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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3:1-4)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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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1-04-02 23:50 조회 21,789 댓글 0
 
아삽의 시로 알려져 있는 시편 77편 12절을 우리가 이전에 보던 개역한글 성경으로 보면, “또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이다.”라는 말씀이 나온다. 오늘 본문에도 그런 표현이 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깊이 생각한다는 말은 어떤 일이나 사람에게 대하여 몰두하고 마음을 고정하여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언제 이런 경험을 하게 되는가. 젊은이들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이런 현상이 생긴다. 이런 경험이 없이 무덤덤하게 만나서 평생을 그렇게 살다가 마는 사람들이 있다면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사람이 무엇을 골똘하게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연구의 업적도 생기고 발명도 가능하고 기적도 일어나는 것이다. 잔 뉴톤의 만유인력의 법칙은 언제 발견되었는가. 역사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과나무에서 사과 열매가 땅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관찰로부터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고 깨닫게 된 것은 생각이 남들과 다르고 관찰이 남들과 달랐기 때문이 아닌가.

파리의 로뎅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로뎅(Auguste Rodin, 1840-1917)의 거대한 조형물인 ‘지옥의 문’의 상단 중앙에 만들어져서 유명하고 그 부분만 따로 더욱 크게 작품화해서 유명한 것이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작품이다. 나는 사무실 책꽂이 스탠드로 이동할 수 있는 이것 쌍둥이가 있다. 여러해 전에 아내로부터 생일 선물로 요구해서 받은 선물이다. 왼쪽 팔뚝을 무릎 위에 얹고 바위 위에 걸터앉아서 오른 손등으로 턱을 괴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 말이다. 원래는 ‘시인’이란 제목의 작품이었으나 나중에 ‘생각하는 사람’으로 바꾸었다. 단테의 ‘신곡’을 근거로 해서 지옥의 문이란 작품을 만들 때에 인간의 고뇌에 찬 다양한 모습들을 지옥의 문 저 꼭대기에서 내려다보고 깊은 생각에 잠긴 남자의 모습을 형상화 한 작품이다.

스스로 물어 보자. 요즘 나는 무슨 생각 혹은 누구 생각을 깊이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히브리서에는 ‘생각하라’는 말씀이 두 번 나온다. 오늘 본문 말고 히브리서 12장 3절에 보면 끝 부분에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죄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하여 거역한 일을 끝까지 참으신 그분을 생각하라고 했다. 그렇다. 사순절인 그 어느 때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훨씬 더 깊이 생각하며 살아가야 할 때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어떤 면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라고 하였는가.


함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성도답게 예수를 생각하라.
성도된 우리들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자매들이다. 이 본문을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형제라고 하지 않고 성도라고 번역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형제자매들이 성도들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묵상해야 하는 것이 ‘함께’라는 말씀이다. 헬라어로 메토코이(metokoi)란 말인데 이 표현은 히브리서에서만 유일하게 사용하는 독특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단어를 히브리서 1장 9절에서는 ‘동류’라고 했다. 히브리서 6장 4절에서는 ‘참여한바’라고 했다. 이처럼 함께 한다는 것은 친구나 동반자로서 어떤 일에 동참하고 그 삶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성도인 우리들은 함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거룩한 자들이다. 여기서 말씀하는 ‘거룩한 형제’들이란 표현 또한 매우 소중한 묵상 자료이다. 왜냐면 이 같은 표현은 사도 바울의 서신들을 비롯한 다른 성경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또한 유일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형제들아, 사랑하는 자들아”(고전 15:58, 고후 7:1)라고 했다.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는 야고보서에서 “내 형제들아”(약1:2, 2:1, 3;1, 5:12)라고 했다. 히브리서만이 유일하게 성도들을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렇다. 우리 성도들은 거룩함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들은 거룩한 삶을 주 안에서 살아가고자 씨름해야 한다. 비록 세상 중에 나가서 산업의 전선에서, 직장의 구석구석에서 혹은 사업하랴 장사하랴 공부하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전쟁터와 같은 세상 중에서 살아갈 지라도 늘 자신의 마음 깊은 곳의 고백은 "나는 모든 형제자매들과 함께 거룩한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그런 의식 말이다.

시인 도종환 님의 시 중에 ‘담쟁이’라는 시가 있다. 지난 2009년 직장인 100만명을 설문 조사하여 ‘내 인생의 시 한 편’에 최고 인기를 얻은 시이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이런 삶의 태도야말로 우리들 모두를 향하여 함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성도의 삶을 향한 초청이 아닐까.

시인 도종환은 결혼 2년 만에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1989년도에 교사직에서 해직되고 말았다. 10년 만에 교사직에 복직되었지만 ‘자율신경실조증’이란 희귀병으로 다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단에서 떠나가야만 했다. 5년 동안 산 속에서 지내며 건강을 조금 추스른 후에 다시 주어진 일자리가 ‘한국작가협회’ 사무총장이란 자리였다. 그는 지난 해 가을에 어느 강연회에 초청을 받은 자리에서 2시간 가까이 특강을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뱀도 같은 종류의 뱀끼리 싸울 때에는 독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 날 인간은 동족 간에 싸우고 같은 길 가면서도 싸우고 같은 신앙 안에서도 싸우는 모습은 마치도 인간이 짐승만도 못한 타락한 모습이요 범죄한 아담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성도로 부르시고 형제자매로 부르신 것은 거룩한 삶을 살아가라는 초청이다. 그러나 어디 우리들의 삶에 당연히 쉽게 거룩한 삶이 가능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잠시잠간만이라고 하루 한 순간만이라도 거룩함을 향한 신앙적 씨름을 하지 아니하면 언제 사탄이 와서 우리를 칠지 모른다. 히브리서 11장의 그 많은 신앙의 선진들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오직 거룩한 삶을 향한 부르심이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서 출발해서 요셉, 모세, 기생 라합에 이르기 까지 누구나 다 마찬가지다. 성도된 우리들에게 있어서 거룩한 삶을 향한 부르심과 부담을 벗어 버린다면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오히려 거룩함을 가장하여 더욱 추하고 더욱 이중적이고 더욱 타락하고 말 것이다.

