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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용서 받은 자의 기쁨(시32:1-11)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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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3-03-24 21:43 조회 23,810 댓글 0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믿음으로 살아가는 가장 큰 증거는 기쁨이다. 이 기쁨은 세상적인 그 어떤 기쁨과는 그 차원이 전혀 다른 것이다. 행복은 다분히 환경적인 것이지만 기쁨은 환경을 초월하는 차원의 그 무엇이다. 겉으로 즐거운 것과 마음 속 깊은 곳에 기쁨이 있는 것과는 그 정도가 전혀 다르다. 빌립보 감옥에 갇혔던 바울과 실라는 밤새도록 기도하고 찬송할 때 지진이 일어나고 옥문이 열렸다.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마음 깊은 곳, 영혼 깊은 곳에는 빼앗길 수 없는 기쁨이 있었다. 그 사도 바울이 나중에는 로마의 감옥에 있으면서도 세상에서 그의 편지를 받아 볼 성도들을 향하여 기쁨으로 간구하고 기도생활을 할 수 있었던 동력은 성도의 기쁨 그 자체였다. 고린도 후서 7장 4절에도 보면, 사도 바울은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고 말하므로 넘치는 기쁨의 전도자였음을 증거한다. 마태복음 2장 10절에 보면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하여 동방에서부터 별을 보고 베들레헴을 향해 찾아 가던 동방박사들은 베들레헴의 마구간 위에 머물러 선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였다. 기쁨의 근원이 무엇인가. 예수를 만나면 기뻐진다. 죄 용서 받으면 기뻐진다. 거듭난 체험을 가지면 기뻐진다.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면 기뻐진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쁨, 성령 충만을 받은 기쁨,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 받은 자의 기쁨은 이 세상 그 어디에서 체험할 수 있는 그 어떤 체험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 중의 기쁨, 인생 최고의 기쁨인 것이다.

이와 같은 신앙생활의 기쁨과 감격을 전혀 체험해 보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있다면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용서 받은 자의 기쁨이란 마약을 즐겨하며 얻어 보고 싶어 하는 기쁨이나 술이나 담배나 놀음이나 그 어떤 게임이나 도박이나 성적 탐욕을 통해서 얻어 보고 싶어 하는 기쁨의 차원과는 설명할 수도 없고 비교할 수도 없는 기쁨인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역대 유명 배우나 연예인이나 가수들 중에서 남녀를 불문하고 마약복용 혐의에 연루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요즘도 여전하다. 왜 그럴까. 무대 위에서의 화려한 생활과 일상의 무료함을 메꾸지 못하여 그러한 것 아닌가. 미국의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1926-1962) 는 L. A의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고아원과 위탁 가정에 전전긍긍하며 어린 시절을 불행하게 지낸 그녀는 어려서부터 빼어난 외모로 뭇 남성들에게 성적으로, 심리적으로 학대를 받았다. 16살 때에 이미 지미 도허티라는 청년과 도피 행각을 벌이며 결혼 생활을 시작했지만 사년 만에 끝나고 말았다. 그 후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공장에 취직했다가 우연히 사진작가에게 눈에 띄어서 모델 생활을 시작하고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되었다. 노마 진 모튼슨(Norma Jean Mortensen)이란 원명을 대신하여 마릴린 먼로라는 이름으로 폭스 영화사의 전속 배우가 되었다. 한동안 그녀가 폭스사를 먹여 살린다고 할 정도의 인기 배우였다. ‘나이아가라’, ‘돌아오지 않는 강’, ‘7년 만의 외출’, ‘뜨거운 것이 좋아’같은 영화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던 그녀의 사생활은 그리 평탄하지 못했다. 야구 스타 조 디마지오와 살다가 헤어졌고 극작가였던 아서 밀러와의 결혼 생활에 실패한 이후로 그녀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결국 그녀는 36살의 젊은 나이에 자기 집에서 약물과다복용으로 인해서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기쁨이란 것의 현주소가 어디 있다고 생각되나. 부자가 되면 기쁠까. 공부만 잘하면 기쁠까. 출세하면 기쁠까. 성공하면 기쁠까.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최고의 권력을 손에 잡으면 기쁠까. 건강하고 잘생기고 멋있게 생기면 기쁠까. 날씬하면 기쁠까. 물론 가난한 것 보다야 부한 것이 낫고 공부를 너무 못하는 것보다야 잘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세상을 살면서 전혀 성공이 뭔지, 출세가 뭔지도 모르고 살아가느니 성공도 하고 출세도 경험하여야겠지만 그런 것이 기쁨의 충분하고 완전한 조건은 못된단 말이다. 우리는 대개가 상대적으로 남들이나 주변 사람의 그 어떤 환경이나 여건을 부러워 할 수 있다. 그러나 기쁨이란 것은 그런 것과는 그리 크게 상관이 없는 것이다.

