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예수의 말씀(요20:11-23) 2020. 3. 15
유진 피터슨은 미국교회를 대표하는 영성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우리나라에도 그의 여러 책들이 골고루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책들 중에 <부활>이란 제목의 책이 있다. 그는 부활을 부활절 하루를 기념하고 지나가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부활이 신앙생활의 중심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 부활 신앙은 일 년 내내 날마다 순간마다 기독교인 각 사람을 붙들어 주는 힘의 원천이다. 부활이 능력의 바탕이요 부활이 활력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세상의 그 어느 누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거역할 수 있는가. 개인이든, 가정이든, 어느 민족, 어느 국가이든지 이 부활 신앙에 붙들려야 한다. 부활은 만민의 영원한 소망의 이유이고 근거이다.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와 여타 종교와 큰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성경의 기록은 매우 간단하다. 왜일까. 역사적인 사실의 기록이니 길게 설명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렇지 않나. 사실이란 언제나 육하원칙에 따라서 간단히 기록하거나 말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설득시켜 보려 한다든지 허구나 만든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이해시켜 보려고 하면 긴 설명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의 기록은 군더더기가 필요 없는 것이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탄생된 것이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부활에 뿌리를 두고 있는 종교는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신앙은 단순한 종교 이상이다. 우리는 역사를 B. C와 A. D로 구분한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는 단기(檀紀)나 불기(佛紀)를 사용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서기(西紀)를 사용한다. 서기의 바탕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중심으로 한 것이다. B. C 란 ‘Before Christ’ 즉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역사를 말한다. A. D란 ‘Anno Domini’ 즉 라틴 말로 ‘그리스도의 해 이후’라는 뜻이다.
그렇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역사의 구분이 서기에 근거하는 서기력을 바탕으로 돌아가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의 주인이시다. 깨닫든지 못 깨닫든지, 받아들이든지 그렇지 못하든지 그렇다.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달아 알고 믿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이 된 것은 복 중의 복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죄와 사망을 이긴 생명의 부활이요 영생의 부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세상의 그 모든 의문과 그 모든 숙제의 대답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셨고 나중에 베드로를 비롯한 열한 사도에게 보이셨다. 그 후로 수많은 성도들에게 보이시다가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셨다. 승천(昇天)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처럼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이다.(고전15:20-22)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부활 신앙은 우리 믿음의 바탕이요 기초다. 이 부활 신앙에 붙들리기 시작하면 모든 것의 열쇠요 모든 것의 대답이 부활인 것이다. 부활 신앙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일방적인 자기 확신이 아니다.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둠 속에서 빛 가운데로 나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려서 사랑채 헛간에 달걀을 품고 있던 암탉의 품에서 3주 만에 노랑 병아리들이 탄생하는 것을 보았다. 신비하고 아름답다. 생각하여 보라. 병아리의 생명이 달걀껍질 속에 갇혀 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여 보라. 그런데 그렇게 자라난 생명이 껍질을 깨트리고 나와서 “병아리 떼 쫑쫑쫑”하고 어미 닭을 따라다니며 모이를 쪼아 먹고 물을 마시고 하는 장면을 보면 그림처럼 아름답다. 생명의 신비다.
수정란이 어머 품에서 3주 만에 병아리로 탄생 되는 것은 신비롭다. 그러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 신앙과 영생 신앙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은 그런 정도의 내용과 비교할 수조차 없는 억만 배의 축복이다.
수많은 신앙 선조들이 극심한 고난과 박해 가운데서도 순교자의 길을 갈 수 있었던 힘은 부활 신앙의 힘이다.
믿음의 선진들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정의와 공의의 길을 갈 수 있었던 힘은 바로 부활 신앙에 근거한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잘되고 형통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복을 받는 것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부활 신앙의 용사들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저녁 시간에 열한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어느 곳에 모여서 문을 꼭꼭 닫아걸고 숨어 있었다. 그런 그 곳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찾아가셨다. 부활하신 그 밤에 제자들을 만나서 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교훈을 다시 묵상하는 중에 은혜가 되길 바란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룩하신 업적은 그를 구주로 믿는 자들로 하여금 죄 사함을 받게 하고 영생을 선물로 받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구원의 은총을 체험한 이들에게서 경험되는 놀라운 삶의 질적 변화가 바로 평강(平康)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 삶의 구주로 영접하고 살아가면 마음에 평강이 찾아온다.
