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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와 연합한 자(사56:6-8) 2023.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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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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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8-20 16:17 조회 2,817 댓글 0
 

                           여호와와 연합한 자(사56:6-8)              2023. 8. 20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연합’이란 표현이 나온다. 영어 성경에서는 ‘bind’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결합하다, 묶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여호와와 연합한다”라고 하였다. 성경에 ‘연합’이란 단어가 최초로 사용된 곳은 창세기이다. 창세기 2장 24절에 보면 “이르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라”라는 내용에 ‘합하여’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개역한글성경>에서는 ‘연합하여’라고 번역하였다. ‘연합한다’는 말은 ‘하나가 된다, 일치한다’는 뜻이다. 로마서 6장 5절에서는 성도의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기를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라고 교훈하였다. 골로새서 2장 2절에서는 “사랑 안에서 연합하라”라는 권면의 말씀도 대하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여호와와 연합하여 살아가는 자의 특징은 어떠하여야 하는가를 자세하게 교훈하고 있다. 호세아 4장 17절에 보면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라는 책망의 말씀이 나온다. 그 반면에 이사야 56장 3절과 6절에는 ‘여호와와 연합한 자’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그렇다. 신앙생활이란 우상과 연합해서 생활하던 어리석음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와 연합하여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사야 56장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은 혈통과 신분과 신체 건강 조건과 상관 없이 그 누구나 여호와 앞에 나와서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임을 선언하고 있다. 

 

 

여호와를 사랑하여 섬기는 자.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에 시간과 관심과 재물을 쏟는다. 어떤 사람은 수석 모으기에 열중한다. 어떤 사람은 분재 사랑이 대단하다. 어떤 사람은 평생토록 나무와 화초와 꽃을 사랑하여 거기에 삶을 바친다. 

 

시작한지 40여년 후인 2009년에 세상에 공개 된 충남 태안의 천리포 수목원은 전 세계 60여 개국에서 들여온 1만 3,000여 종의 수목이 자라고 있다. 우리나라 식물 가짓수만도 4,500여 종에 달한다. 설립자인 칼 페리스 밀러(Carl F. Miller/閔丙渴, 1921-2002)는 1945년 태평양 전쟁 당시 해군 장교로 한국에 왔다가 한국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 한국의 산을 유독 좋아했다는 칼 밀러씨의 한국 이름은 민병갈이다. 1979년 제 1호 귀화인이다. 한국인으로 귀화할 당시에 절친한 친구였던 민병도 전 한국은행 총재의 성과 돌림자에 맑을 ‘갈’(渴)자를 붙여서 자기 이름을 지었다. 그는 1962년 어느 날 우연히 만리포 해수욕장에 갔다가 딸의 혼수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땅을 팔겠다고 내놓은 한 시골 노인을 만난다. 그는 노인을 돕는 셈 치고 1만 9,834㎡ (6,000평)의 땅을 샀다. 땅은 30㎝만 파도 소금기가 있는 모래땅이었다. 그곳에서 민병갈씨는 씨앗을 발아시켜 묘목을 키우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일하고 번 돈은 모두 수목원에 쏟아 부었다. 해마다 한두 번씩은 미국의 묘목 경매에 참여해 신품종을 사들였다. 애초에 식물 전문가는 아니었던 그는 식물도감이 다 닳아 해질 정도로 나무를 공부했다.

 

어떤 사람은 새나 물고기나 동물 연구나 곤충 연구에 평생을 바치기도 한다. 그 대상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길 고양이를 지키고 보호하는데 시간과 자금을 총동원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반려 동물을 보호하고 관리하는데 온 힘을 쏟는 이들도 있다. 큰 돈을 번 기업가나 재벌 중에는 동서고금의 역사적인 미술품이나 골동품 수집에 열광한다. 그런 이들을 통해서 문화재 보존과 예술 발전에 크게 공헌하기도 한다. 

 

