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에 공유 트위터에 공유 구글플러스에 공유 카카오스토리에 공유 밴드에 공유
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하나님의 사람(행13:22-23) 20180909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으로 보내기
  • 밴드로 보내기
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8-09-09 14:00 조회 13,892 댓글 0
 
                       하나님의 사람(행13:22-23)         2018. 9. 9
   
  
성경에 소개 된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놀랍다. 그 어느 사람도 이런 평가를 받은 적이 없다. 사무엘상 13장 14절에 보면 다윗은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신구약 성경에는 다윗의 이름이 800번 이상 나온다. 그 만큼 하나님께 있어서 다윗은 비중이 큰 사람이었다.  

우리가 다윗을 부러워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삼으셨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40년씩이나 왕이었기 때문도 아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사울의 대를 이을 왕으로 세우셨다. 다윗은 하나님이 마음에 맞아 하시는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려는 뜻을 이루셨다. 

우리는 나보다 지위가 높고 권세가 있는 그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만 해도 양 어깨에 힘이 들어 갈 수 있다. 한 동안 권력자의 그 은혜를 입을 수 있다. 왕조시대에는 임금의 은혜를 입으면 ‘폐하(陛下)! 성은(聖恩)이 망극(罔極)하오이다.’하며 왕의 곁에서 그 권력의 꿀물을 빨아 마셨다. 그러나 이 세상 그 어떤 왕의 권력도 영원한 권력은 없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선교 일행들과 함께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하였다. 마침 안식일이 되어서 회당에 들어가 앉았다. 회당의 예배자들은 율법과 선자자들의 말씀을 읽었다. 그 때에 회당장들이 바울 일행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바울이 나서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 생활과 가나안에서의 사사 생활을 거치던 중에 왕을 구한 역사를 언급하였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출애굽이 가능했던 것은 하나님이 저들을 택하셨기 때문이라고 강조하였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나그네 되어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높여 주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큰 권능으로 430년 동안 노예 생활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다. 그러나 40년간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과 탄식은 끝이 없었다. 하나님은 그런 저들의 소행을 참고 참으셨다.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멸한 것은 여호수아나 이스라엘 군대가 강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이기게 해 주신 것이다. 그 후에 사무엘 선지자 때 까지 사사를 세우셔서 통치하셨다. 그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을 구하였다. 하나님은 베냐민 지파의 기스의 아들인 사울을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우셨다. 그러나 사울 왕의 나중은 형편없었다. 처음에는 수줍어 할 정도로 겸손하던 사울인데 그의 말년에는 교만이 하늘을 찔렀다. 사울 왕은 사무엘 선지자를 함부로 대하였다. 하나님은 사울을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다. 하나님은 40년 동안 왕으로 있던 사울을 왕의 자리에서 폐하시고 새로운 왕을 세웠다. 그가 다윗이다. 하나님이 존귀하게 쓰신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대하는 중에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왕으로 세움 받은 사람 다윗.
베들레헴의 시골 양치기 소년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스데반 집사는 사도행전 7장의 설교 말씀 중에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고 설명하였다.(행7:46) 베드로는 성령 받은 사도행전 2장 설교에서 다윗을 선지자라고 강조하였다. 그렇다. 다윗은 하나님이 성경의 기록자요 선지자요 왕으로 불러 쓰신 사람이다. 

오늘 날로 하면 지구상의 200개가 넘는 나라에 나라마다 통치자가 있다. 왕, 대통령, 총통, 주석 등등 호칭만 다를 뿐 서로 다른 임기의 권력을 누린다. 그러나 다윗은 무언가 달랐다.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세운 것은 다른 백성들보다 더 좋은 옷 입고 더 귀한 음식 먹고 더 누리며 호의호식 하며 살라고 세우신 것이 아니다. 사시시대를 거치고 사울 왕 때를 지내는 중에 점점 하나님 신앙에서 멀어져만 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을 좀 더 잘 믿는 백성들로 이끌라는 기대에서 였다. 

