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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왕이 어디계시냐(마2:1-12) 2019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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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9-12-16 14:16 조회 10,009 댓글 0
 
                유대인의 왕이 어디계시냐(마2:1-12)          2019.12.15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고 한다. 사람들은 자식이 태어나면 그 아들딸들이  부유하게 살고, 유명해지고, 높아지고, 위대해지길 원한다. 고대 사회로 하면 왕이 되고 싶어 한다. 황제가 되려 한다. 현대 사회로 하면 대통령이나 수상이나 총리가 되는 국가의 정상이 되길 원한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조선의 초대 임금 태조이다. 그 둘째 아들이 정종이고 태조의 다섯째 아들이 방원 즉 태종이다. 태종의 네 아들 중에서 셋째 아들이 세종이다. 충령대군이라 불리던 세종의 본명은 이도(李祹)이다. 그렇게 27대 500년을 이어 왔다. 그러하다 보니 심지어는 딸들 중에서 어느 딸이 왕비로 간택되느냐 혹은 후궁으로라도 간택되느냐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왕을 사위로 두는 날에는 그 외척의 세도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성경으로 하면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사울 왕은 당대에 끝났다. 사울 왕 40년을 끝으로 다윗이 왕위에 오른 후에 그 아들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다윗 40년, 솔로몬 40년을 끝으로 비록 나라는 남북으로 나뉘었으나 다윗 왕의 왕권이 22대를 이어 갔다. 성경은 그 많은 왕들의 역대기를 기록하고 있다. 왕의 역사를 크게 두 표현으로 빌리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혹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라는 표현이 반복된다.

그러므로 왕이었냐 신하였느냐 고관이었느냐 평민으로 살다 죽었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여호와 보시기에 그의 삶이 어떠하였느냐는 것이다. 

복음서 중의 하나인 마태복음 2장에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소개하고 있다. 

동방으로부터 이상한 별의 이동을 따라 유대 땅 예루살렘에 도착한 동방의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계시냐”고 수소문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 사람들은 소동하고 수군거리고 소란스러워하였다. 헤롯 왕은 모든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불러 모았다. 비상소집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물었다.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그 때 기다렸다는 듯이 대제사장들과 성경을 잘 아는 서기관들이 입을 모아서 대답하였다. 서기관들이란 모세의 율법에 능통한 지식을 갖고 있는 랍비 또는 율법학자들을 말한다. 저들이 대답하였다. “유대 베들레헴입니다.”그리고는 저들이 한 결 같이 미가서 5장 2절의 예언의 말씀을 인용해서 대답하였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마2:6)

흥미로운 것은 유대인의 왕의 탄생을 묻는 동방박사들의 방문과 그 소동 가운데서 헤롯 왕이 물은 질문의 내용이다. 헤롯 왕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물었다. 이는 그 당시 유대 땅에서는 처처에서 장차 예언을 따라 태어나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궁금증이 얼마나 컸었나를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다. 분명한 것은 헤롯왕 까지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의 탄생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베들레헴에서 나신 그리스도
유대인의 왕으로 나실 이는 누구이신가.


경배 받으실 왕.
동방에서 별의 이동을 따라 먼 길을 찾아 나선 동방박사들이 우선 도착한 곳은 예루살렘이었다. 그들은“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아기께 경배하러 왔다”고 말하였다. 여기 저들이 사용한 ‘경배’라는 ‘προσκυνεω’(프로스쿠네오)라는 말은 하나님과 예수께만 사용된 단어이다. 그 의미는 ‘복종하다’라는 뜻이다. 엎드려 절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향하여’라는 ‘프로스’와 ‘반려견’을 뜻하는 ‘쿠네오’의 합성어이다. 집안에서 키우는 반려견이 주인의 식탁에 납작하게 엎드려서 주인에게 마음을 고정하고 집중하며 주인의 손에 입 맞추는 그런 태도이다. 

