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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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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여호와께 감사하라(시107:1-9) 2013.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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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관리자
작성일 13-11-25 22:29 조회 20,636 댓글 0
 
추수감사주일
 
 
본문 말씀의 시작은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이다. 1977년 이 맘 때쯤으로 기억한다. 대전의 신학교가 있는 언덕에서 큰길가로 20분 쯤 걸어 내려가면 목동 사거가 있었다. 그 사거리 주택가 안에 목동 교회에서 70-80여명 모이는 중고등부 담당사역을 선배와 함께 하였다. 그 때에 문학의 밤에 불렀던 복음 성가 중에 이런 찬양이 있었다. “나는 길 잃은 나그네였네”라는 찬양이다. 그 중간에 보면 “진실로 선함과 그 인자하심이/날마다 함께 하시리라/진실로 선함과 그 인자심이/날마다 함께 하시리라”는 가사가 나온다. J. W. Peterson이 작사하고 Alfred B. Smith가 작곡한 “Surely Goodness and Mercy”라는 찬양을 우리말로 번역한 찬양이다.
 
나는 길 잃은 나그네였네
죄악 중에 헤메이는데
사랑의 왕 내 목자 예수
나를 집으로 인도하네
진실로 선함과 그 인자하심이
날마다 함께 하시리라
진실로 선함과 그 인자하심이
날마다 함께 하시리라
영원토록 주 안에 내가 거하리라
영원토록 주 안에 나 안식하리라
진실로 선함과 그 인자하심이
날마다 함께 하시리라
 
누구나 생각해 보면 참으로 감사할 일이 많겠지만 시편 기자의 첫째 감사 제목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영원히 인자하심을 인하여 감사.
여기서 선하시다는 표현을 영어 성경에 보면 ‘he is good’이라고 했다. 미국에서 목회 할 때에 보면 교회 학교나 청소년부 선생님들이나 전도사님들이 학생들을 지도할 때에 “God is good" 이라고 함성을 지르면 학생들은 “all the time."이라고 큰 소리로 답하고 All the time 이라고 외치면 God is good 이라고 답하고는 하던 분위기가 기억에 새롭다. 그런 표현은 돈 모엔Don Moen 목사가 부르는 복음 성가의 가사이다. “God is good all the time"이란 찬양의 가사는 우리말로 하면 이렇다.
 
항상 좋으신 하나님 그는 나의 마음의 찬양 언제나 좋으신 하나님 가장 어두운 밤에도 그의 빛은 빛나도다. 좋으신 하나님 항상 좋으신 하나님 네가 골짜기에 다닐지라도 어둠 속에 거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가 인도하신다. 그는 너를 안전히 지키실 것이다. he will keep you safe and sound
 
그렇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시고 항상 선하신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그렇다. 우리가 때때로 하나님께 대하여 오해하거나 섭섭해 하거나 실망스러워 할 때가 있을 수 있겠으나 그것은 나의 문제이지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하여 실망하거나 섭섭해 하길 원하시는 아버지가 아니시다.
 
또한 인자하심이란 ‘love’ 즉 사랑을 말한다. 공동번역 성경으로 읽어 보면, “야훼께 감사 노래 불러라. 그는 어지시다. 그의 사랑 영원하시다.”라도 했고, 영어 NIV 성경에 보면, “Give thanks to the LORD, for he is good; his love endures forever.”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은 어지신 아버지이시며 그 분의 사랑은 영원하신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감사하게 된다는 고백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선하고 착하고 어지신 아버지이시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에 자주 사용해 온 유명한 고백과 찬양이다. 역대상 16장 34절에도 이와 또 같은 표현이 나온다. 예레미야 33장 11절에도 그런 내용이 나온다. 역대상 16장 34절의 말씀은 다윗 왕이 사울 임금 때에 전쟁 중에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법궤를 예루살렘에 되찾아 온 후에 감격과 기쁨 가운데서 부른 찬송과 경배의 고백 중의 한 대목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가 보면, 별의 별 어려운 일들과 사고와 사건과 죄와 악 가운데서 헤맬 때가 없지 않다. 그런 우리를 죄와 악에서 건지시고 선하시고 인자하신 사랑의 손길로 날마다 조금씩 영원을 향하여 인도하시는 분이 우리의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그 모든 선하심과 인자하심 즉 사랑하심을 생각하면 그 영원하신 사랑에 대하여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고백이다.
 
대적의 손에서 속량하시고 사방에서 불러 모으신 하나님께 감사.
2절의 감사 내용은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끌려 간 이후로 70년 만에 다시 예루살렘과 유다 땅으로 되 돌아와 살 수 있도록 동서남북의 흩어졌던 대적자들의 손아귀에서 사방으로부터 불러 모아 구속해 주신 사랑 즉 구원해 주신 그 능력을 인하여 감사하고 경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바벨론의 포로의 땅에서 꿈처럼 선조들의 땅으로 귀국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신 기적의 하나님을 계속하여 반복적으로 찬양하고 있다. 8절과 15절과 21절과 31절에 똑 같은 고백이 반복되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로다.”
 