본문 22절에 보면 “폐하시고....세우시고”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 세상에는 수 십 만 가지의 직업이 있다. 개인의 역량과 재주와 능력에 따라서 별의 별 직업이 다 많다. 그 모든 직업은 생업으로, 생계 수단으로 하는 이들이 대개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청지기로 부르시고 그 일을 맡기신 것이다. 

우리가 흔히 듣는 예화가 있다.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하는 현장에 어느 추기경이 나서서 석공들을 격려하며 다녔다. 추기경이 대리석을 다듬고 대리석으로 성당을 건축하고 있는 몇 사람의 석공들에게 물었다.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 때 석공들의 입에서 나오는 대답이 몇 가지로 나뉘었다. 어떤 이들은 “보면 모르세요. 제가 할 줄 아는 것이 이것 밖에 없어서 이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 “예 가족들을 먹여 살리려고 이 수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석공의 대답은 좀 달랐다. “예 추기경님 저는 지금 보시다시피 하나님께 예배드릴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고 있습니다.”

어떤가. 요즘 당신의 일상생활은 어떠한가. 요즘 무슨 분야에서 무슨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요즘 무슨 새로운 일자리를 찾고 있는가. 부자인가 아니면 가난한가. 수입이 괜찮은가 아니면 벌이가 변변치 못한가. 직업이 만족스러운가 아니면 불만투성이인가.

우리는 어린 시절과 젊은 날부터 평생토록 분명하게 자신에게 물어 보어야 할 질문이 있다. 지금 내가 하는 일과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하나님이 세워주시고 맡겨 주신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한 질문 앞에 “그렇다.”라는 대답이 가능하다면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리, 하나님이 맡겨 주신 일답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잘 감당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요즘은 문전옥답에 농사하고 채소 심어 가꾸며 가족이 그럭 저럭 먹고 살아가는 농경사회가 아니기에 직업마다 분야 마다 무한경쟁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언론에 계속하여 거론되던 모 TV방송사의 메인 뉴스 여성 아나운서를 지낸 배현진(1983-)아나운서는 그 자리에 뽑히기 위해서 7번 떨어지고 8번 도전해서 1,926대 1의 경쟁의 문을 통과하였다고 한다. 

요즘 세상은 실력만 있다고 다 되는 세상이 아니다. 이는 과거에나 오늘 날에나 다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세워 주셔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것을 운이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인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모세 시대에 모세만한 인물이 없었겠나. 그러나 하나님은 미디안 광야에서 양떼를 몰며 늙어 가던 80세의 모세를 세우셔서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성공적으로 이룩하셨다. 하나님이 모세를 택하여 이스라엘을 이끌 지도자로 세우신 것이다. 

폐하시고 세우시는 권세가 주님의 손 안에 있다. 시편 89편 21절에 보면 다윗에 대하여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 중에 “내 손이 그와 함께 하여 견고하게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라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은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젊은이 중에서 다윗을 찾아내어 연단하셔서 왕으로 세우셨다. 시편 89편 20절에 보면,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내어 나의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도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오늘 날 내가 몸담고 살아가는 가정에서 그런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내 직장, 내 일터, 내 교회 생활 중에 이런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경기도 가평군은 경기도의 강원도라고 할 만큼 산이 깊고 푸르고 아름답다. 수도권의 청정 지역 중의 한 곳이다. 북한강 식수원 보호 지역이어서 그 어떤 산업 시설도 허가가 되지 않는 곳이다. 전국의 잣 생산량은 750톤 정도인데 그중 가평군의 잣 생산량은 330톤 정도로 전국 총 생산량의 44%를 차지한다. 

잣나무는 소나무와 다르게 그 향이 짙고 푸르름이 또 다르다. 잣나무는 절개의 표상이다. 잣은 예로부터 귀한 식품으로서 여겨왔다. 기운이 없을 때나 입맛을 잃었을 때 잣죽을 먹으면 기운이 나고 입맛을 찾게 한다고 해서 노약자나 환자에게 좋은 고단백 영양 식품으로 전해져 왔다.

