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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롬8:12-25) 2023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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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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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7-27 21:59 조회 3,156 댓글 0
 

                             하나님의 아들(롬8:12-25)                2023. 7. 23

 

 

오늘 읽은 본문에는 ‘하나님의 아들’ 혹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현이 여러 차례 반복된다. 우리가 누군가의 아들딸로 태어나는 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다. 그렇지 않나. 내가 나의 엄마나 아빠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보니 누군가가 나의 아빠 혹의 나의 엄마로 나의 곁을 지켜 준 것이고 나의 어린 시절의 양육을 책임져 준 것이다. 요즘은 아들딸을 낳아서 버리거나 죽음으로 몰아가는 비정한 부모의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말이다. 우리 중에 일찍이 부모를 잃어서 고아로 자라난 경우의 누군가가 있다고 할지라도 나란 존재는 그 누군가의 아들이나 딸로 태어나 자라난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나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생애의 큰 변화이며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나와 하나님의 관계, 나와 하나님과의 사이를 증명하는 심오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한 가정에 아기가 태어나고 그 아기가 자라나면서 엄마 혹은 아빠라고 부르기 시작하는 것은 놀라운 관계가 호칭으로 표현되는 감격적인 순간이다. 그렇지 않나. 누가 나를 엄마 혹은 아빠라고 부를 수 있나. 

반대로 누가 감히 나를 향하여 “너는 내 아들이라”라고 말할 수 있나. 부모와 아들딸의 관계가 아니면 그 어느 누구도 나를 엄마 혹은 아빠라고 불러주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나의 엄마 아빠가 아니라면 그 누가 나를 아들딸이라고 불러 줄수 있겠는가. 

 

오늘의 본문은 이 세상의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과연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가를 자세하게 교훈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영(靈)으로 인도(引導)함을 받는 사람.

로마서 8장 14절에 보면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다. 여기서 ‘아들’이란 표현은 남녀의 성별 중에서 남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들딸 곧 자녀를 총칭하는 표현으로 아들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해석해 가면서 ‘아들’이란 표현을 성경대로 반복하더라고 딸인 여성의 경우에 절대로 섭섭하게 듣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란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살아간다. 그 한 종류는 사탄의 영에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종류의 사람들은 성령이신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이다. 12절에서 언급한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사탄의 지배를 받고 사탄의 이끌림을 받는 자들의 결국은 육신에게 지고 만다. 그 나중은 죽음의 심판이다. 13절이 그것을 말한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라고 하였다. 지난 주일에 묵상한 로마서 8장 6절에 보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라고 하였다. 7절에 보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라고 하였다. 8절에 보면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탄의 지배를 받는 육신의 요구를 따라서 살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의지적인 결단과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면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아가야 한다. 이것은 어찌 보면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사모하고 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생명의 구주로 영접할 때에 주어지는 결과이며 신분의 변화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인 로마서 8장 14절에 보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길은 믿음의 결과이며 고백이 담긴 인격적인 관계의 열매인 것이다. 나 자신이 나를 지배하는 사탄과 육신의 요구를 떠나서 하나님의 영의 지배와 다스림과 인도하심을 의지적으로 선택하고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위트머(Witmer)라는 신학자는 14절의‘아들’과 16절의‘자녀’를 헬라어 원어를 분석해서 설명하고 있다. 즉, ‘아들’이란 ‘휘오스’(υἱός)는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제대로 잘 감당할 만큼 성장한 자녀를 표현하는 말이다. 그리고‘자녀’란‘테크논’(τέκνον)은 하나님 안에서 갓 태어난 신생의 상태라고 설명해 주었다. 갓 태어난 자녀이든 철이 들어서 자신의 의무와 권리를 제대로 행사할만한 자녀이든 한 아버지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크나큰 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은 15절의 말씀처럼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여야 한다. 반면에 ‘양자(養子)의 영’을 받은 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에도 양자로 받아 들이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쓰던 당시인 2천년 전의 유대나 로마 나라는 양자를 받아 들이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양자’가 무엇인가. 자녀가 없는 가정에 아들딸로 입적되어 법적 보호를 받으며 아들딸의 지위를 누리고 그 의무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법적 부자 관계의 형성을 말하지 않나.

 

내가 다리 밑에서 거적대기로 벽을 가리고 누더기를 깔고 덮는 거지의 양자가 되는게 아니다. 내가 천지 우주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주관자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양자가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엄청나고 놀라운 신분의 변화인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던 내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어 하나님을 나의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생각하여 보라. 누구를 내가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누구에게 내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이처럼 생각해 보면 불가능한 관계인데 어느 날 어느 순간 그를 내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가 주어진 것이다. 

 

옛날 어느 집안에서 자식이 없자 형제의 집안에서 아들 하나를 양자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 양자로 간 아들이 ‘아버지’라는 말을 절대로 안하는 것이었다. “아빠라고 말해 보라”라고 하면 “으으읍 읍”하며 입을 오무려 다물고 양손과 양팔을 불불 떨면서 아빠라고 부르질 못하는 것이다. 결국은 자기 부모 곁으로 되돌려 보내고 말았다. 