<제자도의 7가지 핵심>(To Follow Him The Seven Marks Of A Disciple)에 보면 저자인 마크 베일리(Mark L. Bailey)는 여섯 번째 제자도의 원리에서 이런 예화를 인용한다. 독일제 고급 승용차이고 그 모양과 성능이 다양해서 자동차 애호가들과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대단한 포르쉐 자동차를 너무 좋아하는 청년이 있었다. 매일 신문을 보면서 자동차 판매 광고를 눈 여겨 보는 것이 취미였다. 그러나 그런 좋은 차를 살만한 경제력은 없었다. 그런 어느 날 최신형 포르쉐 자동차를 단돈 500불에 판매한다는 광고가 눈에 띄었다. 믿어지질 않았다. 아마도 가격 인쇄가 잘못 된 것일 거라고 생각하며  전화를 걸어 보았다. 전화를 받은 젊은 여성은 그 가격이 맞는다고 했다. 꿈처럼 포르쉐 자동차를 사서 미끄러지듯 부드러운 엔진 소리에 매료되어 미끄러지듯이 자기 집으로 운전을 하고 돌아 왔다. 도저히 믿어지질 않아서 일주일 후에 그 부인에게 전화를 다시 걸었다. 왜 그렇게 싸게 팔았는지 사연을 물었다. 상대방 여성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전화기 저편에서 사연이 전해져 왔다. “3주 전에 제 남편은 자기의 어린 여비서와 함께 버뮤다로 도망을 가 버렸답니다. 그리고 내게 전해 오기를 그 포르쉐 자동차가 자기 소유로 되어 있으니 팔아서 그 판값을 통장으로 보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요구대로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서 그 자동차를 판매하게 된 것입니다.” 마크 베일리 목사는 이런 내용을 여러 해 전에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읽었던 실화라고 소개하고 있다.

함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성도들이라면 가정과 학교와 직장과 사업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달라야 한다. 달라져 가야만 한다. 시간, 젊음, 힘, 건강, 재물, 직장, 사업, 명예, 권력, 지식, 재주, 역량, 능력 그 모든 것들 앞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성도다운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야만 한다. 그래야 하늘의 부르심 즉 하나님 아버지의 나를 향하신 부르심 앞에 거룩하게 응답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使徒)이시며 대제사장(大祭司長)이신 예수를 생각하라.
예수님을 우리가 믿는 신앙생활의 사도이시라고 표현한 것 또한 잘 묵상해 볼 만하다. 사도란 보내심을 받은 자란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사용된 경우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이 땅에 보냄을 받은 자로서 사도와 동일시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 보면,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고 했다. 여기에 보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렇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시다. 무엇을 위해서 보내셨는가. 우리가 알고 믿는 신앙의 고백 그대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단번 제사에 의하여 죄 사함과 영생의 길을 활짝 열어 놓으신 대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시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은 우리의 주님이신 것이다. 히브리서 2장 17절이 그런 사실을 이미 언급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信實)하셔서 영광 받으실 만하신 예수를 생각하라.
오늘 말씀 본문인 히브리서 3장 2절 이하의 말씀은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하여 말씀하고 있다. 4절까지 보았지만 5절과 6절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신실하였다.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모세 시대에 모세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의 집과 같은 광야의 히브리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신실하였던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주적인 교회를 통한 우주적인 성도의 구원을 위해서 신실하게 충성하신 것과를 비교하고 있다.  모세도 존귀하고 예수 그리스도도 존귀하나 모세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비교할 것이 못된다. 3절과 4절은 마치도 집과 집을 지은 자로 모세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비교하고 있다. 아무리 집이 잘 지어졌다 하여도 그 집을 지은 자가 더욱 더 존귀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히브리서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드높이는 곳도 별로 없을 것이다. 히브리서 곳곳마다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높여 드리고 영광스럽게 하는 말씀들이다. 모세의 때에 하나님을 섬기고 제사하는 성막이 그림자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성막 그 자체이시다. 그 성막의 본체이시다. 이 땅의 성막이 그림자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 성막의 하늘 본체이시다. 히브리서 8장에 나오는 말씀이다. 히브리서 8장 6절에 보면,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고 했다. 여기서 말씀하는 비교급의 교훈을 잘 깨달아야 히브리서가 보이기 시작하고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더 아름다운 직분, 더 좋은 약속, 더 좋은 언약’ 이런 말씀 말이다.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 3장 3절도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와 비교하면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 그 자체가 은혜인 것이다. 생각하는 그 것이 곧 그 사람 자신이기 때문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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