왜 그럴까. 우리가 부르는 찬송 “내 영혼이 은총 입어”라는 찬송이 있다. 그 3절 가사가 무엇인가.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누가 이런 찬송을 부르며 살아 갈 수 있는가. 그렇지 않나. 사람이 방 한 칸에서 방 두 칸, 방 두 칸에서 방 세 칸, 화장실 하나 있는 집에서 화장실 두 개 있는 집 그렇게 공간 넓혀 가는 것을 살아가는 목표로 정한다면 그러다가 나이 먹고, 그러다가 늙어 죽고 말 것이다.
예수 안에서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기 시작하면 파도처럼 밀려오는 걱정, 근심, 염려, 불안, 초조, 두려움, 좌절, 절망이 물거품처럼 다 사라지고 놀라운 평강이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게 된다.
어떻게 굶주린 사자가 달려드는 시험 앞에서도 담담히 믿음을 부인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겁게 활활 타는 풀무 불 앞에서도 평강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바탕이 무엇인가.
구약의 인물로 하면 이것이 다니엘의 믿음이며 그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믿음이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기 시작하면 마음에 그런 평강이 임하게 된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 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그 3-4절 찬송의 내용이 무엇인가.
내 영혼에 평화가 넘쳐남은 주의 큰 복을 받음이라
내가 주야로 주님과 함께 있어 내 영혼이 편히 쉬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 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이 땅 위의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있나
우리 모두가 예수를 친구 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 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영접하여 제대로 믿고 제대로 따르기 시작하면 마음에 그런 평화가 자리 잡게 된다. 강처럼 흐르는 평화, 바다 같은 사랑, 샘 솟는 기쁨이 넘쳐 나게 된다. 병들어도 평강하고 가난해도 평강하고 삶이 얽혀도 평강하고 내 뜻대로 안되어도 평강하고 밤에도 평강하고 낮에도 평강하고 언제나 평강하게 된다.
이렇게 말씀을 나누면 “아니 그게 미친 사람이지 어디 제정신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입니까”하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설명으로 이해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이것은 세상을 염세적으로 살고 포기하고 살기 때문에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상태의 허무주의자들의 모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적 세계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을 갔었다. 그처럼 배반하고 비겁하게 행동하던 예수의 제자들이 나중에 다시 돌아와서 성령 받고 위대한 역사의 사도들이 된 힘은 바로 부활 신앙이다. 부활 신앙이 성령 충만으로 이어질 때에 그 어떤 어려움과 환란과 핍박을 받는다고 하여도 평강을 빼앗기지 않는 위대한 복음 전도자들이 될 수 있는 법이다.
<예수를 위한 바보>라는 책이 있다. 데이빗 케이프(David Cape)목사가 쓴 책이다.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열방 교회를 성공적으로 섬기던 담임 목사였다. 그런 그에게 14개월 동안 계속되는 하나님의 새로운 부르심이 있었다. 목회를 내려놓고 길거리에 나아가서 사람들의 발을 씻겨주라는 부르심이었다. 처음에는 의심했으나 14개월 동안 그러한 부르심이 마음과 생각에서 떠나지 않으면서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음성 듣기에 순종하게 된 것이다. 이 단순한 사역에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순종하기 시작하였다. 길거리에 만나는 낯 설은 사람들의 발을 씻어 주는 이 사역을 통해서 수천 명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신비한 일들을 계속하여 경험하고 있다.
십자가 모양의 판 중앙에 세숫대야를 얹어서 등에 메고 물통과 수건을 준비하고 트레일러를 타고 이 곳 저 곳, 이 도시 저 도시, 이 마을 저 마을,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며 만나는 사람들의 발을 씻겨주는데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는 티셔츠에 “예수님이 씻기신 발은 행복한 발입니다”하고 써 붙이고 20년이 넘게 이 사역으로 주께로 수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는 기적을 체험하고 있다.