잣나무 산악지역의 토심이 깊고 비옥한 곳의 안개가 자주 끼는 산골이나 계곡부에서 잘 자라난다. 가평군 지역을 감싸고 흐르는 북한강 및 많은 하천과 계곡으로 인해서 늘 안개가 자주 끼고 비옥한 산악지역이기 때문에 잣 생산의 최적지로 자리 잡게 되었고 최고 극상품의 잣 생산지가 된 것이다. 

잣은 옛날부터 기호식품으로 널리 이용되어 왔다. 과자류, 식혜, 수정과 등 각종요리에 쓰였다. 서 너 알을 차에 띄우면 맛과 멋을 더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잣죽을 끓여서 어르신들을 봉양하여 왔다. 어린이의 이유식과 환자의 회복식으로 널리 애용되고 있는 우리나라 최고의 전통 자연식품이다.

나는 우리 교회가 그런 곳이 되길 바란다. 하나님이 이곳에서 하나님의 필요를 따라서 그 시대마다 각 분야에 세우실 사람을 택하여 쓰실 만한 그런 신앙생활의 토양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에서와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태 중에서 쌍둥이로 자라나서 태어났다. 야곱이 먼저 태어 날 줄 알았으나 나오던 야곱은 태중으로 다시 들어가고 에서가 먼저 태어남으로 에서가 장남이 되었다. 동생 야곱은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났다. 그러나 에서와 야곱의 생애는 너무나 달랐다. 하나님은 동생 야곱을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대를 잇는 언약의 조상으로 세워 쓰셨다. 말라기 1장 2-3절에 보면,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폐하기도 하시고 세우시기도 하시는 주님이시다. 내가 발버둥치고 내가 노력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범사에 하나님이 세워 주셔야만 한다. 하나님 안에서 존귀하게 세움 받는 축복의 주인공들이 다 되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시작도 중요하지만 나중이 더 중요하다. 용두사미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아무리 하나님이 택하시고 하나님이 구별하여 세우셨어도 내 몫은 내가 담당하여야 한다.

사울 왕도 하나님이 세우셨고 다윗 왕도 하나님이 세우셨다. 그러나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삼하3:1)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통해서 그 시대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에게 함께 하시는 영이시다. 사무엘하 5장 10절에 보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이 폐하신 왕 사울 왕가가 무너진 후에 하나님은 다윗을 존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택하여 쓰셨다. 하나님은 다윗을 마음에 맞아 하셨다. 그렇지 않나. 사업을 하는가. 내 휘하의 임직원들이 내 마음에 맞기를 원하지 않겠는가. 사사 건건 불평불만만 늘어놓고 업무 수행 능력은 시원치 않으면서 대접받으려고만 한다면 사장의 마음, 회장의 마음, 주인의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사람과 사람의 일도 그러하거늘 사람의 생각과 느낌과 판단과 범사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려 하실 때에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길 원하시지 않겠는가. 

다윗은 왕이 된 후에 헤브론에서 칠년 육 개월 동안 왕으로 지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에서 삼십삼 년 동안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예루살렘 성으로 왕의 자리를 옮기려 하자 그 곳에서 살고 있던 원주민들인 여부스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반대하였다. “다윗이 결코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고 말하며 다윗 왕의 예루살렘 천도를 반대하였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사무엘 하 5장 7절에 보면 다윗 왕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빼앗았고 ‘다윗 성’이라고 이름하게 되었다. 