70년 전에 바벨론에 포로 되어 끌려 갈 때의 참담하고 비참한 상황과 비교하면 지금 저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동서남북 흩어졌던 이방의 땅에서 불러 모아 속량해 주신 그 은혜와 기적은 생각할수록 감사하고 기억해 볼수록 감격스러운 축복이 아닐 수 없단 말이다. 2절에 두 번 반복해서 나오는 ‘속량’이란 단어가 놀랍지 아니한가. 이는 이천년 전에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룩해 주신 죄 사함의 은총을 일컫는 같은 표현이니 말이다.
 
1912년 4월 14일 밤 11시 40분경에 대서양에 떠다니던 빙상과 충돌한 타이타닉호 Titanic 호는 3시간 쯤 후에 완전히 바닷 속으로 침몰하고 말았다. 영국 화이트스타사(社)가 건조한 당시 초대형 호화여객선이었다. 총톤수 46,328t, 길이 259.08m, 너비 28.19m, 깊이 19.66m로 1911년에 제작되었다. 주기(主機)는 터빈의 삼연성기기(三連成汽機)의 조립으로 된 당시의 최고 엔진을 장착한 기관선이었다. 삼축선(三軸船)으로 속력은 22kn이며, 당시에는 4만t급 이상의 객선의 첫 출항인 개척선이었다.영국의 사우샘프턴항(港)에서 뉴욕항으로 향하는 처녀항해 중이던 1912년 4월 14일 밤 11시 40분 뉴펀들랜드 해역에서 부류빙산(浮流氷山)과 충돌하여 2시간 40분 만에 침몰하였다. 이 사고로 승선자 2,208명 중 1,513명이 차가운 겨울 바다에 빠져 얼어 죽었다. 이 사고를 계기로 배의 구조·구명설비·무선설비·유빙감시(流氷監視) 등의 문제와 관련하여 해상의 인명안전에 관한 국제회의가 소집되고 해난사고방지를 위한 국제적인 결정이 활발하게 발전해 왔다. 일화 중에 어느 두 부호 할머니 중에 한 분은 묵던 방에서 성경 책 한권만 달랑 들고 구명정에 올라서 살아남았고 어떤 할머니는 자신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귀걸이 반지 팔찌 등을 챙기러 숙소에 찾아 들어 갔다가 이웃 방에 묵었던 이들의 보석까지 훔쳐서 한 움큼 끌어안고 뒤 늦게 갑판에 오르다가 그만 배가 가라앉는 바람에 여인들과 어린이와 노약자를 먼저 구명정에 태워 주던 구조대의 혜택을 입지 못하고 바다 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이는 나중에 살아남은 자와 타이타닉 호의 사망자들의 흔적을 통하여 증언된 이야기들이다. 그 타이타닉 호가 새벽 1시 40분경 대서양 바다 속으로 가라앉기 진적까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악대들이 연주했던 음악은 그 어떤 세상 노래가 아닌 찬송가였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숨 질 때 되도록 늘 찬송 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338장 찬송)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바벨론에 끌려가게 되었는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며 금과 은과 보석과 세상 좋은 것에만 눈이 가리어져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바벨론 이란 이방의 막대기로 치시고 가시채로 고통스럽게 하셔서 하나님만을 제대로 잘 믿고 따르며 섬기는 민족으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채찍질이요 민족적인 연단이었다. 역대하 36장 11절이 이하에 보면 남왕국 유다의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 왕은 21살에 왕이 되었다. 그 후에 11년간 왕으로 예루살렘에서 유다 나라를 다스리는데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당시의 선지자였던 예레미야 선지자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타일러도 들은체 조차 하지 않았다. 시드기야는 타락한 왕이었다. 역대하 36장 14절 끝에 보면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힌 왕이라 하였다. 16절 이하에 보면 당시의 임금과 백성들이 신앙적으로 얼마나 타락했나를 고발하고 있다.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사신들을 비웃고 그의 말씀을 멸시하며 그의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그의 백성에게 미치게 하여 회복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갈대아 왕의 손에 그들을 다 넘기시매 그가 와서 그들의 성전에서 칼로 청년들을 죽이며 청년 남녀와 노인과 병약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며”(대하 36:16-17)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다가 오자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군대를 보내서 예루살렘 하나님 성전의 크고 작은 그릇들과 보물과 왕과 방백들의 보물을 다 빼앗아서 바벨론으로 가져가게 하셨다. 성전과 성벽과 왕궁은 무너지고 불태워 졌다. 남은 모든 귀한 그릇들은 다 부숴 버렸다. 그 후 70년 세월 동안 토지는 황폐해 졌다.
 