과거에 영국의 요한 웨슬리 목사의 때에 일어났던 그런 기적처럼 이 데이비 케이프 목사를 통하여 재현되고 있다. 조직 폭력배, 알코올 중독자, 한센 병자, 시장, 군대의 장군들과 나라의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사람들에게 치유와 회복과 변화가 일어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사건이 생기고 있다. 십자가가 달린 대야, 물통, 수건, 접 의자 등 20kg의 무게를 잔등에 지고 걷고 또 걷는다.
오늘날까지 무려 3,000km 이상의 대장정을 걷고 또 걸으며 그 누군가의 발을 씻어 주고 있다. 계속하여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부활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 가정과 가족이 그러해야 한다.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교회가 그러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란 그런 것이다. 예수 안에서 평강을 마음에 선물로 받고 복음을 깨달은 이들은 그 마음의 평강을 누군가에게 계속하여 전하고 전염되게 하는 평강의 전달자들이 되어야만 한다.
데이빗 맥캐스랜드의 책, <순종의 길>에 보면 “최근에 저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너무 좋고 놀랍습니다. 기도로 주께 나아가는 것이 이제는 말할 수 없이 즐겁고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제 영혼의 깊은 곳은 평강(平康)으로 넘쳐흐릅니다.” 이런 고백이 나온다. 이것이 예수 안에 살아가는 부활 신앙의 바탕이다. 예수 믿는 첫 증거는 마음에 평안과 고요와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강처럼 흐르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무덤 속의 결박으로부터 불러내시고 살려 주신 것처럼 부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나 자신이 두려움과 죽음의 결박으로부터 풀려 날 때에 그런 평강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죽었던 오라버니 나사로의 부활은 그의 두 누이동생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엄청나 기쁨이요 간증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우울, 낙담, 불안, 초조, 긴장, 두려움, 미움, 증오, 불평, 불만, 시기, 탄식, 수군수군, 비방, 악담, 게으름, 탐심, 탐욕, 정욕 등 이 모든 죄와 악과 죽음의 어두운 영으로부터 자유 해지는 것이 평강의 선물이며 부활의 능력인 것이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평강과 평안이 넘쳐나는 주인공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부활하신 예수께서 숨어 있던 제자들을 찾아가 만나서 하신 또 하나의 말씀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말씀이셨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 각 사람을 이 세상을 향하여 복음 전파의 사명을 받은 사명자들로 파송하기를 원하신다.
파송(派送)이 무엇인가.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는 지리적인 파송이 있다.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가는 그런 파송이 있다.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지명하여 불러서 보내시는 지목된 파송이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삭과 야곱과 요셉을 부르셔서 언약의 성취자요 사명자로 보내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부르시고 다윗을 부르시고 히스기야를 부르시고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엘리야와 엘리사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 가도록 보내신 것이다.
예수께서도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비롯한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고 나중에 사도 바울을 부르시고 보내셔서 하나님의 일을 완성해 오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 한 시대마다 성 어거스틴을 부르시고 토마스 아켐피스를 부르시고 독일의 마틴 루터와 잔 칼뱅과 영국의 요한 웨슬리와 스코틀랜드의 잔 낙스와 영국의 윌리엄 부스와 미국의 D. L. 무디와 빌리 그래함을 부르셔서 보내시고 쓰시는 것이다.
한국 역사로 하면 주기철, 손양원, 길선주, 이기풍, 김익두, 전덕기, 한경직, 김구, 안창호, 조만식, 이승훈, 유관순, 안중근, 이준, 서재필, 이승만 등 이런 인물들을 불러서 역사의 현장에 보내셔서 쓰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그런 계획과 부르심 가운데 우리들을 새로운 꿈의 공동체 삼으시고 이곳에 주의 몸된 교회가 건축되게하시고 우리들을 통해서 하시려는 주의 일을 이루어 가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은 뜻이 계시면 누구라도 제한 없이 부르시고, 어디로라도 보내시고, 어떻게라고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오실 때까지 땅끝까지 지치지 않는 이런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마음이 뜨거워지고 가슴에 사명자의 불이 활활 타오르는 그런 주인공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성령을 받으라.