다윗은 사십년 동안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리는 왕이었다. 그러나 그의 시편 고백인 시편 23편에 보면 평소에 하나님 앞에서 왕으로서의 다윗의 마음가짐이 어떠하였나를 알게 하는 말씀을 우리가 알지 않는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편 27편 1절에 보면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라고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남자 여자 어른 아이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12제자들을 부르셨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가롯 유다는 잘못되고 말았다. 물론 베드로도 예수를 모른다고 하고 부인하고 배반하고 저주하고 도망가서 숨어 지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가롯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베드로는 회개하여야 할 때 회개하였다. 베드로는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밖으로 뛰쳐나가 통곡하며 회개하였다. 물론 그리고도 여전히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예수를 버리고 도망가서 숨어 지냈다. 그러나 베드로는 우여곡절 뒤에 진정으로 회개하고 기도하고 성령 받고 초대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우리 교회도 보면 지난 8년 동안 들고 난 이들을 다 합하면 지금의 세배는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우리교회만이 시대적인 대답은 아니지만 들며 난 이들의 면면을 보면 지금의 우리들, 오늘 날의 우리들은 이 시대에 우리 각 사람을 새로운 꿈의 공동체인 “예수사랑교회”의 일원이 되도록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들로 택하여 세우신 성도들임이 분명하다. 
내가 하나님을 좋아하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좋지만 하나님이 나를 마음에 맞아하시는 것이어야 한다.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는 개역 개정 성경의 표현을 옛 성경인 <개역한글성경>에 보면 “내 마음에 합(合)한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어떤가. 여러분. 결혼이란 것도 상대편 배우자가 내 마음에 맞기 때문에 사귀고 결혼하여 살 수 있는 게 아닌가. 살아가면서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은 상대방이 바뀌거나 변한 것인가. 아니다 상대방에 대한 나의 기대가 변하고 나의 태도가 바뀐 것이지 상대방은 원래 그 모습 그대로이다. 내가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의 모습을 냉정하게 관찰하고 질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과연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미국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 과정을 공부할 때였다. 실천 신학 과목 중에 “목회자 후보 심리 테스트”항목 수 백 가지를 대하며 일일이 답한 적이 있다. 물론 이것은 심리학 분야에서는 모든 분야 모든 직종의 그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문제들일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300가지 혹은 500가지 정도의 문항을 가지고 나에게 질문해 오신다면 일일이 솔직하게 대답하여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심리 상태나 마음가짐과 매사를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신다. 내가 나를 속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이번의 이 문제만큼은 모르는 척 하고 눈 감아 주라고 요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너무나도 잘 아신다. 

시편 139편 1-4절에 보면 다윗의 고백 중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어떤가. 이쯤이면 하나님이 왜 다윗을 마음에 맞아 하시는 지 알 수 있지 않나. 나의 생각, 나의 입의 말, 나의 시간 사용, 나의 재물 사용, 나의 돈 사용, 나의 취미, 나의 관심, 나의 출입과 범사에 “나의 그 모든 것이 과연 하나님의 마음에 맞아하시는 사람의 일상인가”를 질문하고 하나님 편에서 대답을 찾아 가는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룰 사람.
다윗의 위대함은 다윗 자신의 통치 능력이나 군사력이나 외교적인 힘이 아니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조가 되었다는 점이다. 생각하여 보라. 우리가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일상이 그냥 그렇게 살다가 끝나는 생이라면 백년을 살고 천년을 산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창세기의 무드셀라는 969세를 살았다. 31년이 부족한 천년을 살았다. 사람이 무드셀라처럼 천여 년을 산다한들 나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며 살아간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지 않나. 우리 중에 연세가 70 아니 80 아니 90을 바라보는 어른들은 생각하여 보라. 나의 청춘이 다 어디로 갔는가. 나의 젊은 날이 다 어디로 갔는가. 그래서 동양의 시조 시인은 인생을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고 묘사하였다. 일장춘몽이 무엇인가. 인생이 아무리 잘나고 뛰어나고 대단한 것 같고 명예와 인기와 권력이 하늘을 찌르는 것 같아도 부귀공명이 다 헛된 꿈처럼 지나가고 만다는 말이다. 

