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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하나님께서 하신 일(II)(사9:1-7) 0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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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1-01-22 23:45 조회 19,734 댓글 0
 
이제 성탄절이 지난 지 겨우 한 달 정도 되었다. 성탄은 크리스마스트리와 징글벨 찬양과 선물을 주고받는 것으로 한 해 연말의 추억과 함께 사라지는 그런 절기가 아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이 정확하게 언제이냐는 의혹은 여전하다. 그러나 봄이냐 가을이냐 여름이냐 가을이냐 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오늘 날 나의 삶에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교회력으로는 성탄절의 기쁜 절기를 12일간 계속하고 곧 이어지는 절기가 주현절(主顯節)이다.  영어로 Epiphany라고 하는데 ‘주님이 나타난 날’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교회사적으로는 두 가지 경우를 주장한다. 그 하나는 동방의 박사들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방문한 날을 일컫는다. 또 다른 하나는 30살이 된 나사렛의 예수께서 요단강에 나아가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날을 그 기원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구주로 태어나신 그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날을 기념하는 것이다. 천주교에서는 주님 공현 대축일이라고 하고 성공회에서는 공현절이라고 한다. 올해는 1월 둘째 주일인 1월 9일이 주현절 첫 주일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믿는 모든 신자들의 믿음의 주체이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악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고 죄 사함과 영생의 길을 열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의 본문인 이사야서 9장 말씀을 다시금 묵상해 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시대적으로는 이사야 7장과 8장에서 예언한 바대로 남 유다가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는 선언 앞에 전쟁의 공포와 심판의 두려움 가운데 휩싸여 있었다. 북 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의 침공 두려움에 휩싸여 있던 당시에 오늘 본문인 9장은 남은 자들을 통해서 장차 이루실 메시아 왕국에 대하여 선언하시는 말씀이다.

히브리 원 성경에는 있으나 한글 번역 성경에서는 빼어 놓은 것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표현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심판하시겠다는 경고와 멸망시켜 버리시겠다는 진노의 칼 앞에서 전혀 다른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남은 자들에게 해 주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우리는 대개 오늘 이사야 9장의 6절과 7절의 말씀을 잘 기억한다. 메시아 예언에 관한 구체적인 본문 중의 유명한 본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 어깨에 정사를 메었고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으로 오신 주님이시다. 그의 다스림과 평강은 영원한 것이고 영원히 정의와 공의를 보존하실 왕이시다. 이 약속은 하나님의 열심히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 하셨고 오늘 날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열심으로 이루어 가시는 구원의 과정을 보게 된다.

자, 그러면 우리가 알고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에스라 서에서 묵상했던 ‘하나님께서 하신 일’의 제목에 이어서 오늘도 같은 제목으로 본문을 묵상하는 중에 하나님은 누구시며 남은 자들을 위해서 어떤 일을 이루시는 가를 생각하는 중에 말씀의 격려와 위로와 소망과 축복이 함께 하기를 바란다.

영화(榮華)롭게 하시는 하나님.
당시나 오늘 날이나 인생들과 땅이 모두 다 고통을 당하고 있고 신음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가 역사상 유례없는 큰 재난을 겪는 구제역이라는 소와 돼지에게 전염되는 염병과 닭과 오리와 같은 가금류에 전염되는 조류인프루엔자(AI)의 위협을 보라. 순식간에 땅이 폐허가 되고 짐승 떼가 폐허가 되지 않는가. 아담 이후로 죄악 속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죄인 된 인생이지만 우리가 몸 담고 살아가는 이 땅이 복을 받고 치유를 받고 회복을 받는 땅이 되려면 인간의 노력과 지혜와 수고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용서와 은총이 임해야 한다. 하나님의 그런 예언의 말씀을 해 주고 계시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 흑암이 없게 하시고 전에 멸시를 받던 땅을 영화롭게 하셨다는 선언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총이요 축복인가.