오늘 읽은 이사야서 56장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닌 이방인이나 신체적은 장애를 가진 그 어떤 누구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에서 벗어날 자가 없다는 선언이다. 1절에 보면 “너희는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는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나의 구원, 나의 공의’란 세상의 만민을 향하신 하나님의 본심, 하나님의 심경을 담고 있는 표현이다. 지난 주일 말씀에서 묵상하였든 바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언약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죄를 범하였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의 심판은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의 혹독한 날들로 이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노를 멈추시고 분노를 거두셔서 은혜로 포로 생활에서 벗어나 이스라엘 땅과 예루살렘 성으로 다시 돌아 갈 수 있는 회복의 날이 꿈처럼 찾아 온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으로 읽은 이사야 56장의 시작인 1절에 보면 “너희는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라고 권면하고 있다. 정의를 지키고 의를 행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나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나는 할례 받은 백성이다. 나는 하나님의 선민이다.”그런 특권 의식만 가지고 산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하나님은 그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건강한 자이든 몸에 장애를 가진 자이든 그 누구든지 상관 없이 하나님 앞에서 율례와 법도와 규례와 계명을 지켜 준행하는 자를 주목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렇지 않나. 요즘 수요일에 묵상해 온 에스겔 22장 말씀 중에 ‘선지자, 제사장, 고관, 백성’을 일일이 구분해서 그 죄악의 참상을 지적하시며 하나님의 책망과 진노와 심판을 경고하신 내용을 접하였다. 그 시대의 신앙 양심의 표상이며 칠흑같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등대와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할 선지자가 타락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반역하였다. 우는 사자가 먹잇감을 욺겨 잡듯 하였다.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는커녕 삼켜 버렸다. 백성의 재산과 보물을 탈취하였다. 우상 숭배의 결과로 이방의 침략 앞에 무너져가는 나라의 운명을 자초하여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여인의 수가 점점 많아지게 하였다.”라는 책망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한 부패와 타락의 현상은 제사장이나 고관이나 별로 차이가 없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점점 더 교묘하고 악의적이고 지능적인 범죄가 독버섯처럼 번져가고 있다. 

 

오늘 이 시간 예배드리며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아라.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그 마음을 두고 산다. 하나님과 연합하여 산다. 연애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두 손을 꼭 붙잡고 붙어 다닌다. 붙어 지낸다. 연합한다는 말은 하나가 된다는 말이다.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이가 벌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도 마찬가지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증거가 무엇인가.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그 대상에게 모든 정성을 다한다. 그 상대가 누구이든 무엇이든 상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네가 두지 말라고 하셨다.

·우상을 만들거나 우상에게 절하거나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질투하는 여호와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내용대로 돌아 와 보면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라”라고 하셨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무엇을 사랑하면 그 이름부터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게 된다.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설레고 이름만 들어도 생각이 상대방에게 모아진다. 

 

김춘수(1922~2004) 시인의 <꽃>이란 시의 교훈이 무엇인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우리가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이라고 찬송하지 않나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그것뿐예요

 

사랑한다 아들아 내가 너를 잘 아노라

사랑한다 내 딸아 네게 축복 더하노라

네게 축복 더하노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증거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과 연합한 자로 살아가는 증거가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느냐.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고 있느냐”하는 각 사람의 믿음의 정도 차이가 아닐까.

 

시편 106편 28-29절에 보면 “그들이 또 브올의 바알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그 행위로 주를 격노하게 함으로써 재앙이 그들 중에 크게 유행하였도다”라는 경고의 말씀이 있다. 그렇다. 하나님은 바알과 연합하는 우상 숭배를 결코 허락하지 않으신다.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섬기며 하나님께 연합한 자로 살아가길 원하시고 기대하신다. 향유 옥합을 깨트려 주님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을 씻은 마리아의 섬김과 헌신을 가롯 유다는 책망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저가 내 장례를 준비하였다. 후대에 이를 전해지게 하라”고 축복하셨다. 이런 은혜와 깨달음이 각 사람과 각 가정에 흘러 넘치길 축원한다. 

 

 

언약과 안식일을 굳게 지키는 자.

신앙 생활이란 하나님과 나와의 언약을 지켜 준행하는 생활이다. 6절에서 말씀하는 언약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을 경홀히 여기지 않고 굳게 지키는 자를 주목하신다. 그렇지 않나. 언약이란 인생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창세기 6장에는 노아 이야기가 나온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조롱하였지만 노아는“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다”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 준행하였다는 말씀은 창세기 7장 5절에 다시 또 기록되어 있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자였다”(창6:8)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하던 자였다”(창6:9) 언약을 지킨다는 말이 무엇인가. 내 생각, 내 경험, 내 주장, 내 소신, 내 판단, 내 주관, 내 취향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분부와 기대와 명령을 따라서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다니엘이 그랬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그랬다. 성공하지 못해도 좋고, 출세하지 못해도 좋고, 남들처럼 유명해지지 않아도 좋다. 언약을 굳게 지키며 살아갈 수 있다면 그 길을 택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와 연합한 자의 모습이다. 