본문인 시편 32편이 시작되는 표제어에는 ‘다윗의 마스길’이란 표기가 나온다. ‘마스길’이란 ‘교훈시’란 뜻이다. 주전 991년경의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울 임금 때에도 늘 그러하였지만 다윗이 임금이 된 후에도 이웃 나라인 블레셋이 이스라엘에 쳐 들어오는 전쟁은 자주 계속되었다. 결국 또 전쟁이 벌어져서 온 나라의 군대가 최전방에 배치되었다. 다윗 주변의 장수들도 모두 다 전쟁에 투입 된 상태였다. 평소 같으면 전방에 야전 지휘소를 설치하고 함께 전방에 나아갔을 다윗 왕인데 어찌된 연고인지 그 때에는 그냥 왕궁에 머물러 있었다.

사무엘 하 11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전쟁 중에 다윗 왕은 부하 장군인 우리야의 아내를 왕궁으로 불러 들여서 범하는 씻을 수 없는 사악한 범죄를 저질렀다. 우리아의 남편은 전쟁터에 나간 상태였다. 하나님은 이 사건 후에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을 몹시 엄하게 꾸짖으셨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시편 51편은 그와 같은 패륜적인 범죄를 저지fms 임금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기도를 드린 내용으로 잘 알려져 있다. 본문인 시편 32편은 다윗 왕이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제 6계명과 제 7 계명을 모두 다 범한 이후에 처절한 회개의 과정을 거쳐서 인생의 뼈를 깎는 것과 같은 캄캄한 터널을 통과하면서 쓴 참회하는 심정을 담은 교훈시이다. 다윗은 파렴치한 통치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처절한 회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였다. 시편 51편이 죄를 범한 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처절하게 회개의 슬픔과 괴로움을 겪어 나가던 심경을 고백한 내용이라면 시편 32편은 간절히 회개하고 통회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간절히 구한 후에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를 체험하고 어렵게 마음의 안정과 평안을 다시 회복해 나가면서 겪은 뼈를 깎는 것과 온 몸 속의 진액이 다 빠져 나가는 것과 같은 회개의 과정을 거친 후의 심경을 기록한 내용이다.
 

죄를 용서 받은 자의 복
1절 말씀을 보라.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여기서 ‘허물’이란 히브리말로 ‘폐솨’([v'P)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뜻을 스스로 거역하는 반역행위”라는 뜻이다. ‘죄’(罪)란 ‘하타아’(ha;f;j)라는 히브리말인데 “표적에서 빗나간다.”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이 요구하시고 기대하시는 바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죄의 본질”을 언급한 내용이다. 2절에서는 ‘정죄’(定罪)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 ‘정죄’란 히브리말로 ‘아온’(@/[)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구부러지고 왜곡되어 하나님의 뜻을 져 버리고 떠나 있는 상태”를 말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그 어떤 허물과 죄와 정죄 받을 죄의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진정으로 그 죄를 회개하고 뉘우치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용서를 진심으로 간구하면 하나님은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우리 각 사람의 죄를 완전히 용서해 주시고 다시 기억조차 아니 하시는 용서의 하나님이시다.

세상으로 하여도 그러하지 않는가. 죄지은 것 없이 떳떳한 사람은 경호하는 사람이 없어도 세상을 자유롭게 활보하면서 살아가지만 죄를 지은 사람은 경찰서만 보아도 피해 가게 되고, 경찰관만 저만치 보여도 스스로 피하고 숨게 마련이 아닌가. 떳떳하면 오히려 경찰관 곁으로 다가가서 도움을 청하거나 길 안내를 받을 수 있지만 스스로 범죄 하였다면 경찰관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두려운 일인가 말이다.