나라마다 가정마다 개인마다 그런 아픈 역사가 있다. 우리나라의 근대사로 하면 일제의 식민지가 그러하였고 6.25의 전쟁의 상흔이 그러하였다. 일본에 끌리어  갔던 정신대 할머니들의 슬프고 처절한 아픔의 이야기가 여전히 남아 있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6.25 전쟁의 아픔은 아직도 분단국가의 불안정 속에 또 새해를 맞았다. 일본 같은 나라는 제 2차 대전 중의 핵 공격을 받은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그러한 고통과 흑암의 두려움이 아직도 남아 있다.

영화로도 잘 알려진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의 현장에 방문해 본 적이 있다. 1975년에 캄보디아의 독립 운동 세력의 선봉에 섰던 폴 포트(Pol Pot, 다른 이름은 살로트 사, Saloth Sar)란 자가 앞장  서서 크메르 루즈라는 무장 단체를 결성하고 3년 7개월 동안에 당시 700만 명이었던 캄보디아 전체 인구의 1/3인 200만 명을 학살한 전대미문의 엄청난 대 학살극이 벌어졌다. 폴 포트는 프놈펜 기술학교 1학년 중퇴 경력을 가진 자였다. 가진 자와 배운 자와 쓸 만한 인생들은 모두 다 잡아 죽이려 한 참극이었다. 도시 사람들을 강제로 농촌으로 이주시켰다. 산업 시설은 모두 다 불태우고 파괴하였다. 기업인, 유학생, 부유층, 정부 관리들은 닥치는 대로 모두 다 죽여 버렸다. 믿어지지 않는 끔찍한 일이 실제의 사건으로 한 나라를 멸망의 땅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런 참담했던 고통과 비운의 땅에 선교라는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안고 들어가서 40년 전의 저들의 아픔을 싸매면서 조심스럽게 킬링필드(Killing Field)를 힐링 필드(Healling Field)로 섬겨가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배후에는 고통과 멸망의 땅을 치유해 가시며 영화롭게 회복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으시다. 하나님은 치유와 회복을 원하시는 분이시다. 과거에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가 모두 하나님의 심판으로 바벨론과 앗수르의 지배를 받는 고통과 억압의 날들을 지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심은 선택받은 백성들이 버려지고 고통당하시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언제라도 선택 받은 자녀들이 회개하고 뉘우쳐 돌아 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신다.

사람들은 겉보기에 화려하고 번성하는 것을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지 않는 모든 것들은 고통을 자초하는 길이며 흑암의 길로 가는 첩경이 되고 만다. 건강과 재물과 출세와 명예와 권력을 생의 목적으로 삼으며 필경 그 모든 것 하나하나가 찌르는 가시가 되고 말 것이다.

윌리엄 포스트(William Post)라는 사람은 펜실베니아주 복권에서 당첨되어 1,600만불을 벌었는데, 오히려 이 돈이 불행의 시작이 되었다고 한다. 헤어진 여자 친구가 나타나 복권에서 나오는 돈을 나눠야 한다는 고소를 하는 바람에 돈을 뜯기고, 그의 동생은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해 형을 죽이고 돈을 차지하려 했다. 일가친척들이 돈을 나눠달라고 괴롭히는 바람에 일 년 만에 그 많던 돈이 다 날아갔다. 오히려 빚을 지고 파산선고를 한 후 정부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푸드 스탬프에 의지하며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빌 하렐(Billy Harrel)이라는 사람은 오순절 계통 교회의 목사였는데, 3,100만불의 복권에 당첨되는 바람에 부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사며 좋아 했는데 주변에서 도와달라는 사람이 몰려들어 스트레스를 받고 살다가 이혼을 한 후 자살로 인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우리는 이런 예를 성경과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찾아보게 된다. 에덴의 하와가 그랬고 그의 남편인 첫 인간 아담도 그랬다. 과욕하면 무너지고 만다. 욕심이 지나치면 개인이든, 가정이든, 나라이든 흔들리고 만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잘 되는 것이 중요하다. 돈이든 건강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다 마찬가지다. 선용 할 줄 모르면 초라해 지고 흑암에 빠져 들어 가 멸망하고 만다.

