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히:1-12) 2019. 3. 10 사순절 제 1주
우리 민족은 불교, 유교 등의 영향을 받아 오기도 했지만 바탕에는 무속 신앙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은평 뉴타운 지역은 예전 주소로는 진관동이다. 우물골 지역을 지나다 보면 아파트 숲에 보존된 300여평이 넘어 보이는 널따란 뜰에 지어진 전통 기와 건물 세 동이 담장 안에 보존되어 있다. 1880년대에 지어진 기와집인데 지금은 ‘샤머니즘 박물관’이란 간판이 붙어 있다.
과거에는 굿을 하던 당집이었다. 지금은 국가민속문화재 건물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원 이름은 금성당(錦城堂)이다. 금은방 이름이 아니고 굿하던 곳이다. ‘금성’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은 ‘금성대군’을 주신(主神)으로 모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1457)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의 여섯째아들이다. 조선 제 6대 임금이었던 단종의 숙부인 동시에 제 7대 임금 세조의 아우이기도 하다. 소위 수양대군이라고 부르는 세조가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단종은 충북 영월로 유배 되었고 그곳에서 사약을 받고 숨졌다.
세종의 대를 이은 아들 문종은 왕위 2년 3개월 만에 숨졌다. 문종은 세종이 낳은 18명의 왕자들 중의 장남이다. 문종이 죽자 그 때 12살이던 왕자 단종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단종은 그의 어머니 현덕 왕후 권씨가 그를 낳은 지 사흘 만에 숨졌다. 단종은 할아버지인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의 손에서 자라났다. 그런 그가 어린 나의 12살에 왕위에 오르자 일 년 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서 권력이 장악되고 말았다. 수양대군은 문종의 아우이다.
그런 와중에서 단종이 왕위의 정통성을 이어가야 한다고 여기던 수양대군의 아우인 금성대군이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32살에 경상도 순흥의 유배지에서 처형되었다. 금성당은 금성대군의 충의를 기려 대동놀이가 매년 치러졌던 곳이다. 무속신앙에서는 그를 영험한 신으로 모시고 전국적으로 마을 곳곳 금성당을 짓고 당굿을 행했다고 한다.
우리 민족이 이처럼 처처에서 무속 신앙에 젖어 살던 가운데 기독교의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오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진리와 구원의 복음을 영접한 신앙으로 살아가게 된 것은 크나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오늘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된다. 히브리서 5장의 후반부에 나오는 내용에 바탕을 둔 가르침을 계속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5장 후반부에 보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오신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내용이 이것이다. 공동번역 성경으로 읽으면 히브리서 5장 12-14절은 이런 내용이다.
“사실 여러분은 지금쯤 선생이 되었어야 할 터인데도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초적인 원리를 다시 배워야 할 형편에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젖을 먹어야 할 사람이 되었습니다. 젖을 먹는 사람은 아직도 어린 아이라서 의의 말씀에 익숙지 못합니다.그러나 어른이 되면 단단한 음식도 먹게 됩니다. 성인은 지각을 사용하여 계속 훈련함으로써 선과 악을 분별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소개된 말씀이 히브리서 6장의 본문이다. ‘그러므로’라고 시작되었다. 무슨 내용을 계속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초보(初步)를 버리고 완전(完全)한 데로 나아가라.
그 동안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만큼 믿는다고 하며 신앙생활을 해 왔다면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려야 한다”는 강조가 그 첫 내용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이다.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의 초보를 버려야 할지는 그 내용이 구체적이다.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라는 말씀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타락한 인간의 죄악된 행실을 버리고 회개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의 삶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를 회개하는 일과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세례와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기초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한다는 강조이다. ‘완전한 데로’라는 말씀을 공동번역에서는 ‘성숙한 데로’라고 말씀하였다.
영어 성경, NIV에 보면 ‘elementary teaching'의 상태를 버리고 ‘maturity'한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어린 아이의 상태, 초보의 상태를 벗어나서 완전하고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강조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어떤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잘 안다. 그 믿음의 성숙과 완전을 향하여 날마다 믿음의 진보를 보이라는 강조이다.
미국 제 35대 대통령 존 에프 케네디(John F. Kennedy, 1917-1963)는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44살에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한 유명한 연설문이 미국 처처에 새겨져 있다.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당신의 조국이 당신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지 말고
당신이 당신의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으라
20년 전에 우리 가족이 미국 필라델피아에 살던 때에 이웃 주인 뉴져지의 바닷가에 놀러 간 적이 있다. 소문에 듣고 꽃게를 잡으러 갔다. 철물점에서 꽃게를 잡는 철제 상자를 몇 개 사고 식품점에서 닭다리를 미끼로 샀다. 아틀란틱 시티 바닷가의 한 편에 케네디의 취임 연설문이 돌비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때 기억한 연설문이다.
미숙한 국민은 나라가 자신에게 무엇도 해 주고 무엇도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그러나 성숙한 국민은 자신이 속한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자신이 어느 분야에서 어떤 역할을 하며 훌륭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염두에 두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에게 물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당신의 교회가 당신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지 말고
당신이 당신의 교회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으라
Ask not what your church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hurch
4-6절의 내용이 무엇인가.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한다고 자처하던 그 누군가가 그 귀한 믿음을 유지하지 못하고 타락해 버린다면 두 번 다시 회개할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는 경고의 말씀이다. 그런 자들은 마치도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부끄러운 행위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므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오늘, 지금 나에게 주어진 믿음을 굳건하게 붙들고 살아가는 완전하고 성숙한 믿음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저주(詛呪)를 떠나 하나님께 복(福)을 받으라.