임금 다윗은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심판인가를 뼈저리게 절절히 경험한 죄악의 사람이었다. 주변 신하들 보기에 민망하고, 소문을 들어 알고 있는 국민들에게 죄송하고, 전쟁 일선에 보내어 전사(戰死)하게 한 장군 우리아의 유족들에게 해명할 변명의 말을 찾아 낼 수 없는 사악하고 비겁하고 나쁜 인간이었다. 그런 다윗이 얼마나 처절한 고통과 회개의 간구를 거쳐서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였을지는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다.

하나님 앞에 가슴을 치며 통회하며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고 또 구하며 죄와 악을 범한 한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구하고 또 다시 구한 후에 어느 날 임하기 시작한 마음의 평화를 이렇게 고백한 것이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이 어찌 평범한 사건이며 흔한 일인가. 사실 인간은 아담과 하와에게서 이미 극악한 범죄가 시작되었다. 사도 바울은 이 같은 사실을 로마서 3장에서 큰 목소리를 선언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또한 로마서 6장 23절은 죄의 심각성과 영생의 가능성을 명확하게 구분하여 선언하고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여기서 ‘은사’(恩賜)란 말은 ‘선물’(膳物)을 일컫는 말이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 안에서라야만 죄의 사함을 받고 영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죄의 용서가 없이는 천국도 없고, 영생도 없고, 자유함도 없고, 기쁨도, 평화도, 안식도 없다.

매일 묵상집인 2013년 3월 호의 서두에는 고 김준곤 목사의 “예수 묵상” 분량이 연재되어 있다. 그 내용 중에 눈길을 끄는 표현이 있었다.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피맺힌 사랑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결코 용서가 안 되는 유일한 죄가 있습니다. 600만 명을 학살한 죄도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죄는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고통당하시고 죽으셨는데도 하나님께 용서 받지 못하는 인간의 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대신 고통당하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죄입니다. 그 분의 사랑 고백과 그 사랑의 공효(功效)를 거부하는 사람은 그 죄를 영원히 용서 받을 길이 없고, 하나님과 화해할 길이 없습니다.” 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 복음의 내용인가. 그렇다. 우리 모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면 죄의 용서를 받을 수가 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은 죄와 허물을 용서 받는 복이다. 다윗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용서를 체험하였다. 처절하고 민망하고 돌이킬 수 없는 범죄자 다윗이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고 그것이 얼마나 영혼에 큰 기쁨이요 복인가를 고백한 말씀이 바로 본문의 1절과 2절이다. 그래서 다윗은 반복하여 ‘복이 있도다.’라고 고백한 것이다. 허물과 죄를 사함 받고 가림 받고 다시는 정죄 받지 않은 그 사실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하고 다행스럽고 제 2의 생을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은혜인가 말이다.

지난 3월 7일에 코엑스에서 열린 국가 조찬기도회에서는 한국의 폴 포츠라고 별명 붙여진 야식배달부 출신 청년 김승일이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세계적인 역도 선수 출신 장미란 자매가 신약 성경을 봉독하였다. 각 사람이 모두가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복을 받은 인간 승리의 주인공들이 아닌가. 우리 모두 하나님 안에서 죄를 용서 받은 자의 진정한 축복을 누리며 증거 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다.

죄의 고통과 그 죄를 고백한 후의 은총
죄는 숨기면 숨길수록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짓누르게 된다. 3절과 4절은 다윗의 그와 같은 견딜 수 없는 처절한 죄의 심각성과 그 심경을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기 전에는 종일 신음하게 되고 뼈가 쇠하였다고 하였다. 밤낮으로 하나님의 손이 자기를 누르고 계신 것과 같다고도 하였다. 자기의 진액이 다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르는 것 같이 되었다고도 했다. 다윗 왕이 부하 장군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을 전쟁의 최전선에 보내서 죽도록 한 그 모든 죄악들이 자신을 짓눌러서 뼈를 깎는 것과 같은 고통과 양심의 괴로움으로 인해서 더 이상 숨길수도 없고 버틸 수도 없고 스스로 답답하고 힘겨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뼈가 쇠하고 온 몸의 진액이 빠져 나가는 것과 같은 고민과 번민을 호소하고 있다.