사울왕도 40년 동안 왕이었다. 다윗도 40년, 솔로몬도 40년 왕이었다. 솔로몬은 20살에 왕이 되어 60에 죽었다. 이스라엘 나라는 솔로몬을 끝으로 남북으로 나누어졌다. 북 왕국에는 애굽에 피신하여 지내던 여로보암이 귀국하여 10지파를 중심으로 북왕조 이스라엘을 세웠다. 남 왕국 유다는 2지파만 남아서 다윗 왕조의 명맥을 계승하였다. 

므낫세 왕은 사울, 다윗, 솔로몬 이후 나뉜 나라인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에서 55년 동안 왕으로 있던 가장 오랜 기간의 왕이었다. 남 왕국 유다의 14대 임금이었던 므낫세는 12살에 왕이 되어 67살에 이 세상을 떠나기 까지 왕이었다. 그는 젊은 날 한창 때에 하나님을 거역하였던 왕이었다. 여호와의 성전 뜰에다가 일월성신을 섬기는 제단을 쌓았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왕자들이 불 가운데로 뛰어 지나가도록 하였다. “점을 치며 사술과 요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였다.”(대하33:6) 뿐만 아니라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목상을 하나님의 전에 세웠다. 역대하 33장 9절은 므낫세 당시의 타락상을 고발하였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이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모든 나라보다 더욱 심하였더라.” 결국 회개하지 않고 계속하여 악을 행하던 므낫세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였다. 하나님은 앗수르의 군대 지휘관들을 유다 땅에 보내셨다. 앗수르의 군대는 므낫세 왕을 사로잡아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다의 임금 므낫세가 그 끌려간 땅에서 하나님께 회개하며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겸손하게 낮아져서 기도하는 므낫세의 회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를 예루살렘으로 되 돌이키셔서 왕위에 다시 앉게 하셨다. 성경은 말씀하였다.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대하33:13) 므낫세는 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여호와의 성전에서 우상을 제거하고 이방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 므낫세는 나중에 “여호와의 제단을 보수하고 화목제와 감사제를 그 제단 위에 드리고 유다를 명령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고 백성들에게 명령하였다. 그제서야 백성들도 나서서 왕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를 섬기기 시작하였다. 

다윗의 16대 손인 므낫세 왕의 치정기는 하나님 보시기에 최악이었다. 아버지였던 선대의 왕 히스기야는 29년간 통치하며 다윗처럼 하나님 마음에 맞는 왕으로 지냈다. 예루살렘 성전을 청소하고 제사 신앙을 회복하였다. 이사야의 기도를 앞장세워 앗수르의 산헤립의 침략을 물리쳤다. 그러나 아들 므낫세는 너무나도 아버지 히스기야와 달랐다. 므낫세는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난 대표적인 임금이었다. 므낫세의 아들 아몬은 22살에 왕이 되었으나 아버지 므낫세처럼 타락한 우상숭배를 이어 갔다. 아몬 왕은 왕이 된지 2년 만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보복과 피 흘림 가운데 불행한 격동기에 세워진 다음 왕은 여덟 살짜리 임금 요시야였다. 유다는 8살짜리 왕자를 왕으로 책봉하였다. 요시야는 주전 640-609년까지 31년 동안 임금으로 있었다. 요시야는 어린 나이에 임금의 자리에 세워 졌으나 소년기를 지내고 청년기를 맞으면서 아버지 아몬이나 할아버지 므낫세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요시야 왕은 26살 되던 때에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에 힘썼다. 제사장 힐기야를 통해서 발견한 율법 책을 임금과 모든 국민이 읽기 시작하면서 민족적인 회개와 부흥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신앙이 무엇인가. 당신의 요즘 신앙생활의 현주소는 어떤가. 여전히 내 생각, 내 주장, 내 고집, 내 경험, 내 습관, 내 신념, 내 아집 가운데 갇혀서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아니한가. 
주님께로 돌아간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25년을 사랑의 교회를 다니면서도 한 결 같이 변화 되지 않는 그 어떤 교인에 대하여 안타깝게 말하는 것을 들어 보았다. 그렇게 많은 성도들이 제자의 삶을 살고자 씨름하고 변화 받고 헌신하고 충성되게 살아가는데 그가 아는 어느 교인은 25년 동안 교회를 떠나는 것도 아닌데 늘 교회에 오긴 오는데 전혀 변화가 없이 교회에 들락날락하는 한결 같은 모습이 너무나 의아하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는 옥한흠 목사의 그 목회 경험담을 접하면서 우리 교회도 9년이 다 되어 오도록 9년, 8년, 7년 혹은 새 예배당 생활 이후에 3년, 4년, 5년 세월이 지나도록 한 결 같이 변화되지 않는 이들을 더러 대할 때에 저들도 혹시 20년 25년 그런 기록을 보유하게 되지나 않을까하고 염려하게 된다. 