예레미야 52장 10절 이하에 보면 유다의 20대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두 왕자를 죽였다. 그리고 시드기야 왕의 두 눈을 빼내고 놋 사슬로 결박해서 바벨론에 끌어다가 죽는 날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시드기야 임금 32살 때에 일어난 불행한 역사의 한 장면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의 심판과 판단을 마음에 담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개인과 가정과 나라와 민족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그래야 개인도 복을 받고 가정도 잘되고 나라와 민족도 번영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나는 무엇으로 인하여 불안해하고 초조해 하며 불행해 하는가. 가난인가. 질병인가. 인간관계의 악화인가. 가족 간의 불화인가. 신용을 잃었는가. 배반을 당하거나 배신을 당하거나 오해를 받거나 삶의 의욕이 없는 실의에 빠져 무기력하게 지내지는 않는가. 아니, 넘치는 풍요와 안정은 나를 더욱 심각하게 타락시켜 갈수도 있다. 혹은 외모나 젊음이나 건강이나 재물이나 사회적인 지위나 권력이나 명예나 인기나 자랑의 감옥에 갇혀서 그런 것들을 우상처럼 붙들고 아등바등 거리며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한심한 인생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사도 바울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4)는 고백처럼 곤고한 인생길에서 방황하고 있는 영혼은 없는가. 나를 내 안과 밖의 우겨 싸임을 당하는 환경에서 건지시고 구원하시고 구속해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계속되는 시편 107편 기자의 고백을 보라. 광야의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주리고 목이 마르고 그 영혼이 피곤할 때에 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였다. 광야 생활의 근심과 고통에서 부르짖어 기도할 때에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하였다.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도 하였다. 본문의 4절부터 8절까지를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자.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영과 육이 피곤할 때에 힘과 용기를 주시고 기도하고 부르짖을 때에 고통에서 건져 주시고 좌우로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영원한 주와 함께 거할 예루살렘 성읍에 거하게 하시는 분이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요한 계시록 20장 6절에 보면 이와 같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서 영원토록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는 복락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영원한 축복을 약속해 주셨다. 거기서 말씀하는 천년동안이란 이 세상의 천년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상징하는 말씀이다.
 
 
사모하는 영혼에 좋은 것으로 만족하게 채워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
올해 72세인 저항 시인 출신 김지하 선생은 올 가을에 건국대학교 석좌교수에 임용되었다. 그가 30년 전인 1982년에 발표한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가 있다. 그 시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끝난다.
.........................................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197-80년대에 이런 목마름을 가슴에 부여안고 조국이 자유와 민주주의의 땅이 되기를 열망하던 끓어오르는 젊은 피의 희생이 있었음으로 오늘 날이 주어진 것 아닌가. 이는 개인도 가정도 나라나 민족이나 교회의 역사도 다 마찬가지이다.
 
친구의 딸이 올해 외무고시에 수석으로 합격되었다. 충청북도에서도 낙후된 작은 읍인 괴산읍내에서 30여년을 100여명 성도들을 섬기는 친구 목사의 맏딸이다. 지금 서울 대학교 4학년이다. 지금도 금요일 밤이면 시외버스를 타고 고향 교회에 가서 성가대와 교회학교 어린이들을 돌보며 주일 예배를 드리고 주일 밤늦게 다시 서울의 학교로 돌아와 공부를 한다.
 
본문 9절은 공동번역으로 읽으면 이렇다. “타는 목을 시원하게 축여주시고 주린 배를 좋은 음식으로 채워주셨다”(for he satisfies the thirsty and fills the hungry with good things) 몹시도 목이 마를 때에는 청량 음료수 보다는 시원한 냉수 한 그릇이 더 좋다. 참으로 배가 고파 허기가 지고 쓰러질 것 같을 때에는 기름진 음식 한끼를 먹고 나면 다시 기운이 돋고 생기가 돋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셨다. 목 마르다고 금과 은과 보석을 갈아 마시고 배 고프다고 돈으로 쌈 싸 먹게 만들지 않으셨다.
 
박목월 조지훈과 함께 청록파 시인 삼인방 중의 한 사람이었던 시인 박두진(1916-1998)은 ‘해’리는 시에서,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고 노래하였다. 이 시는 해방이 되었고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여전히 나라가 어수선하고 불안정하던 1949년,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기 한 해 전에 그의 나이 33살 한창일 때에 쓴 시이다.
 
시인은 시로 말하고 종은 울림으로 말하고 가수는 노래로 말하고 미술가는 작품으로 말하고 설교가는 설교로 그 시대에 하시려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 아닌가. 또 한해가 이렇게 가고 있다. 당신은 요즘 무엇에 목 말라 있고 무엇에 굶주려 있는가.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게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내 육신 하나의 안일과 배 부름에만 만족하지 말고 거룩한 영혼의 목마름과 거룩한 영혼의 굶주림을 느끼며 백만리 길이라도 돌고 돌아 회귀하는 연어 떼에 회귀성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 앞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자. 주어지는 환경대로 반응하며 살아가는 것은 동물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왜 목마른가 무엇에 배 고픈가를 근본적으로 질문하며 그 현실과 상황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깨어있는 시대적인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반응 reaction’과 ‘응답 response’ 는 그 차원이 하늘과 땅의 차이가 아니겠는가.
 
70년 바벨론 포로의 땅에서 돌아 와서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양의 고백을 드리던 시편 107편 기자의 고백!
 
이런 타는 목마름과 허기를 가슴에 끓어 안고 한 시대를 바라보며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명의 사람답게 살아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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