생각해 보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죄 사함을 받았다. 거듭났다. 구원 받았다. 이 모든 영적 현실이 얼마다 귀하고 감격스러운 것인가. 그런데 우리의 영혼의 밭에 가시와 엉겅퀴가 자라고 버림을 받은 땅이 되어서 그 가시와 엉겅퀴가 뽑혀 불사름을 당하는 형편이 된다면 이는 얼마나 불행한 것이며 저주스러운 일인가.
7절의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라는 말씀은 설명이 필요 없는 말씀이 아닌가. 그렇지 않나. 땅이란 우리의 마음이다.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이다. 그 비를 흡수한다는 것은 받은 은혜를 소홀히 여기지 않는 상태이다. 받은 은혜로 인해서 밭에 온갖 채소가 자라는 것은 신앙생활의 열매를 말씀하지 않나.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떠나 타락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듯한 욕된 신앙생활을 주의 하라는 말씀이다. 그 당시에는 환난과 핍박을 견디지 못해서 배교하는 경우가 있었다. 오늘날도 그러하지만 그 당시에도 이단에 빠져서 복음을 등지고 떠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이 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4-6절이다. 4-5절의 내용만 보면 얼마나 귀한가. 그렇지 않나.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여기서 ‘맛보고도’의 ‘도’자를 빼고 읽으면 얼마나 귀한가.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이렇게 읽고 나면 이것이 모두가 바라는 신앙생활의 모습이 아닌가. 이렇게 골고루 각양 은사와 은혜를 깊이 있게 체험하며 생활할 수 있다면 그게 모든 성도들이 바라고 소망하는 바가 아닌가. 그런데 그런 별의 별 은혜를 다 체험하고도 타락하고 만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타락에 대한 경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9절에서 말씀하는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는 믿음의 상태로 발전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올 봄, 사순절 기간 동안에 히브리서 말씀 묵상과 더불어 이처럼 신앙생활의 초보를 버리고 성숙하고 완전한 믿음을 향하여 나아가는 주인공들이 모두 다 되기를 축원한다.
본 받을 자를 본 받으라.
본문은 결코 두려운 마음을 갖게 하는 경고의 내용으로 끝나지 않는다. 10절에 보면 그 당시의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칭찬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성도를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 넘치는 소망과 격려와 약속을 대하게 된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이라는 오늘 말씀의 제목이 11절에 나온다. 그렇지 않나. 요즘 무슨 소원을 갖고 살아가고 있나. 요즘 새벽 마다 깨어 일어나 무슨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있나.
우리가 부르는 복음 성가 중에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런 가사의 찬양이 있지 않나. “나 주님의 기쁨”이란 복음성가이다.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것
겸손히 내 마음을 드립니다 나의 모든 것 받으소서
나의 맘 깨끗케 씻어 주사 주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다시 11-12절을 보자. 공동번역으로 읽으면 이런 말씀이다.
“우리는 여러분이 이와 같은 열심으로 희망에 대한 확신을 끝까지 간직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게으르지 말고 믿음과 인내로 약속된 것을 받는 사람들을 본받으십시오.”
무엇을 본 받기를 원하는가. 누구를 본 받기를 원하는가.
미국 작가 나다니엘 호돈(Nathaniel Hawthorne, 1804-1864)의 “큰 바위 얼굴”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다. 얼굴 모양의 큰 바위가 멀리 보이는 한 미국 마을. 주인공은 어릴 때부터 이 마을 출신으로 저 바위를 닮은 위대한 사람이 나타난다는 전설을 믿고 항상 큰 바위 얼굴을 보며 그 순간을 기다리며 신실히 살아간다. 이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마을 출신의 갑부, 장군, 정치인이 나타나는데 저마다 큰 바위 얼굴을 닮았다는 소문이 들지만 주인공만은 전혀 안 닮았다고 느낀다. 그러는 사이에 주인공은 늙게 되는데, 주인공은 어느 아름다운 시를 쓴 시인의 작품을 보고 시인을 한 번 만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시인조차도 큰 바위 얼굴과 안 닮았다는 것을 보고 실망한다. 그런데, 시인은 마을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동안 신실하게 사는 동안 명성을 차츰 얻은 주인공이야말로 큰 바위 얼굴을 닮았다고 외친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럴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언젠가 나타날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을 계속 기다린다.
이번 사순절 히브리서 묵상의 주제 성구를 12장 2절의 “예수를 바라보자.”로 정하였다. 영어 성경에 보면 “Let us fix our eyes on Jesus."라고 하였다. 예수께 시선을 고정하자는 말씀이다.
맞다. 날마다 순간마다 예수 바라보며 예수께 시선을 고정하고 살아가다 보면 내 안에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좌정하시고 나를 다스리시고 나를 이끄시고 나를 주장하시고 나를 통하여 하시려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일들이 열매 맺게 될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의 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일화가 바로 그러하지 않나. 개인, 가정, 직장, 분야, 나라, 민족 특히 교회의 역사의 중심에 서서 본 받을 자를 본 받는 성숙한 신앙의 걸음 걸음을 걸어가는 존귀한 믿음의 주인공들이 모두 다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