 

무슨 말인가.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생의 놀라운 변화이다. 더둔다나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고 또 부르는 생의 변화가 찾아 온 것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감격적인 체험이며 생의 거대한 변화의 시작인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라고만 부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하나님 아버지”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과 나의 놀라운 관계의 고백이란 말이다. 

 

16절에 보면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라고 하였다. 종교 개혁가이며 신학자인 마틴 루터 16절을 “누구든지 인간을 영적 무지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영적 지혜를 깨닫게 하는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을 수 없으며 또한 믿어지지도 않는다”라고 해석해였다. 그렇지 않나. 15절에서 언급한 대로 종은 종이고 아들은 아들이다. 종이 아무리 주인의 사랑을 받고 은혜를 덧입고 살아간다고 하여도 종이 감히 주인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르지는 못한다. 주인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신분은 오직 아들뿐이다. 어느 날 어느 순간 내가 하나님의 아버지의 아들이란 깨달음이 은혜로 받아 들여지는 순간에 나의 고백과 찬양과 기도와 섬김의 정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 경배합니다. 아버지 받아 주소서 당신의 사랑으로> 이런 찬양은 아무나 부를 수 있는 찬양이 아니다. 사랑 받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날마다 순간마다 그 은혜를 누리며 증거하며 살아가는 주인공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상속자(相續者).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양자가 된다는 신분의 변화는 17절에서 언급한 ‘상속자의 영광’또한 겸하여 주어지는 영광인 것이다. 그렇지 않나. 아들딸에게 주어지는 상속자의 권한은 동서고금이 다 마찬가지이다. 민수기 36장에 보면 히브리 민족들은 재산권을 보존하기 위해서 아들이 없는 경우에 딸이 다른 지파로 출가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로마 시대에는 친자이든 양자이든 상속권을 균등하게 누리도록 법으로 제정하였다. 이처럼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을 누리며 상속자의 영광을 누리는 것은 특권이며 성도에게만 주어진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에서 말씀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누리는 영광과 같은 것이다. 예수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온갖 고난과 수치를 다 당하시고 십자가에 처형 되셨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 예수를 부활과 승천의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 보좌 우편에서 누리는 영광스러운 존재로 구별하셨다.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빌2:10) 그 뿐만 아니라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는 자에게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빌2:11)

 

이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부활의 영광이며 영생의 영광이며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누리는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계5:12)의 영광인 것이다. 생각하여 보라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이 이러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면 겪는 고난을 마땅히 감내하며 극복하며 감당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강조가 17절 후반부에서 말씀하는“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라는 교훈인 것이다. 

 

 

몸의 속량(贖良)을 기다리는 자.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사함과 구원의 약속을 받고 살아가는 성도라고 할지라도 주 안에서 이미 죽어 무덤에 묻혀 있는 자들과 아직도 육신의 장막집에 거하며 장차 다가 올 죽음의 순간을 경험해야 하는 우리 각 성도들은 아직 부활의 영광과 몸의 속량을 온전히 덧입은 상태가 아니다. 

 

18-25절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다 같이 읽자.

 

18.지금 우리가 받는 고난은 앞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19.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20.피조물이 헛된 것에 복종한 것은 스스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21.그래서 그것들도 썩어질 것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리는 영광스런 자유를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22.우리는 지금까지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신음하며 고통당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3.이것뿐만 아니라 성령을 첫열매로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 곧 우리 몸이 구원받기를 갈망합니다.

24.우리는 이 희망 가운데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희망은 희망이 아닙니다. 눈 앞에 보고 있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란다면 참고 그것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그 누구에게나 탄식이 있다. 세상은 22절의 설명처럼 모든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고 함께 고통을 겪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피조물이 탄식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분명한 소망이 있다. 비록 지금 끊임이 없이 탄식하며 끊임이 없이 고통을 당하는 세상 가운데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분명한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성도이며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 21절에서는 “그 바라는 것은”이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단순히 뭔가를 기대하는 정도의 소망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에 가득찬 소망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소망은 24절에서 언급하는 대로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는 사도 바울의 분명한 가르침으로 깨달아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24절의 시작처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라는 사도 바울의 영적 발견은 지난 2천년 동안 두고 두고 오는 후대의 모든 인생들 중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아들의 권세, 자녀의 영광을 누리는 자들에게 품게하는 소망인 것이다. 우리가 <이 몸의 소망 무언가>라는 488장 찬송을 찬송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이 아주 없도다 

주 나의 반석 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하나님 아버지는 성령과 성도와 만물이 다 같이 함께 탄식하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자녀들을 절대로 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이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21절의 교훈처럼 “썩어질 것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리는 영광스런 자유를 누리게 하려는” 이 분명한 약속을 믿고 그 영원하신 약속 가운데 소망을 품고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이처럼 분명한 소망 가운데 장차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질 영광스러운 날이 다가 오고 있다면 지금 겪는 고난을 참고 기다리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로 읽은 25절의 내용이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장차 이루어질 소망이 분명하다면 참고 견디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쯤이야 누가 못하겠는가. 예수께서 장차 이루실 부활의 영광을 위하여 온갖 고난과 부끄러움을 한 몸에 다 짊어 지시고 영문 밖의 골고다 언덕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가신 것처럼 말이다. 점점 무더워지는 계절에 믿음으로 승리하는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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