우리가 사는 동네에 평범한 식당이 하나 있다. 대학생들 상대라 값도 싸고 서민적인 식당이다. 그 주인은 25년 전에 대학생들을 상대로 하숙집을 운영하면서 그 동네에 살기 시작했다. 돈만 생기면 좋은 일을 해 왔다. 대학에 장학금을 갖다 내고, 동네 경로당에 찾아다니며 쌀 갖다 드리고 노인들 초청해서 음식 대접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  다니고 좋은 일에 앞장섰다. 지난 해 11월에는 고려대학교에 1억 원의 장학금을 들고 총장실을 찾아 갔다. 식당 한쪽 편에는 “네 시작은 미약하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욥기의 말씀이 걸려 있었다. 하나님 안에서 창대해져야 한다. 하나님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래야 고통이 사라지고  그래야 어둠이 물러가게 된다.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숭배하며 살면 그 나중에 고통이 그림자처럼 따라 온다. 하나님을 멀리 하고 살면 흑암과 멸망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 앞으로 돌아 와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와야 한다. 영원한 평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을 줄 아는 인생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성탄의 진정한 선물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삶이요 주현 절기를 살아가는 성도의 믿음인 것이다.

큰 빛을 비추어 주시는 하나님.
세상은 언제나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 빛도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고 어두움도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다. 빛과 어두움, 생명과 죽음,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다루시고 판단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창조의 첫 시작이 빛의 창조이셨다.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시고 보기에 좋아 하셨다. 빛은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빛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 밝은 빛이 비추기 시작하면 그 순간에 어둠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다. 빛이 예수 그리스도요 하나님이시라면 어둠은 사탄이요 마귀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와 사탄이 공존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마귀가 공존할 수 없다. 내 마음의 집에 주님이 사시면 주님이 사시는 것이고 마귀가 차자하면 마귀가 차지하는 것이지 주님과 마귀가 함께 살지는 못한다. 내 마음에 은혜의 빛, 감사의 빛, 능력의 빛, 성령 충만의 빛으로 가득차고 넘쳐 나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마음이 비어 있을 때이다. 내 마음에 성령으로 충만하고 기도와 말씀과 찬송과 은혜로 충만하지 못하면 그 순간에 마귀가 치밀고 들어온다. 그러면 감사하던 입에 금방 원망과 불평과 판단과 비판과 비난의 사악한 영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대개의 교회들은 연말  연시가 되면 당회와 구역회가 끝난 후에 성도를 시험에 들게 하는 마귀가 한 사람씩 한 사람 씩 지목하여 그 마음속에 불평과 불만의 영을 집어넣는다. 독감에 잘못 걸리면 죽기라도 하는 것처럼 마귀는 성도의 마음속에 그런 어둠의 영, 그런 흑암의 영을 집어넣으려고 도둑처럼 성도들을 휘젓고 다닌다. 그 때 조심해야 한다. 축산업자 한 사람에 의해서 옮겨진 구제역의 전염병이 온 나라의 소와 돼지를 200만 마리나 땅 속에 매몰해 버리는 것처럼 불평과 불만과 비난과 비판과 수근 수근 대는 영에 붙들리면 금방 자기의 마음에서 은혜가 떠나고 마음 밭이 초토화 되고 만다. 밝고 환하던 영혼이 금방 흑암의 지배를 받고 만다. 그러므로 예배의 시간이 중요하다. 예배 시간에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요즘은 주유소에 가면 경쟁처럼 기름도 넣고 자동차를 안과 밖으로 청소할 수 있는 시스템이 너무나 잘 되어 있다. 안과 밖을 청소해야 한다. 진공청소기를 내 안에 있는 불평과 원망과 비난과 비판의 영을 쏙쏙 빨아내고 은혜와 감사와 찬미의 영으로 가득 가득 채워 나가야 한다.