성령이 대답이다. 부활이 대답인 것처럼 성령이 대답이다. 부활하신 예수님 만나보고도 숨고 피하고 별 의욕을 갖지 못하고 불안해하던 제자들을 보라.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에도 여전히 한 곳에 모여 문을 닫고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긴장된 마음으로 둘러앉아 있던 제자들을 예수께서 친히 찾아가셨다.
닫힌 마음의 문이 열리려면 성령을 받아야 한다.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이천년 동안 여전히 문화적으로 닫고, 심리적으로 닫고, 자기 고집으로 억지로 닫아걸고 있는 문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모든 문들이 ‘에바다!’ 하고 열리는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 그 닫힌 문은 가족의 마음일 수도 있고, 직장 동료나 세상 친구나 그 누구 일수 있다. 내 남편의 마음, 내 아내의 마음, 내가 낳은 자식들의 마음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각 사람이 성령 받고 부활 복음이 받아 들여 지도록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역사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리차드 범브란트(Richare Wurmbrand, 1909-2001) 목사는 루마니아 공산 치하에서 14년간이나 감옥 생활을 하였다. 복음의 변질되지 않게 믿고 담대하게 믿던 보수적인 복음주의 목사였다. 그는 유대인으로 태어난 지 채 한 살도 되기 전에 부모가 다 죽고 어려서부터 왜 사는지 전혀 기쁨을 모르고 고아로 자라났다. 14살이 되었을 때에 이미 철저한 무신론자였다. 아무것도 없던 고아 출신인 저가 악착같이 돈을 벌어서 나중에 청년 사업가가 되었다. 돈이 생기니까 술집과 카바레를 드나들며 돈을 물 쓰듯이 쓰고, 사기를 치고, 술 마시고, 싸우고, 청년의 온갖 쾌락을즐길대로 다 즐기며 마음에 양심의 가책도 없이 지냈다. 그런 그가 결핵에 걸렸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인간에게 큰 해를 끼치는 악이라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마음에 불안과 초조를 떨칠 수가 없어서 어느 교회에 뛰어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앉아서 자기도 흐느껴 울면서 기도해 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아무 감동도 없고 아무 위로도 찾아오지 않았다. 날마다 교회에 찾아가 기도하려 하던 어느 날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나는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혹시 당신이 계시다면 당신을 믿는 것은 내 의무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처럼 아무것도 믿어지지 않는 나에게
당신의 존재를 나타내 보여 주시는 것이 당신의 의무입니다.”
이런 논리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런 그가 폐결핵 요양 차 루마니아의 어느 시골 마을에 찾아갔다. 그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어느 시골 목수가 그에게 신약 성경책을 건네주었다. 성경을 읽을때에 마르지 않는 눈물이 흐르고 또 흘렀다.
옛날 중국 이야기에 어느 사람이 먼 광야 길을 터덜터덜 걷다가 큰 참나무 그늘을 만나서 그 아래서 쉬면서 땀을 식히고 있었다. 그 사람이 참나무를 향해서 “얘 내가 오늘 너를 찾아내다니 내가 참 운이 좋구나.” 이렇게 말하니까 그 참나무가 대답하기를 “나는 여기서 400년 동안 한자리를 지키며 너를 기다렸단다.” 하더란다. 우리 주님은 나 한 사람의 영혼이 주께로 돌아오기를 이처럼 기다리고 또 기다리신다.
“어서 돌아 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
주 어찌 못 담당하고 못 받으시리요
주의 넓은 가슴은 하늘 보다 넓고 넓어.”
(527장 찬송)
시골 목수는 평소에 늘 이렇게 기도하며 생활하고 있었다.“하나님 제가 죽기 전에 유대인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죽게 해 주세요. 저는 늙고 병들어서 멀리에 있는 유대인을 찾아 갈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유대인 한 사람을 저에게 보내 주셔서 그에게 복음을 전하게 해 주세요.”