자신에게 물어 보라. 나에게 주어진 시간, 재물, 돈, 재주, 은사, 능력, 실력, 경험 그 무엇이든지 세상으로, 세속으로만 향하지 말고 주를 향한 변화와 헌신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건 어린이, 청소년, 청년, 어른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다. 

세상의 것들로부터 자신을 비우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를 줄 알아야 한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 고백 위에 임한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을 가슴에 품고 살아갔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약속하셨다. 다윗의 후손에게서 세상을 구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실 것을 예언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다윗처럼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고 권면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고 하셨다. 어떠한가. 내게 주어진 하루 하루 시간, 내게 소득으로 벌어들이게 하신 한 달의 소득, 생각하고 돌아보면 내게 주어진 그 많은 다양한 축복과 은사들 그 모든 것들 앞에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길이 무엇이라고 여겨지는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내게 주어진 시간을 믿음 안에서 어떻게 쓰며 살아가야 할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나에게 소득으로 주어진 수입 중에서 하나님의 분깃을 어떻게 취급하며 살아가야 할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나라면 나에게 있어서 예배란 무엇이고 교회란 어떤 곳이며 성도의 교제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옳게 살지 못하면 에서처럼 언약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손자라도 그 언약의 축복을 누리지 못한다. 에서처럼 장자의 권한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기며 팥죽 한 그릇과 바꾸는 식으로 처신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다. 성도된 우리는 교회의 직분과 직임도 함부로 여기면 안 된다.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으로부터 옳게 여기심을 받게 된다. 무엇에든지 옳지 못하면 사사라도 삼손처럼 되고 만다. 임금이라도 사울 왕처럼 되고 만다. 예수님의 제자라도 가롯 사람 유다처럼 되고 만다.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의 잣대로 재고, 하나님의 말씀의 저울로 달아서 옳아야 한다. 시간 사용, 재물 사용, 힘의 사용, 은사와 재주와 역량과 경험과 살아오면서 쌓아온 그 모든 삶의 저력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집중할 줄 알아야 한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가는 나날을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마음에 맞아 하시던 다윗. 그는 그의 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점점 이루어져 가는 삶을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이런 은혜와 축복이 우리 각 사람에게도 임하기를 축원한다. 
아멘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지성래목사
담임목사소개
칼럼
세미나글
사역일지
출판도서소개
언론관련 글과 영상
활동사진
동영상
상담코너
사역동향

교회소개

교회연혁

주일설교

성가대찬양

교회앨범

이달의행사

행사동영상

선교지현황

섬기는분들
전체 최신글
꿈 꾸는 것 같은 날..최고관리자
"너 축복 하시려고"최고관리자
"꿈꾸는 것 같은 날..최고관리자
"내 주 예수 주신 ..최고관리자
"내 주 예수 주신 ..최고관리자
염려와 감사(마6:2..최고관리자
"감사해"최고관리자
"바울의 소식"최고관리자
"염려와 감사"최고관리자
"누군가 널 위해 기..최고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