그 당시 동방사람들의 인사 법 중에는 상대방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어서 무릎을 꿇고 상대방에게 경의를 표하는 인사법이 있었다. 그런 인사를 드리려고 찾아 왔다고 말한 것이다. 
생각하여 보라. 이 땅에 그런 경배를 받을 만한 왕이 동서고금에 누가 있는가. 이 세상 왕들 중에는 그렇게 존경받고 추앙받고 경배 받을 만한 왕이란 없다. 예수께서 탄생할 당시의 왕은 헤롯이었다. 이 헤롯은 그 당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주전 20년에 시작하여 제 3성전인 헤롯 성전을 건축한 장본인이다. 그는 야곱의 형인 에서의 후손으로 이두메 사람인 안티파스 2세의 아들로서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는 예수 탄생의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 근동의 두 살 미만의 사내아이들 모조리 학살하였다. 만약에 왕이 태어난 것이 사실이라면 세월이 지나면 자기의 왕가에 전통을 계승하는데 위협이 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들은 잘 알지 않나. 인간의 권력을 향한 욕망이란 것은 대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필요하면 아들이라도 죽이고 아버지라도 대적한다. 다윗왕의 아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 왕이 왕위에 있을 때에 아버지를 왕위에서 몰아내고 왕위를 계승해 보려다가 불행하게 그 생을 마치지 않았나.

러시아 서부의 발트 해변에 간척사업으로 유럽풍의 거대한 신 도시를 건설한 표트르 1세 알렉세예비치(1672~ 1725)는 그를 대적하는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1703년에 시작하여 바닷가의 황량한 불모지에 도시를 건설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표트르는 옛 수도 모스크바를 벗어나 서구 유럽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화려한 수도를 건설하기를 원하였다. 수 많은 인명과 물자의 손실을 감수하면서 수도 건설을 감행하였다. 토목 공사에 지친 민중들의 마음이 사나워지자 반란이 일어났다. 표트르는 비밀경찰을 통해 많은 반대자들을 처형하기 시작하였다. 반란에 가담한 자들 중에는 표트르 황제의 외아들 알렉세이 페트로비치(1690-1718) 황태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황태자는 아버지 표트르 황제가 러시아의 정신을 서유럽에 팔아넘긴다고 생각해 암살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음모가 발각되자 빈을 거쳐 나폴리로 망명했다. 하지만 표트르가 보낸 사신의 거짓말에 속아 귀국하였다. 결국은 재판을 받고 황태자직을 박탈당한 후에 옥에 갇혀 지내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옥중에서 28살에 죽고 말았다.

그 당시 표트르 대제의 업적으로 세워진 세인트 피터스버그에 가 보면 그 치적이 엄청나다. 오늘 날의 토목 공사와 건축술로 건설한다고 해도 상상이 잘 가지 않는 화려하고 거대한 해변 시도시의 건축이었다. 그러나 과거나 오늘 날이나 권력자들의 권력욕과 그 집착이란 대신할 자가 없다. 
그렇지 않나. 누가 누구를 존경하고 누가 누구에게 경배할 수 있나. 아무리 대단한 권력자와 권세자라도 그 면전에서 굽신굽신하지 돌아서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수군대는 것이 역사가 아닌가. 세상 권력은 당리당략을 따라 나누이고 찢겨서 하나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셔서 영원히 경배 받으실 한 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천년이 가고 또 다시 천년 세월이 가고 또 천년이 흘러가도 경배 받고 또 경배 받으며 영원히 경배 받으실 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여러 화가들의 작품이 있지만 렘브란트의 그림 중에 <동방박사들의 경배>라는 그림이 있다. 무릎을 꿇고 아기 예수 앞에 절하며 경배하는 장면이다. 

10절과 11절에 보면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며 베들레헴에 도착하였다. 동방 박사들이 말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 앞에서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였다. 보배 합을 열어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황금(黃金)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왕권을 상징한다. 유향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미한다. 유향은 사람에게 바칠 수 없었다. 유향은 오직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에만 쓸 수 있었다. 출애굽기, 레위기, 아가서, 역대상 등을 공부해 보면 유향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드리는 유일하고 거룩한 향이다. 하나님은 유향을 ‘나의 향’이라고 말씀하셨다. 몰약(沒藥)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는 상징적인 예물이었다. 기독교 사전에 보면 “황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되심을, 유향은 하나님되심을, 몰약은 참 인간이심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렇다. 예수는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다. 그는 육체의 온갖 고난과 죽임 당하심을 통하여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구주이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경배 받으실 영원한 평강의 왕이시다.