 

그렇게 살아가면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성산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다. 생각하여 보아라. 신명기 23장에 보면 생식기에 이상이 있는 자나 출생 신분이 불분명한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 갈 수 없었다. 암몬 사람이나 모압 사람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갈 수 없었다. 하나님은 암몸의 후손이나 모압의 후손을 멀리하신 이유를 설명하셨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 길을 갈 때에 물과 떡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과 떡을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선지자 발람을 매수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려고 한 죄를 지적하셨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지금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시다.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들마다 여호와의 성산으로 인도하라”라고 천명하고 계시다. 

 

우리는 시편 23편을 잘 기억한다. 그 다음 편인 시편 24편에 보면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시24:3-5)라고 하였다.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는 자”에게 그런 복을 주신다고 하였다. 지난 월요일에 김서경 집사의 유골 안치식이 동작동 국립묘지인 서울 현충원에서 있었다. 장례 중에 따님이 말했다. 최근에 요양원 생활을 하시던 아버님이 하루씩 걸러서 격일마다 투석해야 하는 불편을 겪으셨지만 옷을 차려 입고 중절모를 쓰고 도우미 요양사에게 “오늘이 무슨 요일이냐 내가 교회 예배에 가고 싶다”는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다고 한다. 예배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귀한 신앙이다. 안식일을 기억하고 주일을 기다리며 주일 예배를 제대로 드리며 일주일을 살아가는 것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킨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 이후 신약 교회 성도들은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을 예배의 날로 지킨다. 세상 사람들은 일요일이라 하고 놀러 다니는 날, 쉬는 날 정도로 여기지만 신자들은 일요일이라고 하지 않는다. 주일(Lord’s Day)라고 한다. 

 

이사야 56장 2절과 4절과 6절에 이어서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는 신앙”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그리고 연이어 강조한 내용을 주목해 보라. 2절에 보면, “그의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하지 아니하여야 한다”, 4절에 보면,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고 거룩한 예배자로 살아가며 악행을 버리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며 살면 하나님이 그들을 여호와의 성산으로 인도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고라 자손의 시편인 시편 84편 10절에 보면 “주의 궁정에서의 하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날보다 나은 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는 고백이 나온다. 

 

하나님은 성막(聖幕)을 회막(會幕)이라고 하셨다. 그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만나주시겠다고 하셨다. 물론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다. 그러나 특별히 하나님은 하나님의 집에 계시며 그 곳에서 만나 주시겠다고 하셨다. 최근에 우리가 자주 부르는 <날 만나라>라는 찬양의 가사처럼 말이다. 여호와의 성산에서 주를 만나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주를 만나고, 그룹 날개 사이에서 주를 만나는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한다. 

 

 

여호와의 집에서 기쁨을 누리는 자.

여호와와 연합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집을 “기도하는 내 집”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와 희생 제사를 하나님의 제단에게 기쁘게 받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고 약속해 주셨다. 성도는 하나님의 집에서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집에 나와서 기도하는 성도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실 것이다. 

 

마가복음 11장 17절에 보면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께서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라고 힘 주어 강조하신 말씀이 있다.

 

맞다. 예배당은 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집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의 날을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성산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셔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리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 기쁨이란 어떤 기쁨일까. “내가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그 기쁨이란 어떤 기쁨일까. 우리 각 사람이 주 안에서 주님의 기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런 기쁨을 누리는 주인공들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원한다. 

 

세상 사람들은 경험해 보지 않은 기쁨과 즐거움과 환각을 경험해 보려고 마약에 빠져 든다. 성적 일탈 행위의 수렁에 빠져 들기도 한다. 도박이나 갬블링에 빠져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 후유증은 혹독하고 참담한 결과를 갖게 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오 이 기쁨 주님 주신 것> 이런 찬양은 아무나 부를 수 있는 찬양이 아니다. 물론 따라 부를 수야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믿는 자의 기쁨의 찬양이란 따라서 부른다고 누릴 수 있는 기쁨은 아니다. 

 

I'm so glad Jesus lifted me

오 이 기쁨 주님 주신것

I'm so glad Jesus lifted me

오 이 기쁨 주님 주신것

I'm so glad Jesus lifted me

오 이 기쁨 주님 주신것

Singing Glory Hallelujah.

주께 영광 할렐루야

Jesus lifted me.

주만 찬양해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라는 95장 찬송을 그런 기쁨 그런 소망을 갖고 부를 수 있는 성도라면 행복한 성도가 아닐까.

 

“1.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밤 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쉰 마음 뿐일세

 

5. 나의 진정 사모하는 예수님 음성 조차도 반갑고 

나의 생명과 나의 참 소망은 오직 주 예수 뿐일세”

 

주 안에서 이런 기쁨을 누리며 이런 기쁨을 함께 더불어 누릴만한 형제자매의 수를 점점 더해 가는 우리의 앞날이 되기를 소망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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