이 같은 중보 기도의 열매가 맺힐 날이 온 것이다. 리차드 범브란트는 그 시골 목수에게서 복음을 받아 들이고 성경책을 건네받은 후에 눈물과 감격과 변화와 회개의 나날을 보냈다. 통곡과 함께 그동안 죄 가운데서 살아오던 자기 자신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게 되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26살이었다. 그 후 그는 러시아 선교사를 꿈 꾸었다. 그러나 그의 꿈을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대로 100만명이 넘는 러시아의 점령군들이 루마니아에 쳐들어왔다. 그는 독학으로 공부하여 루터파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그는 루마니아를 떠나 본 적이 없지만 그는 그 땅에 쳐들어온 러시아 군대와 러시아 사람들에게 끝도 없이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다. 그는 나중에 보수적인 신앙으로 인해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여러 차례 감옥에 투옥되었다. 장장 14년씩 감옥에 갇혀 지내면서도 평강과 사명감과 성령 충만한 자신의 모습을 늘 유지해 나갔다. 이것이 부활 신앙의 주인공의 모습이 아닌가.
그는 그의 책, <하나님의 지하운동>(In God's Underground)에서 그가 겪은 일들을 간증한다. 그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을 받았다. 허벅다리 뼈가 떨어져 나가는 고난도 겪었다. 때리고 또 때리고 기절하면 찬물을 퍼부었다. 칼끝으로 온몸에 상처를 내서 피가 절절 흘렀다. 거꾸로 매달고 얼마나 많은 물을 호수로 부어 넣었던지 배가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공산당들이 그를 고문할 때에는 곁에 의사가 지키고 있었고 그의 맥박을 진단했다. 아직 죽일 마음은 없었다. 심문하고 고문하고 때리고 치고 죽일 것처럼 핍박해도 여전히 또 살아나고 또 다시 살아남았다.
참 이상했다. 죽을 것 같은데 죽지 않았다. 온 몸에 상처로 피를 흘리고 몹시 열이 나고 견딜 수가 없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고난을 생각했다. 그러나 별 효과는 없었다. 더 이상 며칠 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간수와 죄수들이 자기 독방을 지날 때에 십자가 성호를 그렸다. 그렇게 2년간을 독방에서 지내야 했다. 누군가가 자기를 뒤척여 주지 않으면 어찌 할 수 없는 몸의 상처가 열 군데도 넘었다. 하룻밤에 40번 이상씩 누군가가 자기 몸을 뒤척여 주었다. 가슴과 척추에서 고름이 흘러 악취가 나고 마를 날이 없었다. 거의 송장과도 같았다. 몸에 열은 높고 죽을 것 같은데 죽지도 않았다.
다시 재판이 열렸다. 간첩 행위, 제국주의 사상 유포 혐의 등을 들먹이며 재판은 10분 만에 끝났다. “ 더 할 말이 있는가?”하는 재판장의 말에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하고 대답하자 강제 노동 20년 형이 다시 언도되었다. 세월은 지났고 공산주의는 무너졌다. 1988년, 그는 미국 정부의 초청을 받고 미국 상원에서 증언했다. 1992년 광림교회에서도 간증하였다. 나는 그의 육성 간증을 들을 기회를 가졌었다. 그는 지난 2001년 93세를 일기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성령을 받아야 한다. 성령이 대답이다. 성령은 불길처럼 번져가는 힘이 있다. 내게 성령이 강력하게 임하도록 기도를 부탁한다. 동역자들 모두, 임원 모두, 성도 모두 성령 받기를 기도해야 한다. 코로나 19의 감옥에 갇혀 있지 말고 성령 받아야 한다. 성령 받은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다. 사명이 끝나야 하나님이 불러 가신다.
매달 받아 보는 오늘의 양식(Our Daily Bread)에 보면, 2011년 3월 8일, ‘작은 일들’(Small Things)라는 묵상의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보스톤 주일학교 교사 에드워드 킴벌은 디엘 무디라는 구두 직공에게 전도한다. 19세기 빌리 그레함이라는 별명을 가진 무디는 윌버 채프만에게 전도했다. 윌버 채프만은 빌리 선데이에게 함께 전도자 생활을 제안한다. 빌리 선데이는 노스 캐롤라이나의 샤롯에서 복음 집회를 연다. 그곳에서 영향을 받은 모데카이 햄의 나중 복음 설교를 들은 빌리 그래함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다. 그는 훗날 대한민국의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0만 인파에게 복음을 전하는 세계적인 전도자 빌리 그래함이 되었다.”
평강과 사명과 성령 충만한 부활 신앙의 영원한 승자가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