다스리시는 왕.
미가서 5장 2절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다스리는 자로 이 땅에 오신 왕이시다. 이는 사무엘하 5장 2절에 말씀하신 다윗을 왕으로 기름 부어 구별하실 때에 다윗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의 성취이다. 하나님은 다윗에게“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고 약속하셨다. 

주권자가 된다. 다스리는 자가 된다는 말은 백성들 위에 군림한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국어 사전에 찾아 보면  ‘다스리다’라는 뜻은 “1.보살펴 이끌거나 관리하다 2.일정한 목적에 따라 다루거나 돌보다 3.가다듬거나 다잡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예로 여성들이 얼굴에 화장하는 것을 우리 말로‘다스린다.’고 표현한다.

그렇지 않나. 왕의 통치란 온 나라의 백성들이 남자 여자 어른 노인 어린이  누구나 다 골고루 편안하고 평안하고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돌봐야 한다. 나라의 구석구석을 안정되게 보살피고 질서 있게 가다듬을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나. 그 누군가는 7년 동안 통치자를 지냈는데 재산이 29만원 밖에 없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가까운 주변 사람들 불러 모아 놓고 한 끼에 한 사람당 20만 원짜리 고급 음식을 먹으며 지내면 그 누가 그런 통치자를 존경하며 귀하게 여기겠나. 

다스리는 왕이란 현직 때에도 그러하고 물러난 후에도 그러하고 영원히 그러해야 다스리는 왕으로서 경배 받는 것이 아닌가. 

왜 예수는 경배 받으시는 왕이시며 다스리시는 왕이신가. 예수의 다스림은 칼과 창과 활을 동원한 다스림이 아니었다. 예수는 사랑으로 다스렸고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다스리셨다. 예수는 어린아이를 통해서 천국을 가르쳐 주실 정도로 지혜롭게 다스리셨다. 예수는 벳세다 광야의 그 수많은 배고픈 무리들을 어린 아이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배불리 먹게 해 주시는 것으로 다스리셨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끌려 나온 여자를 돌로 쳐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용서와 자비로 다스리셨다. 예수는 그를 배반하고 팔아 버린 제자 가롯 유다의 발도 씻겨 주심으로 마지막까지 그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다스리셨다. 가롯 유다와 최후의 만찬 식탁에서 마주 앉아 유월절 음식을 함께 같이 잡수시며 끝까지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스리셨다. 예수는 십자가 좌편의 강도가 그렇게 예수를 함부로 대하며 조롱했어도 침착하게 다스리셨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도 여전한 마음으로 베드로를 사랑으로 다스리셨다. 예수 모른다 하고 부인하고 배반하고 저주하고 도망가 버렸던 제자 베드로에게 갈릴리에서 숯불을 지펴 놓고 떡과 생선을 구워 먹이시면서 다스리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의 질문은 한 때 비겁하게 예수 배반하고 도망쳤던 베드로의 비겁했던 마음을 곱게 빗어 다스리시는 회복의 다스리심이셨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식을 사랑의 매로 다스린다.”고 말할 때에 쓰는 그 ‘다스린다’는 말이 ‘다스림’이다. 생각해 보라. 마음과 정성을 담아서 돌보고 살피고 섬기는 것 사랑의 행위가 진정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요즘 계속해서 나라가 시끄러운 이유가 무엇인가. 왜 국민들이 광화문과 청와대 주변에서 웅성거리고 있나. 왜 추우에 떨며 노숙하며 기도하고 염려하고 있다. 다스림에 문제가 있다는 목소리가 아닌가. 동서고금에 어느 나라의 그 어느 백성들이나 평안하고 편안한 다스림을 원한다.

왜 애굽에서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하였나. 애굽 왕 바로의 다스림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르짖고 그래서 탄식하고 그래서 아우성이었다. 그 때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과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셔서 출애굽 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역사를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을 공의와 평화와 진리로 다스리시는 왕으로 보내셨다. 맞다. 그러므로 예수를 개인과 가정과 가족과 사회와 민족과 국가 안에 다스리시는 왕으로 모셔 들여야만 한다. 그래야 예수 안에서 그 평화를 누리게 된다. 나를 내가 다스리며 살아가려 하면 할수록 인생을 꼬이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나의 삶을 예수께서 다스려 주셔야 한다. 나의 남편, 나의 아내, 나의 부모, 나의 아들딸의 마음을 예수께서 다스려 주셔야 한다. 