스스로 괴로워 견딜 수가 없고 답답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손이 밤낮으로 자기의 양심을 짓누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징계하시는 심판 앞에서 더 이상 숨길 수도 없고 감출 수도 없는 초조한 심정을 안고 고민하다가 어느 순간에 하나님 앞에 토하듯이 죄악을 범한 사실을 고백하기 시작했는데 하나님은 자기를 책망하거나 벌하지 않으시고 곧 주께서 그 모든 죄악을 용서하셨다는 것이다. 5절에 ‘자복한다.’는 말은 ‘내어 던진다.’는 뜻이다. 무거운 짐은 내려놓으면 편안해 지고 홀가분해 지는 것처럼 죄와 악의 짐을 하나님께 자복하면 하나님이 나의 죄를 깨끗하게 용서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면 무슨 죄든지 짓고 나서 이처럼 회개하면 끝이냐, 회개하면 그만이냐고 반문할 수 있다. 회개와 용서란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신다. 요한 1서 1장 9절에 요한 사도는 이 사실을 명쾌하게 전하여 주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인가. 과거에 ‘자수하여 광명 찾자’는 반공 표어를 길거리와 전봇대 곳곳에 여기 저기 붙이던 때가 있었다. 지하 간첩 혹은 고정 간첩 색출을 위한 문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용서를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증거하였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1:18) 죄의 용서와 구원이 어떻게 임하는 것인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고 하였다. 미전향장기정치범이라도 대한민국에 전향할 의사를 분명하게 밝히면 그 순간 대한민국 국민으로 받아들여 주고 대한민국 국민의 모든 자격과 특권을 부여하는 법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의 백성이 되고 죄의 용서를 받고 허물의 가림을 받는 법도 마찬가지이다. 다윗은 5절에서 분명히 자신의 체험을 밝히고 있지 않는가. 죄를 아뢰고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곧 그의 죄악을 용서하셨다고 간증하고 있다. 6절은 그와 같은 자기 체험을 가지고 주변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것이다. 그 어떤 극악한 죄를 범한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회개하는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악을 제거하시는 은혜의 주님이실 뿐만 아니라 용서의 주님이시다. 7절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체험한 감사와 기쁨을 고백한 것이다. 주께  용서를 구하고 주께 은신처 삼고 주께로 피하고 나니 그의 영과 혼과 육체에 부어 주시는 구원의 은총이 감사하고 주 안에 보호 받는 평안이 감사해서 주께 찬양을 올리는 것이다. 구원 받고 보니 4절에 ‘주야로 죄인을 짓누르시던 주의 손이’ 7절에서는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로다’라고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찬미하고 경배하고 노래하였다. 이처럼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스코틀랜드에 위치한 에든버러 대학교의 산부인과(産婦人科) 교수인 제임스 심슨(1811-1870)은 출산 과정에서 클로로포름(chloroform)이란 마취제를 사용한 최초의 의사이고 이후로 외과 수술 환자의 전신 마취가 가능해 졌다. 1847년 11월 4일 이후 그는 일주일 내에 그는 산고를 겪고 있는 출산 준비 여성 30명에게 클로로포름을 투여하였다. 심슨의 이 같은 혁명적 발견은 교회와 내과병원의 노여움을 샀다. 그 당시 교회의 입장은 출산할 때에 여성이 겪는 고통을 당연하다고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또한 의사들은 산모가 출산 때에 겪는 고통이 생물학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대로 인해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마지막 아이를 분만하기 위하여 이 약물을 사용했던 1853년까지 클로로포름은 폭넓게 사용되지 못했다. 그 후로 클로로포름은 마취제로 지나치게 사용하면 심장마비의 원인이 된다는 연구 결과가 밝혀지기 전 까지 요긴하게 마취제로 사용되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기자가 찾아가서 “오늘 날까지의 발명과 발견 중에 최고의 발견은 무엇인가요?”하고 물었다. 그는 “내 평생 최고의 발견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죄인들의 구주이시라는 사실과 예수님은 나의 구주이시라는 깨달음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세상 많은 사람들은 죄를 죄라고 여기지 않고 허물을 허물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죄와 악을 짝하며 살아간다. 그와 같은 세상에서 우리가 죄와 악과 허물을 주께 자백하고 사함 받은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크나 큰 은총이며 축복인가.



