의 묘실에 눕히는 순간까지 정중한 예절로 효도를 다하는 넉넉한 마음의 소유자로 살아가자.


복음서에 보면 아들 예수님이 그런 효자이셨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언제나 어머니 마리아에게 있어서 자랑스러운 아들이요 사랑스러운 아들이요 역사적인 아들이었다. 어머니 앞에서 아들 예수님이 앞서 죽어 가는 것이 불효 같으나 아들 예수님은 십자가의 마지막 순간까지 어머니의 남은여생을 부탁하며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하고 제자 요한을 통한 보살핌은 분부하셨다. 그 후에 요한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하고 부탁하셨다.(요19:26-27)
기독교를 잘 모르고 폄하하는 사람들은 기독교는 불효의 종교라고 말한다. 그래서는 고작 구교에서는 제사를 허용하는데 개신교는 왜 제사조차 없느냐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와 성경의 근본 내용을 잘 모르고 하는 비판일 뿐이다. 기독교처럼 효를 강조하고 부모 공경을 비중 있게 다루는 종교도 별로 없을 것이다.  십계명 중에 인간에 관한 제 일 계명이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고 했다.

하나님께 경배(敬拜) 하는 신앙을 이어가라.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행한 아버지 야곱의 모습은 하나님을 경배한 것이다. 이 얼만 엄숙하고 은혜로운 모습인가. 가정마다 가장 큰 자녀 교육과 부모 공경의 근본은 이처럼 하나님께 경배하는 신앙을 전수해 나가는 것이어야 한다. 세상적으로 아무리 번영하고 잘 먹고 잘 입고 잘 산다하여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이 신앙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헛것이다. 아무리 세상적으로 출세하고 성공하고 높은 지위를 얻고 재물과 학식과 명성을 얻었다고 할지라고 하나님을 향하여 진심으로 경배하는 믿음이 없다면 그 모든 것이 헛것이다.

제사장 엘리가 그러하고 임금 사울과 다윗이 그러하였다. 사사 시대 말기의 제사장이었던 엘리는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에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믿음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못한 대표적인 제사장으로 꼽힌다. 자기 자신은 시대적인 제사장이었지만 아들들 교육에는 실패하였다. 결국은 그 두 아들들이 아버지 엘리에게는 피 눈물이 나는 고통이요 슬픔이 되고 말았다. 엘리의 두 아들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는 아들들이었다.(삼상2:17) 저들은 제사용 고기를 제사 전에 마구 갈고리로 찍어다 먹어 댔다. 성막에서 시중 든 여인들과 동침하고도 죄책감이 없었다. 늙은 아버지 제사장 엘리의 책망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결국 하나님은 불량자로 자라난 두 아들들을 죽이기로 결심하셨다.(삼상2:22-26) 블레셋과의 전쟁에 법궤가 전쟁의 일선에 까지 메어져 나갔고 이스라엘의 군대 30,000명이 죽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그 전쟁에 죽고 말았다. 하나님을 제대로 경외할 줄 모르는 가정과 가문과 가족의 번성이나 창성함을 부러워 할 것 하나도 없다. 그 나중 불행은 더욱 비참한 불행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신앙을 전해 주는 것이 효도 받는 출발점이다. 내가 하나님을 잘 경외하며 살아야 자녀들도 후손 대대로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것이 진정한 효도요 부모 공경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신앙에서 병들어 갔던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사울의 가정사는 사무엘 15장에서부터 기울어가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임금이라도 부러워 할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신앙이 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하셨지만 사울은 그런 시대적인 변화를 읽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겸손이 떠나간 임금 사울은 하나님 앞에서 경거망동했고 결국은 피할 수 없는 화를 자초하고 말았다.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그에게 이르되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 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 한지라.”(삼상20:30-31)

이것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인간적인 욕망에 붙들려 하나님을 경배하는 신앙을 버리고 왕권이 아들 요나단에게 이어져 가기만을 급급했던 사울 임금의 잘못된 아들 사랑이야기요 가문이 무너져 가는 시작이었다.

지금 잘되어 가고 있다고 자랑할 것 하나도 없다. 무엇이 진정한 효도요 부모 공경인가. 시대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그 뜻을 실행하며 하나님 잘 경배하며 살아 갈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소망이 있는 것이다. 그래야 가정이 살고 가문이 살고 부모에게 진정한 효도가 되고 부모 공경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부모를 잘 경외하는 길의 첫 시작은 하나님을 잘 경배하는 길이다.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위기 19:3)

여기서 출발해서 하나님을 잘 경배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행복한 가정이요 부모가 기뻐할 만한 복된 가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더 묵상하자. 에베소서 6장 1절에서 3절까지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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