교회에 오면 천국 같은데 집에 돌아가면 지옥이 되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는 순간 천국의 마음인데 집에 돌아가서 가족들의 얼굴을 대하면 마음에 지옥이 되고 마나. 왜 그런가. 나의 마음을 누가 다스려 주셔야 하나. 나의 남편, 나의 아내, 나의 아들 딸, 나의 사위 며느리, 나의 가족, 나의 일가 친척들의 마음을 누가 다스려 주셔야 하나.

내 사무실의 상사와 동료와 아랫사람들의 마음을 누가 다스려 주셔야 하겠는가. 내 가족이나 내 주변 사람들의 마음이나 생각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 지나. 나 자신과 내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누가 다스려 주셔야 평화롭고 행복해 질 수 있다고 여기나.

강림절 찬송인 105장, 찰스 웨슬리의 가사인 <오랫동안 기다리던>이란 찬송가의 2절을 보라. 

모든 백성 구하려고 임금으로 오시니 
영원토록 우리들을 친히 다스리시네
죄로 상한 우리 마음 은혜로써 고치고 
주의 빛난 보좌 앞에 이르도록 하소서

그렇지 않나. 누가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을 다스려 주셔야 하나. 예수 모시고 살아가는 인생과 가정에 어떻게 사랑과 기쁨과 감사와 평화가 있게 되나. 


목자이신 왕.
마태복음 2장 6절 끝에 보면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고 하였다. 그렇다. 예수는 목자의 곁을 떠나서 길을 잃은 양과 같은 우리를 찾아 나서서 찾으시고 기쁨으로 잃었던 양을 어깨에 메고 기쁨으로 돌아오는 사랑의 목자이시다. 하나님은 출애굽 당시에 모세를 앞장 세우셨지만 이스라엘 민족을 이끄는 목자는 하나님이셨다. 요단 강을 건너고 여리고 성을 점령할 당시에도 여호수아가 앞장 섰지만 그 배후에 하나님이 저들의 인도자가 되셨고 왕이 되셨고 목자가 되셔서 걸음 걸음을 이끌어 가셨다. 

목자는 백성들을 양처럼 잘 돌보아야 한다. 목자가 양을 잘 돌보고 기르면 양으로부터 양털과 젖과 고기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목자가 양을 돌보지 않고 잡아먹기만 한다면 그런 목자는 목자의 자격이 없다. 그러다가 북 이스라엘이 망하고 남 유다가 망하였다. 그 결과로 양떼인 백성들이 앗수르와 바벨론에 잡아먹히고 흩어져버렸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목자 삼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목자로 오신 왕이시다. 참 목자로 오신 왕이시다. 그는 어리석은 왕이나 악한 왕이 아니시다. 자기 배만 채우는 탐욕스러운 왕이 아니시다.

 <나는 길 잃은 나그네였네>라는 찬양이 있다.

1절 
나는 길 잃은 나그네 였네
죄중에 헤매이는데
사랑의 왕 내 목자 예수 
나를 집으로 인도 하네

2절
나의 영혼이 피곤할 때에 
날 붙들어 힘 주시며
날 위로해 주시는 예수 
나와 언제나 동행하네

3절 
내가 이세상 살아갈 동안 
주는 곁에 함께 하사
늘 보호해 주시는 예수 
나를 안전케 하시리라

후렴  
진실로 선함과 그 인자 하심이
날마다 함께 하시리--라
진실로 선함과 그 인자 하심이 
날마다 함께 하시리--라
영원토록 주 안에 내가  거하리라
영원토록 주 안에 나 안식 하리라
진실로 선함과 그 인자 하심이 
날마다 함께 하시리라
날마다 함께 하시리라
예수는 지혜로운 왕이며 겸손한 왕이며 존경 받는 왕이며 경배 받는 왕이시다. 예수는 영원한 왕이시며 자상한 목자이신 왕이시다. 그는 양과 같은 백성들을 푸른 초장과 잔잔한 시냇물가로 인도하는 신실한 목자이신 왕이시다. 

올해도 다가오는 성탄과 함께 예수를 나의 삶의 왕으로 영접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은혜가 늘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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