죄 사함의 체험과 기쁨의 간증
다윗은 8절 이하에서 자신이 뼈를 깎는 것과 같고 온 몸에서 진액이 빠져 나가는 것과 같은 고통 가운데서 죄의 용서를 받고 자유와 기쁨을 회복한 자신을 간증하고 있다. 10절에서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란 11절에서 말씀하는 ‘의인들’이다. 저들은 1절과 2절에서 말씀한  ‘복이 있는 자’이며  6절에서 말씀한 ‘모든 경건한 자’이다. 저들은 ‘주님을 은신처 삼은 자’이며 ‘환난에서 주님의 보호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들의 입에는 구원의 노래가 있고 그들의 마음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넘쳐 난다. 그들의 마음은 정직하며 그들은 죄를 용서 받은 기쁨과 감사로 인하여 기뻐하며 다 즐겁게 외친다. 죄의 용서를 받은 이들에게는 어른이든 어린아이이든 기쁜 찬양과 즐거운 찬송이 있게 마련이다.

1500년대 말에 독일의 아이슬레벤 성당에서 성가대의 찬양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성가대가 찬양을 연습 중이었다. 그 때에 어린 소년이 찬양을 따라서 하는 노래 소리가 문 밖에서 성당 안으로 들려 왔다. 문을 열어 보니 10살쯤 된 어린 소년이 문 밖에 서 있었다. “너 여기서 무엇하고 있니?” 하고 묻자 “저도 성가대원이 되고 싶어서 노래를 불러 봤어요.” “그래 우린 모두 어른뿐인데 어린 네가 성가대에 들어 올수 있겠니?” “네, 예수님을 위한 일이라면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쓰임 받을 수 있다고 배웠어요. 하나님은 저 같은 어린아이도 써 주실 거에요.” 세월이 흘러갔고 그 소년은 1517년, 30살의 나이에 종교를 개혁하는데 앞장선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로 성장하였다.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지난날에 나의 뼈를 깎듯이 누르고 있던 온갖 죄와 악들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하시는 사죄(赦罪)의 체험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을 덧입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죄의 무게이다. 죄의 무게는 지구의 무게보다 더 무겁다. 죄의 크기는 우주의 크기보다 더 크다. 그러나 아무리 크고 무거운 죄라도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가지고 나와서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나를 온갖 죄와 악으로부터 깨끗하게 하시고 정결하게 해 주신다.

내 몸이 병들면 최첨단 현대 의술로 준비되고 최첨단 의료 장비를 갖춘 최고 수준의 종합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수술을 받고 건강을 회복하기 원하지 않는가. 이처럼 우리 앞날의 신앙생활이 지금부터 건축이 마무리 되어가는 새로운 예배당에서 이 같은 영혼육의 온전한 치유와 회복과 감격과 감사와 기쁨과 즐거움을 선물로 받아 누리며 죄 용서 받은 성도의 기쁨과 감사를 온 천하 만방에 전파하는 선한 청지기요 복음의 증인의 삶을 계속하여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어느 전도자가 길거리에서 전도하고 있었다. 그는 죄의 심각성과 하나님이 심판과 형벌 그리고 죄 사함의 은총과 축복에 대하여 전도하였다. 그 때에 누군가가 곁에 다가와서 물었다. “그 죄의 무게가 도대체 얼마나 무겁소? 50킬로그램이요 100킬로그램이요.” 그때 전도자가 대답하기를 “죽은 사람에게는 100킬로그램의 무거운 돌을 얹어 놓아도 무게를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오늘 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와 악의 무게를 느끼는 자란 하나님 앞에서 거듭 난 자요 살아있는 자입니다. 산 자만이 죄와 악의 무게를 느낄 수 있는 법입니다.”하고 전도하였다. 그렇다. 하나님 안에서 거듭나고 구원 받은 증거는 솜털 같은 죄의 무게도 민감하고 무겁게 느끼는 자들이다. 새털같이 가벼운 죄의 무게도 무겁게 느끼고 회개하며 자복하며 주의 용서를 구하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초청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죄 용서 받은 자의 기쁨과 감사와 소망을 회복한 성도다운 삶을 살아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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