맑은 공기 마시는 것이 중요하듯이 성령의 빛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이 비추어 주시는 큰 빛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 빛이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는 인생들에게 비추어 들어가야 한다. 이번에 동해시에 가서 며칠 지냈더니 맑은 태백산맥과 맑은 동해 바다 바람을 호흡해서 그런지 목도 별로 세지 않고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탁한 공기 멀리하고 맑은 공기 마시듯이 흑암의 어두운 영을 멀리하고 정오의 햇빛처럼 밝고 밝은 큰 빛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큰 빛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빛에 대하여 말하지 말고 그 빛을 내 심령 속에 받아 들여야 한다. 몸에 암 세포가 있으면 항암 치료를 위해서 치료의 광선을 내 몸에 일정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의 광선, 치료의 광선, 회복의 광선이 내 몸과 마음에 골고루 구석구석마다 비치어 지고 불필요한 것들을 다 태우고 새로운 몸과 마음과 영혼이 되도록 나를 하나님 앞에 내어 드려야 한다. 나를 예수그리스도 앞에 노출시켜야 한다. 실오라기 하나라도 가리지 말고 벌거벗은 모습으로 그 분 앞에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오늘 본문 2절과 같은 영광스러운 빛의 회복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결심과 결단이 중요한 것이다.

영국 교회의 유명한 목회자여 설교가였던 스펄전(C.H. Spurgeon, 1834-1892)은 그의 책, <하나님 편에 서라>(Decision)에서 “중간 회색 지대에서 망설이는 자는 가장 어리석은 자이다.”라고 경고한다. 그렇다. 우리의 나아가는 신앙의 길에서 좌우로 망설이거나 방황하거나 흔들리지 말고 곧은길을 가고 옳은 길을 갈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신앙생활이다. 하나님과 마귀, 예수 그리스도와 벨리알, 천국과 지옥 중간에 서 있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이지 모른다.

예수 안에 살면 인생은 바뀌고 변하게 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빛이시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둠 속에 사는 어둠의 자식들인 인간이 어둠을 빛보다 더 좋아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 5절에 보면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다. 예수님은 참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각 사람의 마음에 비추이는 빛이시다. 그 빛을 받아들이는 것이 구원이요 거듭남이요 영생이요 천국 백성이 되는 길인 것이다.

창성(昌盛)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나라와 민족과 가정과 개인을 복되게 하시고 창성하게 하신다. 이것이 아브라함 이후 지난 4,000년의 교훈이요 예수 그리스도 이후 지난 2,000년의 교훈이다. 나라와 민족을 보라. 개인과 가정을 보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면 그 어떤 나라라도 민족이라도 잘되고 창성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 붙여진 인생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포도나무의 원 줄기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 붙여진 인생으로 살아야 열매 풍성한 가지가 되는 것이다. 주 안에서 살아갈 때에 그런 표적과 역사가 일어난다. 우리는 여기 본문에 나오는 3절의 창성함을 세상적인 기준으로만 보면 안 된다.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진정으로 창성해져 가는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실로 창성해져 가는 것이다.

임금님의 궁궐과 같은 넓고 좋은 집에 살아도 그 마음은 짐승의 마음과 같이 피폐하고 부부와 가족의 마음이 갈기갈기 찢긴 인생으로 살수도 있다. 실로 그러하다면 그 좋은 집, 그 좋은 가구, 그 좋은 공간이 무슨 창성함이라 할 것인가. 그러므로 주 안에서 창성해져 가고 주 앞에서 즐거워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추수하는 날의 즐거움과 같게 하시고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과 같게 하신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억울한 환경이나 억압 받는 환경으로부터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과 독립의 기쁨과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시는 영이시다. 이것이 남은 자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총이요 선물이다.

창세기의 요셉을 보라. 애굽에 발가벗겨진 채로 팔려간 요셉이 홀로 외롭게 애굽의 노예 현장에서 보내는 13년 동안 열 명의 형들은 아버지를 속이고 아버지의 집에 살면서 거짓의 요를 깔고 위선의 포대기를 덮고 안일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요셉이 온갖 고생과 수고를 다 하는 긴 세월 동안 열 명의 형들은 그들의 악행을 역사 속에 묻어 둔 채 시치미를 떼고 하루하루 살아갔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실한 믿음의 길을 선택한 요셉의 편을 들어 주셨다. 요셉은 하나님 안에서 창성한 자요 진정한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인생의 중심에 우뚝 섰다.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자의 창성함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자의 번영이다.

히브리서 11장 26절에 보면,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 봄이라."고 했다. 우리 모두 다 같이 이 같은 창성함과 나중의 즐거움이 더하고 더 해가는 믿음의 주인공으로 신실하게 살아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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